한계에 부딪혀야 그다음 한계로 갈 수 있다.
24년 11월
입원한 날부터 뇌질환 병동의 절세미녀(지금껏 살면서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수식어)가 된
나는 하이워커를 의지해서 병실 복도를 쉴 새 없이 걷고 또 걸었다.
근육이 빠진 다리에 힘을 넣고 일상으로 돌아가
큰애 졸업식에는 하이워커 없이 두 발로 걸어가 졸업을 축하해 주며
중학교 교복 맞추러 같이 가야 한다는 오직 그 생각으로 버텼다.
하루에 적게는 1만 2 천보에서 많게는 2만 5 천보를 걸었다.
발바닥에 굳은살이 배기고 병실 불을 끄면 기절하듯 잠드는 게 일상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고 치료사님들과
간단한 동작이 들어가는 운동을 시작했다
1. 아령운동
치료사님 0.5kg과 1kg 아령을 들고 왔다.
0.5는 너무 가벼워서 쳐다도 안 봤던 아령이었는데
수술 전에 쉽게 들었던 1킬로짜리 아령이 무거워서 들 수가 없었다.
다시 한번 내가 얼마나 몸이 약해졌는지 실감했다.
0.5킬로짜리 아령을 들고 간단한 팔 운동을 시작했다.
오른쪽 뇌수술이라 왼쪽팔의 힘이 금방 빠지는 게 눈에 보였다.
0.5kg 아령을 들고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인데 그 간단한 동작만으로도 땀이 나고 왼쪽팔이 후들거렸다.
"선생님 이거 너무 무거워서 못하겠어요"
"더 이상 못할 거 같을 때 두 개만 더하고 10초 버텨볼까요? 할 수 있어요."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지면서 한숨이 나왔다.
"윽"
2. 공 운동
누워서 다리를 세우고 다리 사이에 탱탱볼 같이 가벼운 공을 끼웠다.
처음엔 가볍게 몸풀기 동작으로 떨어지지 않게 다리 힘으로 공을 잡고 있는 거였다.
이 동작이 익숙해지자 치료사선생님이 손으로 공을 뺏으려고 할 테니 뺏기지 않게 버티라고 하셨다.
뺏기지 말라는 말을 듣자 순간 공을 내 딸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이혼소송에서 기각으로 맞서다 결국에 반소로 나올 때까지 양육권과 친권으로 집요하게 괴롭히던
유책이가 떠올랐다.
결코 아이들을 유책이에게 뺏길 수 없었다.
책임감도 없고 부부간의 의리도 없는 놈한테 아이들을 뺏길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지켜야 하는 건 단순히 탱탱볼이었는데 감정이입이 심했나 보다.
당황한 치료사님이 칭찬을 했다.
분노는 나의 힘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3. 런닝머신
복부에 힘을 주거나 무거운 것을 들면 안 되며 절대 안정을 해야 하는 기간이 수술 후 3주째 되는 날까지였다.
3주 차에 들어서서 처음으로 런닝에 올라 걸음을 걸었다.
속도는 1.5
보통의 성인남녀의 걸음속도는 3~4 정도라고 했다.
그러나 이렇게 일정한 속도로 걸어보는 게 수술 후 처음이라 런닝머신에 올라가는 거 자체에
큰 용기가 필요했다.
천천히 한걸음 한걸음 옮기면서 30분을 걸었다.
꾸준한 속도로 계속 걷는 런닝은 지구력에 좋다고 했다.
수술하기 전 나는 수술 후 회복할 체력을 키우기 위해
1킬로 아령을 양손에 들고 속도 5.5로 놓고 1시간씩 걸었는데
지금은 1.5 속도로 30분만 걸었는데도 목이 마르고 숨이 찼다.
포기하지 않고 30분 꽉 채운 나를 치료사님이 기특하다며 응원해 주셨다.
"스텔라 님 대단하네요. 중간에 못한다고 하실 줄 알았어요. 매일 0.3씩 올려서 걸어요.
속도는 3까지 가고 그 후에는 경사도를 올려서 지구력을 키우도록 하죠"
4. 계단
내가 다시 올라갈 수 있을까 제일 걱정했던 게 계단이었다.
내 앞에 펼쳐진 계단을 보자
다리가 후들거리고 살짝 어지러웠다.
난간을 안 잡으면 위태로울 거 같았다.
"오늘은 1층만 올라갈 거예요. 하다가 힘들면 안 해도 돼요.
살짝 몸을 숙이면서 골반을 뒤로 빼고 올리는 발에 체중을 실어가며
다시는 못 오를 줄 알았던 계단을 하나하나 밟으면서 올라갔다.
복부에 힘이 더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재활이 힘들수록 나의 몸은 하루가 다르게 빠진 근육이 다시 붙었고
집으로 꼭 돌아가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올라간 계단을 다시 내려오는 연습도 했는데
위에서 계단을 내려다보니 아찔하면서 어지러웠다.
난간을 잡고 내려와도 다리가 많이 후들거리면서 겁이 났다.
당분간 내려오는 연습은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5. 세라밴드(노란색, 녹색)
"오늘은 밴드로 스트레칭이랑 팔운동을 해볼 거예요. 색깔이 진할수록 강도와 용도가 달라요."
매트리스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 나에게
치료사님이 가져온 길고 노란색 밴드는 진심 처음 보는 거였다.
"이게 뭐예요? 저 진짜 처음 봐요"
그동안 얼마나 바쁘게 사셨냐는 말에 순간 갑자기 매트리스 위로 가슴이 무너져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바보같이 살았지.'
