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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노마드 함혜리 Sep 12. 2019

피렌체 산마르코 수도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태고지’


이탈리아 피렌체는 ‘르네상스 예술의 보고(寶庫)’. 피렌체에 가보면  말이 하나도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있다. 르네상스 미술 사조를 대표하는 걸작들이 빼곡하게 걸린 우피치 미술관 하나만 놓고 봐도 그렇다. 그뿐만이 아니다. 중세의 건물들이 시간을 잊은 듯이 이어지는 저택과 성당, 수도원마다 인류의 자랑거리로 삼을 만한 예술작품들이 가득하다.   년의 시간을 품은 작품들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감동적이다.

만약 누군가 내게  평생 마지막으로 피렌체에 가서   곳을 방문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디로 무엇을 보러 가겠느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어떤 답을 내놓을지 한번 생각해 봤다. 산마르코 수도원에  있는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  번째로 떠올랐다. 예수 탄생의 일화에서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 사실을 알리는 것을 ‘수태고지(受胎告知·Annunciation)’라고 한다.  순간은 그리스도교가 정착한 5세기 이래 서구 미술의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졌다. 우피치 미술관에도 시모네 마르티니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수태고지 소장돼 있다. 모두  아름답지만 그보다 개인적으로 가장  감동을 받은 작품은 산마르코 수도원의  ‘수태고지.

피렌체 산마르코 수도원의 수태고지. 계단을 올라 고개를 들면 마주하게 된다.

이 작품을 그린 이는 프라 안젤리코(1387~1455)다. 프라(Fra)는 수도사들의 이름 앞에 붙이는 호칭으로 ‘형제’라는 뜻이고, 안젤리코는 ‘천사 같은’이라는 뜻이니 ‘천사 같은 수도사 형제’가 되겠다. 본명이 구이도 디 피에트로인 그는 청년기에 채색 삽화가로 도제 수업을 받고 화가로 활동하다 23세에 도미니크회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가 됐다. 훗날 피에솔레에서 수도원장까지 지냈을 정도로 신심이 두터웠던 그는 기도의 행위, 신앙생활의 실천으로 그림을 그렸다.  채색 필사본과 제단화로 명성이 드높았던 그가 대대적인 리모델링 공사가 진행된 산마르코 수도원의 장식화를 맡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피렌체의 대성당 두오모에서 아카데미아 미술관을 지나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산마르코 수도원은 산마르코 국립박물관으로 불리지만 프라 안젤리코 미술관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그의 작품으로 가득하다.  

산마르코 수도원은 본래 실바 네스트리 수도회 소유였던 것을 1436년 도미니크 수도회가 사들인 뒤 메디치가를 부흥시킨 코시모 데 메디치의 후원으로 재건축했다. 1434년 피렌체의 구 귀족들에 의해 추방됐다가 돌아온 코시모는 청빈함을 내세운 도미니크회 수도원을 적극 후원함으로써 메디치가의 차별화된 문화코드를 만들고자 했다.

수도원의 회랑과 중정. 묵상의 공간.

메디치궁을 지은 건축가 미켈레초가 1437년부터 재건축 공사를 시작해 16년 만인 1452년 지금의 수도원 건물이 완성됐다. 프라 안젤리코는 49세이던 1436년부터 1445년까지 9년 동안 이곳에 머물며 벽화와 회랑, 수도사들의 독방에 예수의 생애와 성경의 일화를 주제로 프레스코화를 그려 넣었다. 프라 안젤리코는 원근법과 같은 당대의 기술과 수도사로서의 경건함과 신실함, 신학적 지식을 동원해 수도원을 아름다운 프레스코화로 장식했다.

산마르코 광장에 있는 성당을 바라보면서 왼쪽에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 소박한 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넓은 내부 정원을 둘러싸고 아치들이 이어지는 산 안토니오 회랑이 눈에 들어온다. 회랑을 따라 가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온다. 계단을 올라 첼라(Cella)라고 하는 수사들의 독방이 줄지어 있는 2층에 도착해 고개를 든 순간 마주하게 되는 벽면에 ‘수태고지’가 그려져 있다. 심장이 ‘쿵’ 하고 멎는 느낌이다. 작품을 보는 순간 온몸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는 것 같았다.

미술사 책에서 도판을 통해 수없이 봤던 그 ‘수태고지’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답다. 고운 선과 은은한 색감, 작품에서 풍기는 우아함은 아름다움의 극치다. 고결한데 매혹적이고 아주 작은 디테일에서도 그림 속의 인물들이 느끼는 감정이 전달될 정도로 섬세하다.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는 다른 작품들과 분위기가 아주 다르다. 천사의 얘기를 들은 마리아는 천사에게 ‘반문’하다가 이내 그 뜻에 ‘순종’하는 아주 짧고도 중요한 순간을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조심스럽게 사실을 알리는 가브리엘의 자상한 표정과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저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곤 바로 “말씀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받아들이는 마리아의 모습이 극적으로 표현돼 있다. 황금빛이 은은하게 공간을 비치는 가운데 천사와 마리아 모두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고,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있다. 부드러운 선과 은은한 색상은 아름다움을 넘어 성스럽다. 수도사들은 이 그림을 보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 고요하고 명상적인 분위기 속에서 기도와 묵상으로 하루를 마무리했을 것이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수태고지’에서 그림의 배경으로 묘사된 작은 안뜰이 실제 존재하고 있어 마치 보는 이로 하여금 그 현장을 목격하는 듯한 환상에 빠지게 한다.

