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조조 래빗>을 보고
줄거리는 간단하다. 제2차 세계대전 말, 유대인 소녀를 몰래 숨겨주는 한 소년의 이야기다. 세뇌 교육과 또래 압력으로 나치를 숭상하던 소년은 소녀로 인해 점점 변해간다. 평범한 이야기이지만 디테일이 발랄하고 독창적이다. 전쟁의 참담함과 자유의 찬란함을 이런 식으로 풀어낼 수도 있구나, 새로웠다.
모든 인물이 입체적이다. 가벼워 보이는 로지는 누구보다 묵직하다. 재수없어 보이는 조조는 여리고 섬세하다. 유대인 소녀 엘사는 칼을 쥐고 남자에게 달려든다. 가장 좋았던 건 샘 록웰이 연기한 클렌젠도프였다. 그저 수많은 나치군 중에 아니라 클렌젠도프였다. 나치를 미화하지 않되, '역사에 쓰이지 않은 어느 한 사람의 이야기'를 상상하게 한다.
영화와 반대로 우리는 악인에 열광한다. 절대악을 상정하고 인민재판을 한다. 악인은 대중의 필요에 의해, 대중의 입맛에 맞게 진화한다. '논리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미치광이 악인' 때문에 세상이 나빠진 거라고 생각하면 모든 아다리가 들어맞는다. 복잡해질 필요가 없다. 복잡해지기 귀찮아서 악인을 내세운다. 사실상 어느 누구도 절대 악도, 절대 선도 아니며 세상이 이모양 이꼴인건 미치광이 악인 한명 떄문만이 아니라 간단히 설명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 때문인데도 말이다. '저' 미치광이 악인 한 명만 없어지만 이 세상은 완벽해질 거라는 자기위안은 개인의 정신건강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겠으나 실상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