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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은 Oct 24. 2023

마녀는 왜 화가 났을까

<잠자는 숲 속의 공주>의 마녀가 화가 난  이유

어렸을 적에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읽으면서 공주와 그녀의 세계를 깊은 잠에 빠지게 한 마녀를 이해

하기 힘들었다.


공주의 탄생 축하 파티가 뭐라고. 걔가 뭐라고. 자기 혼자 초대받지 못했다고 물렛가락의 저주를 내리는 그녀를 보며 어린 나는 이게 이렇게까지 화낼 일인가 싶었다. 마녀라면, 할 줄 아는 것도 많을 텐데 혼자 좀 놀 수도 있지 않나 싶기도 하고 동화 속에 마녀의 나이가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어른의 범주에 들어가는 나이대인데 그게 뭐 대수냐 싶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내가 비슷한 일을 겪어보니, 흐음, 마녀가 화낼 만했네.




unsplash


나는 시나리오 작가가 되겠다고 29살에 서울에 올라온 이후, 꾸준히 일을 했다. 시나리오 작업만 하고 싶었지만 그게 당장의 밥벌이가 되지 않으니 어디든 회사에 들어가서 월급 받는 생활을 했었다. 퇴근한 후에 글을 쓰거나 주말에 글을 쓰느라 내가 느끼기엔 거의 쉬는 텀 없이 일을 하는 기분이었다. 다만 일을 하면서도, 꿈을 이루고 싶다는 욕심이 접어지지 않다 보니, 짧으면 2년 길면 3년 반 정도 일을 하다가 몇 달 정도 버틸 만한 돈이 모이면 퇴사를 하고 글을 쓰고, 그 결과가 좋지 않으면 다시 취업을 해서 회사에 들어가는 생활이 반복되었다.


나에게는 시나리오 작가가 되는 것이 너무나 중요했으므로 부모님이 원하는 '20, 30대 여성이 수행해야 하는 역할(그리고 그에 뒤따라오는 결혼, 임신, 출산)들을 들어드릴 여유가 없었다. 사실 돈도 없고. 남자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고.


부모님은 어떻게든 나를 결혼시키시고 싶으셨는지 서른 즈음부터 서른두 살 때까지 시답잖은 남자들의 프로필을 몇 번 내게 보내주곤 했는데, 얼마나 어이없는 조건의 남자의 프로필을 보내주셨는지 여기서 굳이 묘사는 하지 않으려 한다. 그 당사자에게는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자기 자신'일 수도 있으니까.


어쨌든 엄마, 아빠의 생각에는 ‘아직 결혼을 못 한 과년한 딸’이 그 정도 남자라도 얼씨구나 하고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는지 '그 남자가 어디가 어때서 그러느냐'며 일단 부산 내려와서 한번 만나나 보라고 했지만 요새 세상에 마음에도 없는 사람을 만나거나 알아가려고 하는 그럴 한가한 사람이 어디 있는가. 직장일과 글 쓰는 일만으로도 몸이 남아나지 않는 기분이었는데.




여하튼 그런 식으로 나는 33살이 되었다. 서울 - 부산 은 명절에 내려가는 KTX를 구하기가 매우 어렵고 고속버스를 이용하면 7시간 가까이 걸린다. 언제부턴가 나는 명절을 쇠러 간다기보다 명절 전 주, 혹은 명절이 끝난 직후에 부모님을 잠시 뵙기 위해 고향에 내려가곤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아버지가 작은 아버지의 큰아들이 얼마 전 결혼해서 이제 작은 아버지 식구들은 명절에 오지 않을 거라고 했다. 아, 걔 결혼했구나.


그런데 기분이 이상했다. 친하진 않았지만 나에겐 첫 번째 사촌동생이었다. 내가 서울에 거주하고 있고, 작은 아버지 가족들도 서울에 있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높은 확률로 결혼식도 서울에서 했을 것 같은데 왜 난 안 불렀지? 보통 아주 먼 친척이 아닌 이상 이 정도 경조사에 초대는 하지 않나?


-결혼식 서울 말고 다른 지역에서 했어? 알았으면 나도 가서 축의라도 할걸. 오랜만에 친척들도 보고.

-서울에서 했어, 서울에서.


아빠가 뭔가 빨리 대화를 마무리지으려는 듯 서울에서 했다고 대답해 주셨다. 나는 이상했다. 서울이면 갈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왜 아빠는 그 이야기를 안 한 거지? 아빠도 그 결혼식에 안 가셨나. 아빠는 종종 형제인 작은 아버지나 삼촌과 다투곤 했으니까.


-근데 왜 나한테는 안 알려줬어? 결혼식 가든, 안 가든 축의금이라도 보냈으면 좋았을 텐데. 좀 섭섭하네.


아빠는 말끝을 흐리며 내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으시더니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나는 그게 찜찜해서 내가 추측하는 이유를 꺼내며 집요하게 물었다.


-아니, 아빠. 왜 안 알려줬냐니까? 아빠도 안 갔어? 작은 아버지랑 다퉜어?


아빠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니, 뭐... 너 시집도 못 가고, 다니는 회사도 변변찮잖아. 거기 오는 사람들 다 대단한 사람들일 건데 너 부끄럽고 민망할까 봐 연락 안 했지. 네가 하도 일을 했다 안 했다 하니까 혹시 지금 백수인데 오라고 하면 상처받을 것 같기도 하고... 돈도 없을 거 같기도 하고… 나는 갔지. 근데 너는 안 오는 게 낫겠다 싶어서… 그래서 안 했어.