수태고지에서 배경으로 등장하는 곳과 아주 흡사한 장소. 수태고지 속의 장면이  실제 일어난 것 같다.

복도를 따라 2층에 빼곡하게 들어 차 있는 42개의 독방에는 각기 다른 성서의 이야기를 담은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 방으로 들어가는 문 위에는 번호가 적혀 있지만 방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는 성서의 순서대로가 아니다.

1번 방에는 부활한 예수를 처음 발견한 막달라 마리아가 손을 잡으려 하자 예수가 “나를 잡지 마라”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복도에 있는 ‘수태고지’  다음으로 감동을 받은 작품이다. 왜 이 그림을 첫 번째 방에 그렸을지 궁금하다. 우선 예수는  영혼만 부활한 것이 아니라 육체까지 부활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프라 안젤리코는 다른 수도사들에게 바로 그 믿음이 가장 중요하며, 그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기를 바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첫번째 방에서 만나는 프라 안젤리코의 작품 ‘나를 붙잡지 마라’.

두 번째 방에는 죽은 예수의 시신을 가운데 두고 슬퍼하는 장면을 그린 ‘애도’, 3번 방에는 또 다른 ‘수태고지’가 그려져 있다.

수도사들의 방은 소박하다. 문을 닫고 들어가면 세상과 통하는 창구는 작은 창문 하나뿐이다. 프라 안젤리코가 정성스럽게 그림을 그리는 장면, 그리고 그 방에서 프레스코화를 보며 긴 시간 동안 기도하고 묵상하던 수도사들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훌쩍 떠나 있는 것 같다.  


수도원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코시모 데 메디치를 위해 북쪽 회랑 끝에 마련한 특별 기도실(39번 방)에는 메디치가의 후원을 받았던 화가 베노초 고촐리가 1442년에 그린 ‘동방박사의 경배’가 있다. 역시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로 여러 화가들이 즐겨 다룬 주제로 동방박사들이 갓 태어난 아기 예수를 찾아와 경배를 드림으로써 예수가 구세주임이 만천하에 공인되는 것을 상징한다. 코시모의 기도실에 특별히 이 그림을 그린 이유는 피렌체에서 선택받은 가문, 존경받는 가문이 되고 싶었던 메디치가 사람들이 동방의 현자들을 자신들의 수호성인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동방박사들은 별의 움직임을 보고 앞일을 예언할 정도로 선지자적인 사람들이었다. 메디치 가문은 동방박사의 경배가 있었던 1월 6일의 주현절 행사를 후원하기도 했다. 고촐리는 이 그림을 그리고 나서 27년 뒤 메디치 궁 예배당에도 ‘동방박사의 행렬’이라는 유명한 그림을 그렸다.  

메디치가에서 주관한 피렌체의 인문학 아카데미에 참여하는 지식인들이 자주 모였던 아래층 수도사들의 식당에는 미켈란젤로의 스승으로 유명한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최후의 만찬’이 있다. 미술사가들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과 다른 구성을 비교해 보일 때 많이 등장하는 유명한 작품이다.

수도원 2층에는 아름다운 도서관도 있다. 아름답기만 할 뿐 아니라 세계 최초의 공공도서관이라는 명예까지 안고 있는 이곳에는 희귀 고서와 필사본들이 진열장을 채우고 있다.

코시모 데 메디치는 은행업을 확장시켜 엄청난 부를 쌓았다. 반 귀족·친서민 행보로 피렌체 시민들이 ‘국부(國父)’라는 칭호를 붙였을 정도로 존경과 지지를 받았던 그는 막강한 부를 정치·외교적 입지를 다지는 데 사용했을 뿐 아니라 예술과 학문 융성에도 아낌없이 사용했다. 그는 로마 가톨릭과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둔 비잔틴 제국의 동방 정교회의 화합을 위한 종교회의(1438~1439년)를 피렌체에서 주재했다. 이 회의는 실패로 끝났지만 의외의 성과를 남겼다. 회의에 왔던 비잔티움 제국의 종교 지도자들과 인문 학자들은 메디치가의 환대에 대한 보답으로 필사본 등 희귀한 고서를 코시모에게 선물했다. 코시모는 산마르코 수도원을 개축하면서 도서관을 만들어 희귀본을 소장하고 연구를 원하는 모든 이들에게 도서관을 개방했다. 피렌체의 산마르코 수도원에 세계 최초의 공공도서관이 있게 된 배경이다. 산마르코 수도원은 198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글·사진 함혜리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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