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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 Oct 11. 2019

002. 에필로그 #1

기다림 자체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사실까지 인정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는 기다리며 책을 읽는 행동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책을 덮었다. 한 줄 읽고 좌우를 둘러보고서 다시 같은 줄을 읽는 일을 무수히 반복하는 것보다는 그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기다림 자체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사실까지 인정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녀는 이 도시에 있지 않을뿐더러, 이 도시에 있다고 해도 일부러 찾지 않는다면 지나갈 일 없는, 그와 이별한 해안가 공원을 찾아올 확률은 무에 수렴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같은 장소 같은 벤치에서 그녀를 기다린 지가 한 달째인 터였다.


모든 것이 고정되어 있는 거대한 시설물과 매 순간 무한히 움직이는 바닷물 사이에서 시간을 표류하는 낯설은 혼돈은 역설적이게도 처음부터 익숙한 그것이었다.

고정되어 있는 관계와 무한히 요동치는 감정 사이에서 표류하던 것이 여태껏 그가 그녀와 해오던 일이었다. 표류하는 시간의 바다에서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닻은 손에 들린 책뿐이었기에 그는 재간 없이 무의식적으로 다시 책을 펼치고 방금까지 읽던 페이지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갔다. 


한 달째 읽어 내려가던 책은 30페이지도 넘기지 못한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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