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에 대한 글을 써보겠다는 해묵은 다짐을 이제야 꺼내든다. 스스로 약속을 어겼다는 데 관대해지고 싶지도, 면죄부를 주고 싶지도 않다. 게을렀든, 용기가 부족했든 채찍을 들고 싶다. 아니 그간 채찍을 들긴 들었다. 글을 쓰려 마음먹고 엉덩이를 붙이길 반복했다. 그저 두 손이 자판 위로 올라가질 못했을 뿐이다.
최근 들어서야 반드시 글을 써야겠다는 욕구가 치솟기 시작했다. 트랜스젠더 여성들이 자신의 삶을 자기 마음대로 그려나가지 못하는, 아니 그리지 못하게 하는 사회를 보면서다. 스튜어트 밀은 <여성의 예속>에서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자유를 부여할 것을 주장하면서 이런 말을 덧붙였다.
“입증의 부담은 자유에 반대하는 사람들, 제한이나 금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있다”
역설적이게도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당사자가 그 자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저간의 소식들에 분노했고, 이에 변변한 말 한마디 못하는 정치권의 모습에 울분이 솟구쳤다. 물론 이러한 정치권의 무능함(무관심이 아니다. 무지다.)은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큰 기대도 안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는 예견된 사고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작년 말미에 MBC <국민과의 대화>에서 성 소수자, 이주노동자들의 설움을 경청하면서도 ‘아직은 이르다.’고 말했다. 페미니스트 대통령, 당을 자처한 이들이 때가 이르다며 눈을 감아버리는 ‘치유의 기술’은 무책임하다 못해 괴랄하다. 상처는 믿었던 사람에게 입을수록 더욱 고통스럽다. 페미니스트 입간판은 이제 치워야 한다. <국민과의 대화>는 국민들의 고통의 배설 창구의 역할을 했지만, 덕분에 성 소수자, 이주노동자들은 그 국민의 범주에서 제외됐다.
자고로 대통령이란 의제를 선점하고 쥐고 흔들 수 있는 자리에 서 있는 존재다. 집권 여당은 그 의제를 공론화해 버무리고,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내는 집단이다. 적어도 대통령의 힘이 막강하고, 여당은 그 권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대한민국 정치체제에선 그렇다. 물론, 코로나19의 여파로 국민의 관심사가 한곳으로 기운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문제를 제기하는 연유는 ‘어차피’ 의제화하지 않을 정치권, 의제화되지 않을 의제인 탓이다.
감히 말하고 싶다. 그들은 모른다. 유무형의 특권적 차별을 철폐하라는 결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고 노회찬 의원은 생전에 문재인 대통령에게 <82년생 김지영> 책을 선물했다. 교섭단체조차 자력으로 꾸릴 수 없는 소수야당의 수장으로서, 그를 믿고 지지해주는 소수 국민들의 목소리를 의제화 해달라는 요구였을 것이다. 얼마나 바뀌었는가. 집권 초기엔 여성 장관 수의 비율을 높이는 등의 구색을 맞추려는 노력들이 봄을 예고하는 파란 싹의 틔움처럼 보였다. 지금은? 생기를 잃은 채 여전히 싹으로 남아 있다. 실속은 없고 구색만 맞추는 탓에, 젠더 담론은 생산성 없이 소비되고 있고 이제는 그 구색마저 포기한 것 같다. 진정 그들은 알까?
알았다면, 공식 석상에서 ‘장애인’, ‘병신’같은 특권적 언사들이 난무하지 않았을 것이고, 어떠한 실수보다 이에 대해 구조적 위계가 낳은 폐해를 꼬집으며 진심어린 사과를 했을 것이다. 그렇게 했는가? 사태는 의원 개개인의 문제로 환원됐고, 사과에는 특권적 늬앙스를 지울 수 없었다. 또 진정으로 알았다면, 사회 울타리 밖으로 밀려나는 트랜스젠더 여성들을 보며 함께 분노했을 것이다. 소수자는 공존의 주체로서 연대의 대상으로 손잡아야 한다는 게 페미니즘 아니던가?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가치에 대해 되묻는 논쟁마저 다중의 이익에 편승하려는 안이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누구 한명이라도 나서서 공론장에 상정시키려는 시도조차 전무했다. 모르기 때문이다.
미디어를 통해 뇌리에 스친 비상식적 행태들이 결국 자판에 손을 올리게 했다. 나 또한 유무형의 특권을 향유해온 집단의 구성원이었기에, 경험하지 않고선 알 수 없는 것들이 많기에, 쓰기를 주저해왔다. 아니 피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의 글을 추동했던 이 분노가 넌지시 말을 건네준 것 같다. 모른다고 모른 척 해선 안 된다고. 모르기 때문에 알아야 하고, 알기 때문에 움직여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