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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노마드 함혜리 May 11. 2024

공연리뷰] 대타무대여서 더욱 빛난 힐러리 한

갑자기 커다란 선물을 받았을 때 이런 느낌일까. 혹은 ‘득템’한 기분?, 아니면 요즘 젊은이들이 즐겨 사용하는 표현대로 “오히려 좋아!”라고 할 수도 있겠다.  

5월 9일과 10일 서울시향의 정기공연 협연자가 피아니스트 손열음에서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으로 변경된 경우를 두고 할 수 있는 적절한 비유가 될 것이다. 손열음은 9,10일 얍 판 츠베덴이 지휘하는 서울시향과 함께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4번을 연주하기로 돼 있었지만 리허설 과정에서 인후통을 동반한 고열 증세로 출연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비상이 걸린 서울시향 측은 피아니스트 안드레아스 해플리거와 함께 하는 듀오 리사이틀(11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을 위해 8일 내한한 힐러리 한을 급하게 섭외했다. 힐러리 한은 흔쾌히 구원투수 역할을 수락해 주었고 한국 팬들은 그녀가 연주하는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을 수 있었다. 손열음의 건강이 걱정되기도 하지만 월드클래스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를 선물로 받은 것은 팬들에게는 분명 즐거운 일이었다.

힐러리 한으로 말하자면 1979년 미국 출생으로 풍부한 음악성과 뛰어난 테크닉을 겸비한 월드클래스 바이올리니스트다. 현재 시카고 심포니 및 뉴욕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주 음악가, 줄리어드 음악학교 객원예술가이자 도르트문트 페스티벌 큐레이팅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힐러리 한은 데카, 도이치 그라모폰, 소니 음반사를 통해 꾸준히 음반을 발표했고, 이 음반들은 모두 빌보드 차트 탑 10위권에 진입했고 그중 3개의 음반이 그래미상을 수상했다. 2021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상을 수상했으며 2023년 뮤지컬 아메리카 선정 올해의 아티스트로 뽑혔다.

이런 세계 정상급 연주자가 시간이 맞는다고 해서 ‘대타 연주’를 수락하는 것은 보기 드물다. 연주자 자신의 자존심도 문제고, 예정에도 없는 연주를 하면서 만에 하나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그동안 쌓은 명성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우려도 있다. 하지만 힐러리 한은 달랐다. 자존심을 앞세우기보다는 자신이 상주음악가로 있는 뉴욕필의 감독이었던 얍 판 츠베덴이 음악감독을 맡고 있는 서울시향이 곤경에 처한 것을 못 본 척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번째는 연주자로서의 자세다. 언제 어디서든 완벽한 연주를 할 준비가 되어있을 정도로 평소에 연습을 한다는 얘기다. 연주자로서 자기 관리에 철두철미하고 완벽한 연주와 진지한 곡 해석 등으로 ‘얼음공주’라고들 하지만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표현인 것 같았다. 오히려 따뜻한 인간미가 넘쳤다.  

서울시향의 9일(롯데콘서트홀)과 10일(예술의전당) 프로그램은 니나 셰이커의 ‘루미나’(2020, 아시아 초연),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힐러리 한 협연), 브람스 교향곡 2번이었다.

니나 셰이커의 ‘루미나’는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유율타악기인 비브라폰을 말렛으로 치는 것이 아니라 활로 그어대는 소리와 악장이 연주하는 바이올린이 은밀하고 신비로운 하모니를 보이며 미묘한 빛의 변화를 보여주었다. 이 곡은 니나 셰이커가 2020년에 USC 손턴 심포니를 위해 쓴 작품으로 빛과 어둠의 스펙트럼, 그 중간의 분명치 않은 단계를 표현하기 위해 조밀한 화성, 하나의 음표를 여러 악기가 연주하면서 생기는 미분음을 통해 안개처럼 모호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그림자처럼 흐릿한 음향은 빛을 상징하는 밝고 예리한 음향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며, 그림자의 기괴함 가운데 갑자기 폭발하는 빛을 포착하기도 한다. 인도 전통 음악인 라가(Raga)에서 영감을 받은 독특한 음향과 다채로운 타악기 연주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음악은 인도의 비밀스러운 깊은 정글에서 빛이 가득한 가운데 펼쳐지는 신비로운 서사를 음악으로 듣는 것 같았다.

드디어 브람스를 연주하는 힐러리 한의 무대를 실견하는 시간(힐러리 한이 2014년 파보 예르비 지휘로 라디오 프랑크푸르트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유튜브 영상의 조회수는 무려 861만 회나 된다).

