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3분 소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솔 Oct 06. 2019

001. 숲 #01

아무것도 가지고 들어가지 말 것

스산한 바람이 또다시 한차례 텁텁한 그의 머리칼을 흩뜨렸다. 절기상으로는 가을의 초입도 한참 지난 9월 초순이었다. 하지만 구멍 난 하늘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태양은 아직은 뜨거웠고, 그 응원에 힘입은 여름의 집념은 대지위에 아직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한껏 달구어진 후덥지근한 바람은 시원다하기 보다는 그로 하여금 꼭대기를 향한 기대감만 더 키우게 할 뿐이었다.

대단찮은 결심으로 등반할 수 있는 야트막한 언덕이었다. 평지를 벗어난지 십여분즈음, 등으로 배어 나온 땀이 형석의 웃옷을 적시려 들기도 전에 그는 언덕길이 시야에서 잦아듦을 알 수 있었다. 이윽고 초원의 언덕 꼭대기와 그것을 향해 달려드는 절벽 아래 바다, 그리고 그 위에서 그를 반기는 서늘한 바닷바람을 느낄 수 있었고, 비로소 형석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여러가지 색깔이 뒤 섞인 미소였다.


그곳은 형석에게 유일한 장소였다. 해안 절벽을 끼고 꽤나 넓은 면적의 숲이 옮겨와 심겨진 가시덤불에 의해 둘러싸인 사유지가 된 지 십 수년. 그린벨트가 풀리던 해 지역주민들의 예상을 뒤엎고 숲은 통나무로 지어진 멋들어진 외관의 관리사무소 한 채만을 새운 채 그대로 생태공원이 되었다.

입장료는 오백 원.

돈을 거슬러주는 일이 없었으므로 방문객들은 사전에 동전을 준비해야만 했다. 방문객들의 건의가 이어지자 사무소 한켠에 동네 오락실에서나 볼 법한 화폐교환기 하나를 들일뿐이었다. 아크릴로 만들어진 커다란 요금함에는 오백 원짜리 동전이 차곡차곡 쌓일 뿐 좀처럼 줄어드는 일이 없었고 마침내 선배들의 텃새로 막내 오백 원이 거부당하는 차례가 오자 관리인은 아무 말 없이 창고에서 새 요금통을 꺼내와 나란히 세워놓았다.


숲에는 두 개의 규칙이 있었다.


아무것도 가지고 들어가지 말 것

해가 완전히 지고 난 이후와 매주 월요일에는 숲에게 휴식을 제공할 것


숲을 보존하기 위한 주인의 의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규칙이었다. 그러나 여유를 쥐어짜 내 지친 일상을 덮기 위해 숲을 찾는 방문객들은 불편할법도 한 이 규칙에 대해 불만이 없었고 이윽고 규칙에 감사하게 되었다. 규칙을 어기면 블랙리스트로 등록되어 더 이상의 방문이 거절되었기에 굳이 규칙을 어길 엄두도 내지 않았다.

숲 내부의 사진이 없으니 인터넷에는 언어적수단에 의존한 묘사만으로 채워진 글들만이 가득했다. 이를 좌시할 수 없었던 파워블로거들과 사진에 눈이 먼 일부 작가들이 몇 차례 숲을 방문한 일이 있었고 그 후 숲으로 통하는 유일한 출입구인 관리사무소 내부 게이트에 공항 검색대에서 사용하는 금속탐지기가 설치된 것은 작은 해프닝에 지나지 않았다.


형석이 이 숲을 처음 오게 된 것은 군 입대 전 여자 친구와 함께였다. 꼭 지금 같은 계절이었다.

그저 조금 색다른 데이트 코스로 온 숲에서 남들의 눈을 피해 키스를 나눌만한 으슥한 곳을 찾아 헤매다 우연히 발견한 개구멍.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인지 짐승들을 위한 주인의 배려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것은 명백히 동물들의 통로였고 몇 차례 드나들며 동물의 흔적도 발견할 수 있었다.

단지 몹시 좁아서 낮은 포복으로 기어야만 드나들 수 있었지만 공원의 휴관일인 월요일 온종일 동안 무단으로 숲을 전세 낼 수 있는 행복에 비하면 팔꿈치와 옷에 묻은 흙을 털어내는 수고는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월요일마다 남몰래 숲을 찾아오는 일은 곧 형석의 일상 중 유일하게 기다려지는 일이 되었다. 그렇게 숲은 형석에게 유일한 장소가 되었고 그는 숲의 귀중한 휴일을 방해하는 유일한 존재가 되었다.

형석이 꾸준히 숲을 찾는 이유는 결코 숲을 사랑해서라거나 자연을 향한 회귀본능 때문이 아니었다. 숲은 철저히 보통의 존재였던 형석이 스스로 특별하다고 느낄 수 있는 세상에서 유일한 공간이었고 무엇으로부터도 억압받지 않을 수 있는 단 하나뿐인 장소였다.


조금의 땀을 대가로 얻을 수 있는 언덕 위의 풍경은 완만하게 굽어 드는 오른쪽 해안절벽 끝자락으로 고개를 내민 자그마한 군락의 모습이 거슬리긴 했지만 그로서는 과분한 호사라고 느낄만한 것이었고, 아무렇게나 자란 잔디 위에 몸을 팽개치고 햇살을 마주하며 눈을 지그시 감은채 맞는 바닷바람은 그에게 마약이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