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큐브 서울과 타데우스 로팍 서울 공동 기획
서울 강남의 도산대로 보행로 한가운데에 녹슨 강철로 된 블록 모양의 조각이 서있다. 어떤 이는 무심코 지나가고, 어떤 이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조각상을 바라본다. 고층빌딩이 가득한 서울 거리로 나와 관계 맺기를 시도하고 있는 조각은 영국 출신 조각가 안토니 곰리(Antony Gormley, b.1950)의 작품 '몸틀기Ⅳ(Swerve Ⅳ, 2024)'이다. 화이트큐브 서울이 위치한 건물로 올라가는 램프 구간에는 웅크리고 있는 조각 작품도 보인다. ‘쉼 ⅩⅢ(Cotch ⅩⅢ, 2024)’은 낮은 벽에 조용히 기대앉아 사색에 잠긴 듯한 자세다. 화이트 큐브 서울 건물 앞, 높은 건물들 사이의 좁은 통로에는 또 다른 작품 ‘움츠림(Retreat:Slump, 2022)’ 바닥에 놓여있다.
“내가 지향하는 예술은 우리를 둘러싼 환경과 각자의 행동, 정신, 영혼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민감하게 감지하도록 일깨워주기 위한 것이다. 이번 전시 ‘불가분적 관계’는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 속에서 신체가 주변 환경과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시각적으로 드러내고 그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상호 연결 속에 놓여있음을 보여준다.”(안토니 곰리)
화이트 큐브 서울(White Cube)과 타데우스 로팍 서울(Thaddaeus Ropac)은 세계적인 영국 조각가 안토니 곰리의 개인전 《불가분적 관계(Inextricable)》를 공동 기획해, 오는 9월 2일부터 서울 각 갤러리 공간에서 선보인다. 《불가분적 관계》는 도시의 공적인 공간과 내밀한 안식처를 파고들어 인간과 도시 간의 복잡하게 얽힌 관계를 탐구한다.
현재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유엔(UN)은 이 수치가 2050년까지 70%에 이를 것이라 예측하고 있을 정도로 도시와 인간은 말 그대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번 전시는 성찰적 사유의 공간이자 도시 건축의 재료와 방식을 담론 하는 실험의 장으로 기능하며, 작가는 자신의 조형 언어를 통해 신체라는 공간과 그것을 둘러싼 환경 사이에 공명하는 긴장감을 창출한다. 작가는 밀집된 인프라와 고층 건물 숲으로 대변되는 서울을 배경으로 삼되, 도시적 조건을 인간의 감각, 사고방식, 신체의 위치까지 구성해 나가는 ‘살아 있는 구조’로 바라본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이번 전시에서 도시와 인간 존재 사이의 관계,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인식과 감각의 문제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번 전시 개막에 맞춰 한국에 온 곰리는 29일 덕수궁 옆에 위치한 영국대사관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나의 조각은 기념비적인 조각처럼 위풍당당함이 없지만 이 세계 속에서 우리의 자리가 어딘지를 질문하면서 자기 성찰을 유도하는 그런 역할을 한다”면서 “거리에 설치된 조각들은 당신을 향해 이 세계 속에서의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생각하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은 식민 시기와 전쟁 등 어려운 시기를 지나 글로벌 산업강국으로 도약한 놀라운 나라”라면서 “즐비한 고층건물과 밀집된 인프라를 지닌 서울이라는 도시의 환경에 대해, 그리고 이 거리 한 복판에서 예술의 위치에 대해 환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화이트 큐브 서울에서는 곰리의 주요 조각 시리즈인 ‘Bunker’, ‘Beamer’, ‘Blockwork’에서
선별된 여섯 점의 작품이 전시된다. ‘Beamer’ 시리즈의 작품 ‘용기 2(Pluck 2, 2024)’는 갤러리 유리 외벽과 내부벽 사이의 좁은 공간에 끼어 있는 듯 서있다. 쇼윈도에 서있는 마네킹처럼 상업적 매대에 진열되는 예술의 현 위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내부 공간에서는 강철막대의 직선구조로 구성된 ‘대전환 Ⅲ (Big Slew, 2024)’와 ‘거대형상 Ⅲ(Big Form Ⅲ, 2024)’이 화이트큐브의 공간을 채우고 있다. 반복과 축적의 조형언어로 구축된 두 작품은 신체의 질량을 건축 언어로 다시 한번 변환함으로써 인간의 움직임과 행동 양식이 어떻게 우리의 행동을 형성하고 제약하며 통제하는지를 묻는다.
