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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밍 May 29. 2022

#1 겪지 않은 과거를 그리워하는 마음

겪지 않은 과거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어디서 오는 걸까?

오후 늦게 약속이 있어 모처럼 여유로운 토요일 아침이다. 평소 자주 듣는 올드 팝송들을 담은 플레이리스트를 정리하던 중, 문득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뜨거운 물을 갓 부어 김이 나던 녹차를 다 식게 만들었다.


Starship의 <Nothing's Gonna Stop Us Now>, 1987


가령, 80년대를 대표하는 미국의 록밴드 Starship의 <We Built This City>, <Nothing's Gonna Stop Us Now>는 각각 1985년과 1987년에 발매되어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히트곡이다.


그러니까, 90초반에 태어난 나는 당시  노래들이 히트한 당시를 생생하게 추억할 방도가 전혀 없다. 본인의 출생 전에 만들어진 콘텐츠들을 현재에 이르러 소비하거나 상상할 수는 있지만 전생을 겪은(또는 겪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결코 '직접 살아 보지 못한 과거' 떠올리며 회상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나는 Starship과 Chicago, Billy Joel의 곡들을 즐겨 듣는다. 매일같이 즐겨 듣는 플레이리스트에는 수많은 올드 팝송들이 몇 년째 항시 자리하고 있다. 90년대 출생인인 나는 70, 80년대에 발매된 노래를 들으며 경험하지 못한 시대를 상상하고, 공감하고, 감동하고 기쁨을 느낀다.


타케우치 마리야의 <Plastic Love>, 1984


또 다른 예로는 시티팝*의 유행. 근년에 한국에서 젊은 층 위주로 시티팝의 인기가 식을 줄 모르는 현상을 고려했을 때 동시대의 것이 아닌 음악 취향을 갖고 있는 90년대생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시티팝: 197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일본에서 유행했던 대중음악의 한 장르)


우리는 비단 음악뿐 아니라 고미술품, 고전 문학/영화 등 모든 과거의 문화에서 시대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가치를 발견한다. 이렇듯 살아보지 못한 시대의 부산물에서 매력을 느끼고 지속적으로 찾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콘텐츠 자체의 완성도나 개인 취향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최근 머릿속에 떠올렸던 단편적인 생각은 다음과 같다. 빛에는 그림자가 따른다. 그림자가 없다면 빛도 없다. 바야흐로 대풍요의 시대지만 사람들은 만족을 모르고 범죄와 사건, 사고는 끊일 줄을 모른다. 온전한 평화가 도래한 적은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고(인류가 멸종되지 않는 이상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1970년대는 경제 발전에 접어든 시기임과 동시에 냉전 체제의 지속과 오일 쇼크, 인플레가 겹쳐 전반적으로 폭풍 전야의 시기였다. 1980년대에 들어 전 세계는 경제 호황기를 맞았지만 그만큼 빈부격차가 커지고 518 민주화운동과 천안문 항쟁 등 국내외적 제노사이드(대량 학살)가 다수 발생했던 격동의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과거의 심각하고 복잡다난한 역사적 사건들과 시대상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떻게든 흘러 지나갔기에 21세기인 현재에 와서 당면할 필요가 없다.


아마도 우리가 겪지 않은 시대의 창작물을 지속적으로 찾는 이유는 '과거에 직면한 난제를 해결하거나 버티며 살아가야 하는 의무감'은 대폭 줄어든 상태임과 동시에 '당시 가장 가치 있는 것들'이 함축된 감성을 마음 편히 즐기며 미래의 행복을 꿈꿀 수 있어서가 아닐까?




Billy Joel의 <I've Loved These Days>, 1976


먼 옛날의 '과거'는 '먼 미래'와 같은 선상에 놓여 있다. 겨우 백 년 남짓 살아가는 인류에게 백 년도 훨씬 전의 시대를 경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이미 죽고 난 백 년 뒤의 먼 미래도 절대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든 미래든 당장 손에 잡히지 않는 형체 없는 유령처럼 보인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려 온갖 재앙과 불행이 빠져나와 세상을 뒤덮은 후로는 고통만이 가득해 보인다.


하지만 인류에게 '희망'이 남아 있는 한, 우리는 옛 것을 통해 과거의 사람들과 가치를 공유한다. 그것을 바탕으로 인류가 더 행복할 미래를 투영한다.


이미 지나간 옛 시간들과 언제일지 모르는 다가올 미래를 미리 추억하며 조금 홀가분한 마음으로 투명하게 식어버린 녹차를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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