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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은 Jan 06. 2024

나는 결코 아버지가 없었다.

집을 떠난 진짜 이유

나는 10년 전 준비도 없이, 돈도 없이 도망치듯 부산에서 서울로 독립했다.


엄마에겐 나는 글이 쓰고 싶다고, 더 늦기 전에 시나리오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캐리어 하나 들고 집을 나왔다.


그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내가 도망치듯 집에서 나온 가장 큰 이유는 스토킹 때문이었다. 나는 그때 구남친으로부터 스토킹을 당하고 있었다. 직장과 집을 모두 알고 있고, 출퇴근 시간까지 알고 있는 그는 연락도 약속도 없이 찾아와, 2시간 기다렸다, 3시간 기다렸다 하며 얘기 좀 하자고 했다.


헤어진 것도 헤어진 거지만, 퇴근했으니 얼른 집에 들어가 쉴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그에게 약속을 하고 와야지 이렇게 다짜고짜 찾아오면 어떡하느냐고 하자 네가 무슨 대기업 회장이냐고, 무슨 약속씩이나 하고 와랴 되느냐며 짜증을 내며 대화 좀 하자고 했다.


인내심을 발휘해가며 이별을 납득시키기 위한 대화-우리의 너무 다른 가치관과 삶의 우선수위의 다름-를 정마루긴 시간 하고 나서 그를 집에 보내고 나서 이제는 정말 끝이겠지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틀렸다.


그는 자신의 사고회로를 돌리다가 갑자기 나랑 헤어지기 아깝다는 쪽으로 생각이 틀면 또 다시 연락을 해서 니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자기 말을 들으라고, 계속 자신의 가치관을 따르는 게 진정한 행복이라며 윽박질렀다. 그런 식으로 그가 나에게 접근하는 주기는 하루였다가 이틀이었다가 일주일이었다가 다시 하루, 그러다 사나흘 이런 식으로 제멋대로였고 연락만 하는 날도 있다가 위의 상황처럼 갑자기 찾아오는 식으로 종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가 연락이 오는 것도, 갑자기 찾아오는 것도 너무나 스트레스였고 솔직히 어느 정도 공포감도 느꼈다. 어쨌거나 그가 나보다 물리적으로 힘이 셀 것이므로.


그렇게 몇 달을 시달렸다. 그때 든 생각은 그를 완벽하게 단념시킬 수 있는 방법은, 결국 만날 방법이 없게 하는 것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내막을 부모님에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걱정시킬까봐서가 아니라 이야기해봤자 부모님의 공감과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남자친구와 헤어진 일이나 헤어지고 그가 나를 찾아와 괴롭힌다고 말하면 부모님은 그에게서 나를 보호해줄 조치를 취하는 대신 오히려 알지도 못하는 그의 편을 들며 나의 까칠함과 예민을 문제삼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은 언제나 그랬다.


내가 도움을 요청하면 그냥 참아라, 버텨라, 네가 알아서 해야지, 라고 하는 분들이었다.


그전까지는 어떻게든 참고, 버티고, 알아서 했었지만 이번만큼은 정말 참고 버티고 알아서 했다가는 위험한 상황이 올 것 같았다. 10년 전은 지금처럼 데이트폭력이 가시화된 상황은 아니었지만, 개개인이 겪는 데이트폭력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걸 느꼈다.




나는 도움도 얻지 못할 일에 누군가의 도움을 구걸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부모님이라 해도. 내가 도움을 요청하면 부모님은 그 남자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며 옳고 그름을 따지려고 할 것이었고, 거기서 내가 잘못이 없고 그가 잘못이 있음을 명명백백하게 가려내어 부모님에게 그와 이별할 수밖에 없음을 증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 친구한테 중요한 것이 나한테는 우선순위가 아니었고, 나한테 중요한 가치가 그 남자에겐 무의미한 것이어서 나와 그는 끊임없이 다투곤 했다. 그걸 부모님께 설명하면 나의 부모님은 그냥 니가 좀 져주면 안 되냐고, 그 남자가 그렇게 죽을 죄를 진 거냐고, 꼭 그렇게 니가 하고 싶은 걸 해야겠냐고 나를 다그칠 것이었고, 그 워딩은 그 남자가 하던 워딩과 똑같은 것이었다. 남들 다 하는 결혼 하고 싶은 게 잘못이냐고. 나에게는 결혼보다 중요한 프로젝트가 있었고 그걸 잘 해내고 싶었지만 그가 보기엔 크게 중요해보이진 않은 일이었다. 