전날 롯데콘서트홀 연주에 이어 10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무대에 등장한 힐러리 한. 반짝이는 구두코가 살짝 드러나는 파란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예정에 없었던 무대에서 연주하는데도 전혀 긴장하지 않고 오히려 무대에서 너무 행복해 보여서 보는 사람도 즐거웠다. 연주를 할 때도, 잠시 바이올린을 들거나  옆구리에 끼고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귀담아들을 때에도 시종일관 미소를 머금고 있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77)은 브람스가 가장 전성기였던 1878년 여름에 오스트리아 남부 휴양지 푀르트샤흐에서 작곡한 그의 유일한 바이올린 협주곡이다. 브람스는 이 곡을 작곡할 때 절친한 벗이었던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의 자문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힐러리 한의 연주는 곡 해석에서 거의 완벽에 가깝다는 평을 듣는다.

구조면에서는 베토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과 같은 D장조를 중심 조성으로 취하고 있고, 구조적인 면에서도 장대하고 조직적인 1악장, 가요적인 2악장, 무곡풍의 3악장이 차례로 등장하는 식이다. 1악장(Allegro non troppo)은 명확한 소나타 형식으로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의지가 교차하듯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목관을 중심으로 부드러운 오케스트라 연주에 이어지는 바이올린 솔로에서 힐러리 한은 전반적으로 빠른 템포 안에서 완급 조절을 능숙하게 하며 공연장의 분위기를 압도했다. 1악장의 카덴차에서는 독주 카프리시오를 연주하는 것처럼 공연장 전체를 바이올린의 음색으로 가득 채웠다. 명징한 바이올린 소리는 오케스트라에 묻히지도, 오케스트라를 거스르지도 않으며 공연장 구석구석으로 전달되는 것 같았다.

브람스가 ‘연약한 아다지오’라고 불렀던 2악장(Adagio)에서는 바이올린 선율이 마치 벨칸도 아리아처럼 섬세하고도 중후하고, 온화하면서도 격정적으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인다.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출 시간도 없이 무대에 섰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힐러리 한의 연주는 완벽에 가까웠다. 2악장이 부드럽게 마무리되면서 바로 이어지는 제3악장(Allegro giocoso, ma non troppo vivace)은 브람스 특유의 ‘헝가리풍 피날레’로 집시풍의 경쾌하고 자극적인 악상이 어우러진다. 힐러리 한의 연주는 활에 불이 붙은 듯 재빠르게 리듬을 이어나갔다. 츠베덴은 여느 때보다 신이 난 듯 어깨를 이리저리 흔들기도 하고 오케스트라 연주자와 힐러리 한을 보며 웃기도 하는 등 여느 때보다 신이 나서 지휘를 했다. 터키 행진곡풍의 코다가 리듬의 유희를 보이며 짜릿한 흥분을 자아내며 연주가 마무리됐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서울시향과 협연을 마친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이 얍판 츠베덴 지휘자와 인사하고 있다 (사진 함혜리)
5월 9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서울시향 정기연주회 (사진 서울시향 제공)

두 번째날 공연이 끝나고 앙코르곡으로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제3번 중 루르(J. S. Bach, Loure from Violin Partita No. 3 in E major, BWV 1006)를 들려주었다. 전날 롯데콘서트홀 연주에서의 앙코르곡은  제2번 중 ‘사라방드’였다고 한다. 단지 기교의 완성만으로는 그 깊이를 표현할 수 없다는 ‘바이올리니스트의 경전’, 바흐의 파르티나로 힐러리 한의 연주력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5월 9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서울시향 정기연주회 (사진 서울시향 제공)

얍 판 츠베덴이 지휘한 브람스교향곡 2번 역시 인상적이었다. 회고적이고 목가적인 1악장에 이어 느린 2악장에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며 우수 어린 분위기를 보여주었다. 3악장은 경쾌하면서도 여유롭고 느긋한 음악이 흐르며, 4악장에서도 활기찬 분위기가 이어지며 밝고 눈부신 기쁨과 환희가 피날레를 이끈다. 나무랄 데 없는 연주였다. 하지만 힐러리 한 연주의 여운이 내내 이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공연이 끝나고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과 반응을 보면 그날 연주가 얼마나 좋았는지 가늠할 수 있다. 공연장을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은 모두 밝았고, 힐러리한의 앙코르 곡 제목을 붙여놓은 포스터 앞에서는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월드클래스 연주자로서 이번에 보여준 힐러리 한의 자세는 두고두고 얘깃거리가 될 것같다. 그리고 갑작스런 프로그램 변경에도 무리없이 연주를 마무리한 서울시향과 츠베덴 감독의 역량도 찬사를 받기에 충분하다.

컬처램프 기사보기 http://www.culturelamp.kr/news/articleView.html?idxno=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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