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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색 Apr 12. 2021

나에게 보내는 응원: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않은 나에게

스스로를 믿지 못해 주저했던 과거의 내게, 길을 찾아 나선 현재의 내가

때로는 나 자신만이 내게 힘을 실어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힘은 시간만이 빚을 수 있는 용기에서 나왔다.


✤ 본 글은 2부로 구성돼 <나에게 보내는 응원: 용기와 자신감이 부족한 나에게>로 이어집니다.


1

삶 속에는 결코 '추억'이라고는 칭할 수 없는,
원하든 원치 않든 강렬한 기억으로 각인되어버린 순간들이 있다.


"너는 꿈이 뭐니?"


                                "화가요!"


"......."



"그런 건 취미로만 하는 거야."


나는 그 때 아빠의 표정이나 목소리가 어땠는지 정확히 떠올릴 수는 없지만, 뿌연 기억 속에서도 명확하게 느낄 수 있다. 아빠의 말에 깊게 뿌리내려있는 단호함을, 그리고 내게 그림이란 그저 '그런 거'여야만 한다는 것을.

그리고 이 순간의 기억은 종종 내 머리와 마음 속으로 덮쳐 들어왔다.
밀물의 파도처럼,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2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쉬는 시간 혼자 조용히 앉아 낙서를 끄적이던 나와는 달리, 내 옆 자리의 남자애는 헤드폰을 낀 채 무리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비트가 강한 음악을 즐겨 드는 아이였다.

딱히 접점도 없고 친하지도 않아 늘 어색하게 느꼈던 이 친구가 어느 날은 내 어깨 너머를 힐끗 보더니 옆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야."

                                                  "응?"


"야, 너 완전 천잰데?"

                                                 "응??"


"그 그림, 내가 작업한 음악에 앨범아트로 써도 돼?"


                                                 "응???"


                                              "......아, 응!"


그렇게 내 낙서는 그 친구의 SNS 계정에 올라갔다. 내 이름 석 자와 함께.

그 친구는 워낙 장난기도 많은 성격이라 가벼운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겠거니 머리로는 생각했지만, 마음은 이 순간을 굉장히 인상적으로 기록한다. 아마도 내가 그린 것이 인정 받았다는 생각에, 어쩌면 영영 이루지 못할 꿈을 조금이나 맛본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 해 그 아이는 음대에 합격했다.
반면 나는 그림을 그리는 대신 계속 낙서를 끄적이기만 했다.

계속.



가끔, 아니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예술은 취미로만 하는 것"이라는 가족의 탐탁치 않은 반응을 무릅쓰고 예술계열 공부를 했으면 어땠을까.
내 마음의 소리에 보다 세심히 귀를 기울여, 고민하는 대신 일찍부터 창작의 길을 걸었으면 어땠을까.
그렇게 했다면 지금의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랬다면 기나긴 시간 후회하는 일이 없었을까.



1

가족 속의 나,

내 안의 가족


내게 있어 예술이란 넘봐서는 안 되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선택지에 포함되어 있지도 않고 포함해서도 안 되는 금기사항이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오랜 기간 알게 모르게 체화된 가족의 문화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겐 내가 친언니처럼 따르던, 나로 하여금 그림에 관심을 갖게 한 내 유년 시절 우상이었으며 내가 여전히 우러러보는 친척언니가 있다. 언니는 어렸을 때부터 미술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미대에 진학했지만, 집안의 가장 큰 어르신이었던 그렇기에 가족의 분위기를 좌우하셨던 할아버지께서는 언니의 진로에 대한 불편함을 감추지 않으셨다. 이제는 희미한 나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에마저 할아버지의 언짢음이 진하게 묻어나올 정도이니, 언니가 자라는 내내 직접 느꼈던 부담감과 스트레스는 말로 다할 수 없지 않을까 싶다.