전남친이 하던 이야기를 부모님에게 다시 들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진이 빠지고 에너지를 뺏기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둘 중 한 사람이 연애 관계를 그만두고 싶다는 데 그걸 누군가에게 옳고 그름의 영역으로 가지고 와 재판을 받고 싶지도 않았다. 부모님은 높은 확률로 니가 하고 싶은 것 좀 하려고 하지 말라며 이기심 좀 버리라고 할 게 뻔했다. 내가 당신들을 위해 내 욕구를 얼마나 숱하게 꺾어왔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다고 이제 와서 내가 부모님을 위해 하고 싶지만 하지 않았던 것들을 일일히 열거하고 싶지도 않았다. 뒤끝 있는 애처럼 보일 것 같아서였다. 물론 실제로 나는 좀 뒤끝이 있는 편이기도 하지만 뒤끝이 있을 만하니까 있는 것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나는 부모님과 언쟁하고 싶지 않았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묻어둔 뒤끝이 나올 것 같아 두렵기도했고 부모님이 내편이 아니라는 생각과 그에 대한 새로운 증거들을 축적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부모님을 걱정 안 시키기 위해 그의 무차별적인 스토킹을 참고 버티며 언젠간 해결되겠지 하며 뭉개면서 착하고 불행한 딸 노릇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서울에 올라오고 나서도 그의 스토킹은 잠시 있었지만, 내가 더 이상 부산으로 갈 가능성이 사라지자 그의 연락도 없어졌다. 서울에서 자리를 잡고 구남친의 스토킹도 술자리의 안주가 된 어느 날, 친구들과 술을 마시던 중 내 독립 비하인드 스토리를 듣던 친구가 물었다.


"야, 근데 아버지한테 말해볼 생각은 안해봤어? 혹시 아버지 안 계셔?"


생각해보니 그러네. 아버지가 있는데 왜 아빠한테 그를 떼낼 수 있게 도움 요청할 생각을 못 했지? 엄마와 아빠 동시면 몰라고 아빠에게만 얘기했다면 들어주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얼마 후 본가에 내려가 가족들과 밥을 먹고 휴식을 취하다가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만약 남자친구가 나랑 헤어지고 나서 헤어지기 싫다고 쫓아다니고 괴롭히면 아빠가 나 보호해줄 거야? 그렇게 해 줄 거야?"


그러자 아빠가 웃으며 말했다.


"아이고, 딸아. 내가 너를 아는데 니가 누구 도움 필요한 애가 아니다. 내가 니를 왜 지켜주니. 니가 얼마나 독립적이고 강한 앤데. 니가 알아서 잘 할 긴데 내가 뭐하러."


아무리 아빠가 나에게 있었던 일을 모른다고 해도 웃으면서 할 얘기는 아니었다. 최근처럼 데이트폭력이 뉴스에 일주일이 멀다 하고 나오는 시기는 아니었지만 당시에도 데이트폭력의 문제는 뉴스에 종종 나오곤 했고, 오히려 지금 막 데이트폭력이 문제가 되며 한번 뉴스가 나올 때마다 크게 나오던 시기라, 나는 나의 도망이 섣부른 판단이 아니었음을 실감하며 매일을 보내고 있던 참이었다. 아빠가 그렇게 뉴스를 매일 보는데 데이트폭력 뉴스만 쏙 빼고 보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이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이 정도로 안 가질 수가 있지?


내가 너무 예시를 약하게 들었나?


"그럼 만약에 내가 결혼했는데 부부싸움 하다가 남편이 홧김에 나를 때렸어. 그럼 그땐 어떻게 할 거야? 아빠가 찾아와서 나 대신 걔 패줄 거야? 패줄 거지? 뭐라고 한 소리 하고 '내 딸이랑 헤어지게.' 할 거지?"


아빠는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아이고 딸아 딸아 내 딸아, 니가 누구한테 맞고만 있을 애가 아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앞날을 걱정하는데 알아서 예방책도 만들겠구만. 걱정하지 마라."


"아니, 물리적으로 남자 쪽이 힘이 세잖아. 그러니까 만약에, 만약에 맞으면 아빠는 어떻게 할 거냐고. 아니 어떻게 해 줄거냐고."


"아빠한테 왜 뭘 해달라 하노. 아빠는 절대 나서지 않을 기야, 왜? 아빠는 니를 믿으니까. 니는 어떤 상황에서든 잘~ 알아서 할 거니께는."


아. 그래서 내가 아빠한테 말 안했던 거구나. 무의식적으로도 아빠가 아무 도움도 안 줄 거라는 걸 느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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