아. 대기업 다니는 사촌동생 결혼식에 결혼도 못 한 시답잖은 사촌누나인 내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라서 얘기를 안 하셨구나.


아빠는 내가 밥 먹듯 일을 그만두는 사람인 것처럼 말했지만(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나는 이렇게 험난한 현대 사회에서 빚 없이(마이너스 통장은 있지만), 누구한테 아쉬운 소리 안 하고(아주 가끔 했을 수도 있지만), 명절이며 부모님 생신마다 꼬박꼬박 용돈 보내드리는 내가 부끄러운 적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사는지 몰라서, 내가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일을 하는 근속연수가 상대적으로 진짜 짧은 사람인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내 쓸 생활비는 항상 내가 알아서 벌었다. 한 번도 부모님한테 용돈 보내달라고 한 적도 없었고, 힘들 때조차 힘든 소리 한 적도 없었다.


그래서 한편으론 이 힘든 와중에 꼬박꼬박 그런 걸 챙기는 내가 뿌듯했는데, 아빠는 든든한 직장에서 꾸준히 오래 다닐 생각을 하지 않고 2-3년 정도 일을 하다가 그 돈으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도전하는 내가, 그리고 그러느라 결혼도 안 하는 내가, 부끄러워서 남들 앞에 보이기도 싫었던 거다.


나는 이런 내가 좋은데.


모르겠다. 교과서나 방송에서는 부모의 사랑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고 하는 말을 들으며 자랐지만 내가 살면서 체감하고 느끼는 부모님의 사랑이,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큰 것 같지가 않다. 솔직히 내가 생각하기엔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부모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훨씬 더 컸다.




난 1997년 IMF 때 실업해서 집에서 놀고 있는 아빠가 부끄럽지 않았다. 맨날 컴퓨터로 네오스톤 바둑만 하고 계셨어도 창피하지 않았다. 집에 돈이 없어서 엄마가 보험 일을 하고, 이런저런 식당일을 하고, 학교에서 급식비 지원받고 싶은 사람 있으면 교무실로 오라고 하면 달려가서 필요한 지원 서류 목록 받아다가 제출할 때도 아버지의 실업 상태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빠가 집에 있으니 좋다고 생각했다. 왜 좋았는지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좋았다.


부모님이 나를 키우기 위해 고생하신 것은 맞을 것이다. 우리가 일을 사랑하든 안 하든, 일단 무엇을 하게 되면 힘들고, 고단하고, 뜻대로 되지 않고, 생각했던 시간보다 일해야 하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처럼.


그렇다고 그게 꼭 사랑일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진짜 잘 모르겠다.




네가 백수라서 부끄러울 까봐 연락을 안 했다는 아빠의 말은 충격이었다. 사실 그때 일을 하고 있을 때라 돈을 아예 못 버는 것도 아니었다. 남들 하는 만큼 축의 할 수 있었고, 남들 하객룩 입는 만큼 입고 갈 수 있었다.


물론 축의 하는 금액이나 입고 오는 옷의 레벨 차이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내가 감당할 일이고, 혹시나 그걸로 뒤에서 축의가 너무 적더라, 옷이 명품이 아니더라 말이 나온다고 해도, 아버지로서 그 정도 보호막이나 설명 정도는 해주실 수 있는 정도의 상황 아닌가? 내가 속이 좁은 건가?


혹시나 빨리 그만둘지 몰라 일을 하는지 안 하는지 말씀드리지는 않았지만, 그게 이렇게까지 부끄러울 일인가?


솔직히 백수라는 상황이 부끄러워야 하는 상황이라면, 1997년의 아빠도 부끄러워해야 했지만, 그때 아빠도 지금의 나처럼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나갈 약속 있으면 설레어하며 양복 갖춰 입고 넥타이 고르면서 온갖 결혼식, 장례식, 술자리 다 다니셨던 걸 나는 아주 잘 알고 있다.


나도 그런 아빠를 닮아서, 혹은 그런 모습을 보고 커서 그런지 백수 상태가 부끄럽지 않은데.


30대 후반인 지금 바라보면 33살이 그리 많은 나이가 아니다.


하지만 그때 아빠가 그렇게 말하니 결혼 못한 33살이 굉장히 많은 나이인가 싶고,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하느라 간헐적 백수가 되는 내가 한심한가 싶어서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떤 상태의 아빠든 한 번도 부끄럽지가 않았는데, 아빠는 아빠가 생각한 기준에 못 미치는 딸은 부끄러우시구나. 어디에 내놓기가 창피한 거구나.


나는 왜 이렇게 집요해서 가족 내에서 내 위치를, 아니 아빠의 빈약한 사랑을 확인하고야 마는 걸까.



이제는 그런 일을 겪을 일도 없지만, 만약 겪는다면 눈앞에 밥상 있으면 한 번 엎었을 것 같다(밥상 안 쓰고 테이블이라 못 엎지만).


가족과 거리 두기를 한 지금, 아무 관심도 아무 생각도 안 들지만 어린 시절 마녀가 왜 그렇게 짜증이 나서 저주를 걸었는지는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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