졸업한 이후 언니는 오랜 기간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저 속으로 사정이 있겠거니 했었는데, 성인이 되어 듣게 된 언니의 얘기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언니는 가족의 인정의 결핍으로 인한 마음의 깊은 상처 때문에 그림을 그리는 자신에 대한 "수치심"들었고, 그래서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뭐라도 그리려고 해도 이내 붓을 내려놓을 수 밖에 없었다며 언니는 터져나오는 눈물을 애써 휴지로 꾹꾹 눌러냈다. 나는 감히 어떤 위로도 건네지 못한 채 그저 조용히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잘 이해할 수 있었기에. 언니처럼 가족의 반대를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 한들, 오래 전부터 나 역시 몇 가지는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가족은 내가 '훌륭한 사람'이 되길 원했고,

나는 좋으나 싫으나 '착한 아이'였으며,

내가 '공부' 아닌 예술을 하겠다고 하면* 

온 가족이 내게 걸고 있던 모든 기대를 저버리게 될 것이라는 것을.


*물론 필자는 예술이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분야라고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대한민국에서 '공부'란 너무 편협한 정의를 가질 뿐이고, 필자의 가족은 그 좁은 의미로만 '공부'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뿐.



2

알지 못했다,
나도 나를 외면했다는 걸


너무나 어렸을 때부터 이런 생각이 원치 않게 박혀있던 나였기에, 지금 돌아보면 나는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걸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외면해왔던 것 같다.

빈 공책이 생기면 마지막 장까지 꽉 채워 이야기를 쓰고,

시도 때도 없이 그림을 그리느라 스케치북을 십수 권씩 채우고,

이면지로 동화를 만들어 내가 만든 가상의 출판사 로고를 그려넣고,

고등학교 3학년 때에도 입시와 관련 없는 글/그림 공모전을 그렇게 찾아다니고,

열심히 한다고 누가 알아봐주지도 않을 전시회 준비에 만성적인 수면부족에도 밤을 샌 반면, 

모의 법정이나 모의 유엔에는 꽤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입해도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직업 기재란에는 항상 '변호사'나 '외교관' 따위의 소위 '전문직'을 기계적으로 적어내리곤 했으니, 나는 내 자신의 마음을 마주하는 것을 정말 꾸준하고 끈질기게 회피했던 듯싶다. (심지어 고등학교 2학년 때 생활기록부에 적어낸 장래희망이 '정치인'이었다. 세상에. 이건 마치 <맛있는 녀석들>의 '이십끼형' 유민상씨가 단식원 리더가 되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물론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어른들이 원하기 때문에 그런 직업을 지향했던 것은 아니다. 분명 '사회에 공헌하고자' 하는 고귀하고 순수한 (반주입식) 이상을 순진하나마 진정으로 믿었고, 당시 목표로 삼았던 직업과 적성이 맞는다고 스스로 생각할 만큼 잔재주가 뒷받침이 됐으며, 자랑은 아니지만 성적이 꾸준히 좋았기에 나 역시 내겐 이미 정해진 길이 있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착한 아이'에 걸맞게 주어진 일을 성실히 해나가던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훌륭한 사람'으로 향하는, 잘 다듬어진 너른 길을 순탄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3

나와의 솔직함, 그리고

밀어낼 수 없는 내면의 불편함


하지만 겉으로는 무탈해보이는 여정 가운데, 어쩐지 마음 깊은 곳에서는 같은 울림이 이상하리만큼 반복됐다.

'분명 이건 내가 아닌데.
이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닌데.'


혼란스러웠다. 가족이 내게 거는 기대가 터무니없거나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분명 지금 걷고 있는 길이 나한테 아주 안 맞는 것 같지도 않은데. 이렇게 계속 오던 길을 나아가서 내게 나쁠 게 없을 텐데, 도대체 왜?