독서당로에 위치한 타데우스 로팍에서는 신체를 통해 공간인식을 확장하게 하는 조각 8점과 드로잉을 선보인다.
2층 전시장으로 들어서면 약 8m에 달하는 작품 ‘여기(Here, 2024)’가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 코르텐 강철로 된 작품은 중심부에 있는 인체 형상의 구조물이 팔을 쭉 펴고 “여기는 내 자리!”라고 외치는 것 같다. 또 다른 작품 ‘지금(Now, 2024)’은 바닥 쪽으로 뻗어 벽면을 차지하고 있다. 벽에 기대 누운 듯한 모습은 지쳐서 쉬면서도 존재감을 드러내려 하는 것 같다. 이들 ‘Extended Strapwork’ 시리즈의 작품들은 조각이 신체의 경계를 넘어 그것이 점유하고 있는 공간의 가장자리까지 뻗어 나감으로써, 공간의 직각적 구조가 우리의 감각과 인식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드러낸다.
‘Open Blockworks’ 시리즈의 ‘열린 혼란 (Open Daze,2024)’과 ‘집 (Home.2025)’은 작가의 기존 조각 시리즈인 ‘Blockworks’의 모듈 구조를 바탕으로, 닫힌 덩어리를 열린 세포 구조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 조각들은 공간에 반응하며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유기적이고 투과적인 형태를 띠고 있으며, 관람객의 호기심과 신체적 개입을 유도하는 조형적 개방성을 지닌다.
1층 전시실에는 신체와 공간의 관계를 지도처럼 시각화한 ‘Knotwork’ 시리즈의 작품 ‘머묾(Stay, 2024)‘ 연작 3개가 설치돼 있다. 벽면에 머리를 대고 서 있고, 더 벽면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앉아 있고, 그리고 천장과 벽면에 90도로 꺾여 설치된 작품들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공간을 차지하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연결된 고리들로 인체의 형상을 만든 ‘Knotwork’ 시리즈는 상하수도, 전기회로, 교통망 등 현대사회를 구성하고 지탱하는 연결망을 연상시키는 작품들이다.
안토니 곰리는 신체를 소재로 작품을 하게 된 이유를 묻자 “어린 시절 내 몸이 그다지 튼튼하지 못했는데 그렇게 태어난 것은 그냥 무작위적으로 발생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됐고, 몸을 내가 태어나 들어간 어떤 장소로 인식을 하게 된데서부터 몸과 장소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어 이어져 온 것 같다”고 답했다. 그는 “존재를 어떤 외부나 외관이나 또는 이런 풍경 속에 있는 그런 몸을 그리는 방식으로 표현하기보다는 몸 자체를 중심에 두고 작업을 하고 있다”면서 “장소로서의 몸을 인식하고 있으며 에너지장으로서의 몸, 여러 세포가 연결된 어떤 객체로서의 몸을 계속 탐구하고 있고 이 탐구는 계속될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 곰리의 작품은 원주 뮤지엄 산에서 열리는 개인전 《Drawing on Space》(6월 20일~ 11월 30일)과 안도 타다오의 설계로 지어진 ‘Ground’에서의 상설전에서 만날 수 있다. 곰리는 또 전남 신안군 비금도 원평해변에 38개의 큐브로 된 초대형 작품을 설치하고 있다. ‘휴식 중인 인간의 몸’을 형상화한 것으로 곰리는 “내 일생 최대 규모의 작품이 될지도 모르는 프로젝트”라고 소개했다.
그는 “왜 이 시점에 한국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한국은 예술에 대한 열린 마음과 문화적 욕구를 아시아의 떠오르는 예술 허브이기 때문”이라며 “한국은 식민시기와 전쟁 등 어려운 시기를 지나 눈부신 산업발전을 이룬 놀라운 나라이고, 그 역사와 현재가 내게 많은 영감을 주면서 한국과 정말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했다.
전시는 화이트 큐브에서 10월 18일까지, 타데우스 로팍에서는 11월 8일까지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