나는 그동안 바보처럼 살았던 거다.
취미 하나, 운동 하나 배울 내 시간도 갖지 못한 채
남편과 아이들만 바라보고 살았다.
그러나 돌아온 건 의리도 없는 전남편의 배신
그 고통에 괴로워하다 얻은 뇌종양.
다시는 그런 삶을 살지 않으리라는 굳은 의지로 밴드를 당기고 또 당겼다.
퇴원하고 집에 가면 하나 장만해야지~ㅎ
세라밴드로 할 수 있는 운동은 참 다양했다.
6. 필라테스 링
자동차 핸들처럼 생긴 걸 들고 와서는 이것저것 알려주시는 치료사님께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이건 이름이 뭐예요?"
"ㅎㅎㅎ 이건 필라테스 링이라고 해요. 이걸로 할 수 있는 게 정말 많아요.
소모품이니깐 비싼 거 안 사도 되고요, 쿠팡에서 저렴한 걸로 사서 스트레칭 많이 하세요.
스트레칭은 많이 할수록 좋아요"
이것 또한 진심 처음 보는 거였고, 세상에 이런 간단한 도구로 코어힘을 키우고
유연성을 키울 수 있다니 신세계였다.
이제 정말 신께서 나를 돌보며 살라는 시간을 주신거라고 생각하고
하나하나 열심히 배웠다.
퇴원하면 사야 할 목록에 '필라테스 링'도 새로 추가되었다.
"오늘은 몸무게 재는 날이니깐 준비되는 대로 휴게실로 나오세요~"
이동기사님들이 명랑하게 병실복도에서 소리쳤다.
엥???
이게 무슨 소리지?!
여러 명의 이동기사님이 병실을 돌면서 몸무게 재야 되니깐 밖으로 나오라고 재촉했다.
"갑자기 몸무게는 왜 재는 거예요?"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느긋하고 졸린 분위기였는데, 이제는 정신이 번쩍 들면서
팽팽한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어리둥절한 나에게 병실 8개월 차 여사님이 별거 아니라는 말투로 말해준다.
"환자 상태 파악하려고 하는 거지. 매달 한 번씩 재, 별거 아냐"
"어.... 저는 몸무게 공개하기 싫은데....ㅠㅠ"
낙담한 나의 표정을 보셨는지 황급히 한마디 덧붙이신다
"젊은이 몸무게를 누가 관심이나 가지겠어?"
살짝 밖을 나와 휴게실 동태를 살펴보니
휠체어가 길게 늘어서있고 한 명 한 명씩 휠체어에 올라탄 채로 몸무게를 재고 있었다.
몸무게를 재는 건 그렇다 치고 그다음이 문제였다.
"홍길동 72킬로"
이동기사님이 체중계의 숫자를 큰 소리로 외치자 장부담당 기사님이 복창하며 기재를 한다
"홍길동 72킬로"
내 몸무게도 저렇게 만천하에 공개되는 거란말이지...
저벅저벅 병실로 돌아왔다.
배부른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개인정보보호나 환자의 인권은 어디에도 없었다.
순간 재활에 운동이 추가되면서 입맛이 돌아
밥도 세끼 다 먹고 간식도 먹고 과일도 챙겨 먹은 내가 너무 후회됐다.
원래 하루 한 끼 정도만 제대로 챙겨 먹었는데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르고 건강한 돼지가 된 나 자신이 너무 창피했다.
나랑 나이가 가장 비슷한 56살 언니는 42킬로가 나왔다.
키가 나보다 작다고 해도 부러운 숫자였다.
그러나 42라는 숫자는 내가 아가씨 일 때도 가져본 적이 없는 숫자였다.
조용히 병실로 들어와 숨죽여 있었다.
제발 모르고 지나가라.. 제발 나는 재지 말자..
마음속으로 빌고 있는데
"몸무게 재게 나와"
이동기사님이 병실로 들어왔다.
물론 이건 뻥이었다.
"어???.. 그래.. 알았어"
이동기사님이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돌아가셨다.
계속 병실에 있음 안 되겠다 싶어서 휴게실이 몸무게 재는 걸로 어수선한 틈을 타서 1층 로비에 내려와
티비를 보고 한참 후에 올라갔다. 이제는 상황이 끝났겠지 라는 기대감으로...
조용히 병동으로 들어가 병실로 들어가려는데
이동기사님 중 한 명이 장부를 훑어보면서
"스텔라가 누구지? 이환자만 몸무게를 안 쟀네"
그러면서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보셨다.
내 이름에 깜짝 놀라 멈칫 하자 아까 병실로 와서 날 데리러 오셨던 이동기사님이
손가락으로 날 가리켰다.
"저깄다!!!. 스텔라"
여러 명의 이동기사님들 다 날 쳐다봤다.
더 이상 피할 수 없겠다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스스로 체중계 위를 올라갔다.
"스텔라 @#$ 키로"
이동기사님들은 하나같이 조심스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치 없는 장부담당 기사님이
"입원할 때보다 많이 늘었네.. 병원밥이 맛있나 봐~ 껄껄껄"
다른 이동기사님들이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다 근육이에요. 이젠 운동도 하거든요"
억지로 쿨한 척하며 자리를 떠났다.
저녁식사로 내가 좋아하는 반찬들이 나와서 어떻게든 먹어보려고 애를 썼지만
이날은 도무지 입맛이 돌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