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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i훈 Jul 17. 2020

일기에 대한 일기

노트북 일기를 되감다 5월7일자 일기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오늘의 일기를 썼다. 아래 일기 내용.


20.5.7(목)  


제목 : 함부로 쓰지 말아야 할 군집명사


어떤 집단을 명확한 개념어로 규정하면 가시성을 높일 수는 있지만사회적 거리를 더 멀게 할 우려도 있다.”

 <홍세화 칼럼>  


오늘 앎의 짜릿함은 여기에서 왔다.      


맞다. 국민, 노동자, 노숙인, 여성, 청년 등 자주 쓰는 용어들은 보통 군집명사였다. 국가 혹은 유무형의 권력집단을 향해 이들에 대한 관심과 도움을 촉구하는 데 있어 군집명사만큼 편한 단어가 없었다. 그래서 썼다. 국민은 국민이고 노동자는 노동자고 여성은 여성이니까. 어쨌거나 내 글을 읽는 사람에게도 비슷한 유의 형태로 의미가 전달될 것이라는 데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이런 군집명사를 남발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겪고 있는 어떤 폭력과 다르지 않다는 것에, 찌릿한 악취를 맡은 것처럼 반응했다. 김훈 작가가 <한겨레>에 기고한 글을 보면, 어떤 한 개인을 군집명사로 포획하는 것과 개인을 개별적 완전체로 바라보는 것 사이에 스며든 시선의 섬세함이 말의 유의미함을 가른다는 걸 절감할 수 있다.      


홍세화씨의 말대로 어떤 집단을 군집명사나 개념어로 부르면 독자에겐 읽히기 쉬울 수 있지만, 그만큼 사회적 거리는 멀어진다. 가뜩이나 이천 물류창고 화재사고로 수많은 삶이 세상을 떠난 지금에도, ‘노동자’라는 말은 신문에 있지만 없는 단어가 됐다. 노동자 몇 명이 죽었다는 문장은 너무나 쉽게 읽히는 문장이다. 그래서 뇌엔 남아도 가슴엔 남지 않는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 확진자 수의 증감을 나타내는 숫자와는 다르게 각인된다. 노동자는 노동자라서 죽고 비정규직은 비정규직이라서 죽는다고 각인되는 세상에서 그들을 위한 관심을 촉구하는 것도 이상할 노릇인 것처럼 보인다.      


군집명사. 그것은 한 개인의 정체성, 그것에 대한 존중인 인간의 존엄을 담아내지 못한다. 어쩌면 어느 한 개인이 겪고 있는 고통을 상세히 설명, 공감해내려는 노력을 포기하게 만들 수 있는 단어다. 주의해야 한다.        



20.7.17(금)

     

나는 일기를 성찰과 반성, 다짐과 선언을 위해 쓰는데, 문득 이 일기를 보니 허황된 약속에 불과했음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늦더라도 진정성을 담은 말을 만들려는 자세로 읽고, 쓰고, 말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실은 무책임한 구호만 내뱉었던 것 같다.      


늘 화가 앞섰다. 약자들이 겪는 아픔을 이권 다툼으로 이용하려는 행태가 눈에 먼저 밟혔다. 감수성이라곤 전무했던 자들이 어느새 인권활동가처럼 행세하는 모습이 보기 싫었던 것이다. 그래서 피해의 아픔을 가늠해보기보다 이를 사사로운 기회로 삼는 사회에 통탄하기 바빴다. 일견 비슷한 맥락처럼 보이지만, 위의 일기가 뼈를 때린다.      


섬세해지려는 자세가 없었던 건 나도 매한가지였다. 성추행 관련 기사에서 접한 피해자는 내게 ‘여성’으로 치환되어버린 일종의 정치적 주체였다. 감히 가늠해볼 수 없을 정도로 쓰라렸을 아픔을 정치의 언어로 가공했고 재탄생시켰다. 피해자 ‘개인’보다 사회 맥락 속의 ‘여성’을 우선 응시했다. 전자는 아플 것인데, 후자는 분노를 동반한다. 분노야말로 변화를 추동하는 힘이라고 해도, 아픔을 경시해선 올바른 길로 나아가기 어렵다. 화만 가득한 구호는 ‘변혁’이 아니라 ‘반정치’로 인도하기도 쉽다. 헷갈리기 시작했다. 나 또한 정치적 신념을 내세우기 위한 도구로 쓰고 있는 건 아닌지.      


더 치명적인 것은, 구호만 외치다 보면 어느새 나는 내가 손가락질하고 있는 저들과 멀리 서 있는 듯한 환상이 들 때가 있다. 장 자크 루소의 통찰처럼 상대보다 우위에 있음을 지속적으로 확인함으로써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인간의 본성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부단히 성찰하려는 노력의 여지를 좁히고, 언제 다시 구조적 폭력의 가해자로 편입될지 모르는 데서 오는 긴장을 놓치게 한다. 당연하듯 차별을 일삼는 세상에서 나는 아직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데도 벗어나 있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특히 요즘 들어 도덕적 허영심만 그득한 건 아닌지 공허함이 잦았는데, 영향이 없진 않을 것이다.      


‘단어 하나도 논증’하려 했던 리영희 선생의 섬세함에 글쓰기의 책임을 통감했던 때가 얼마 전이었다. 그런데 인권에 논증이 왜 필요하냐며 감정만 앞서 내세웠던 것도 비슷한 때였다. 아직도 닦아야 할 부분이 너무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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