그렇게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마음은 대학을 다니며 점차 커져갔다. 정해진 과목을 수강해야 하는 중·고등학생 때와 달리 관심 있는 분야를 다양하고 깊게 탐구할 수 있는 환경 속, 나는 두 가지 면이 점점 더 분명해지는 동시에 서로 양립하는 것을 느꼈다. 한편으로는 글, 예술, 문화, 사회에 대한 나의 관심이 여름비를 맞고 무성하게 자라나는 풀처럼 무섭게 생장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간 지켜져 온 것들이 흔들리며 생기는 불안감이 심화됐다. 내 마음이 갈망하는 것들에 대한 관심은 더 깊고 넓게 팽창하고 확장해갔지만, 나는 여전히 이것들이 '나의 길'이 아니라는 생각에 선뜻 더 나아가지 못하고 스스로 제동을 걸었던 것이다.


그렇게 양립되는 두 가지 상태의 속에서 나는 어느 쪽으로도 더 과감하게 방향을 틀지 못한 채 '안전'한 범위 내에서 내 자신과 타협하는 것을 선택했다. 법학이나 정치외교학에는 눈길조차 가지 않았던 나는 전공으로 커뮤니케이션을, 부전공으로 사회학을 선택한 반면, 적어도 변호사, 외교관, 정치인은 되지 않겠다는 생각과 함께 '그렇다면 교수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무감 짙은 마음을 안고서 해오던 대로 공부를 계속했다.


그러는 내 안에서는 끊임 없는 소란이 일었다. 내 마음이 원하는 것에 조금이나마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자 그저 살짝 불편하기만 했던 마음이 점점 참을 수 없을 만큼 답답해져가는 것을 느꼈다. 대학 생활 첫해가 끝나가던 어느 날, 결국 폭발해버린 내가 쏟아지는 생각을 그대로 써내려간 일기를 보면 이 답답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 나의 삶이 점점 무미건조한 무언가로 굳어져간다는 느낌이 든다. …… 가족이 말하는 ‘훌륭함’ 이란 인정받는 직업을 갖고 인정받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는 의미한다. 이 말의 의미는 내게 은근한 압박으로 다가왔다. 물론 지금도 어리지만, 지금보다 더 어렸던 시절에는 그게 압박인지조차 몰랐다. …… 가족의 기대는 ‘효도’와 ‘의무’라는 명패를 단 채 ‘똑똑한 아이’, ‘착한 딸’이라는 다소 꽉 끼는 옷을 입은 내 어린 몸에 묵직하게 내려앉았고, 그 힘의 무게는 내게 너무 익숙해져버렸다.



4

그렇게 마음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자꾸만 꿈틀대며 요동치는 마음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던 나는 이후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끊임없는 고민의 시간을 지났. 먼저는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대학원생들과 친한 교수님들께 질문을 하며 막연하게만 알고 있던 '연구자로서의 삶'에 대한 이해를 구체화시켰다. 동시에 전공 교수님의 초청을 받아 대학원 수업을 수강하고, 결코 짧지만은 않은 졸업논문 프로젝트를 2년에 걸쳐 진행하며 들은 내용을 직접 경험해갔다. 동시에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찾아 읽으며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돌아봤고, 고민 끝에 대학원에 진학했으나 결국엔 마음의 소리를 따라 중퇴를 한 이들의 경험담을 분석해 공통점을 짚어봤다. 그러는 가운데 여러 갈래로 나뉘어있던 내 마음은 하나로 수렴다.


이렇게 2년이 지나고 졸업이 다가왔다. 모국어를 사용하지 않는 환경에서 대학을 다니면서도 매년 장학금과 상을 받고 전공 수석으로 졸업했던 나였기에, 부모님께서는 '당연히' 내가 공부하던 곳에 남아 바로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계속 할 거라고 생각하셨다.


하지만 졸업하자마자 나는 곧장 귀국했다.


이렇게 하기로 결정을 내린 데에는 사랑하는 할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 등 여러 가지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도 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였다. 나는 더 이상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지도, '착한 아이'로서 살고 싶지도, 가족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내 마음을 외면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모든 건 다만 시작일 뿐이었다.



             다음 글로 <나에게 보내는 응원: 용기와 자신감이 부족한 나에게>가 이어집니다.

                       (다음 글 주소: https://brunch.co.kr/@museumofthought/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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