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으로 됩니까?”
올해 초 2월 즈음으로 기억한다. 내가 속해 있었던 스터디 그룹에 사회 내 존재하는 ‘차별’에 감각적인 시선을 가진 스터디원이 있었다. 사회적 약자라고 불리는 이들에게 우리가 생각하는 그 ‘배려’조차 차별이 될 수 있다는 걸 알려준 친구다. 도무지 내 상식선에선 이해되지 않는 그의 시선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알고 싶었고,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물었다. 학습으로 가능한 것인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요”라고 했던 그의 표정을.
이후 그가 내게 추천해준 정희진 작가의 <낯선 시선>은 내가 여성학을 공부하는 데 단초 역할을 했다. 그 친구와의 만남이, 그가 추천해준 그 책이 내 인생의 판도를 뒤집어 놓았다는 스스로의 인식은 전혀 과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젠더갈등의 준거로서만 역할을 할 줄 알았던 여성학은 사회 강자들이 그려놓은 세상에서 '타자'로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학문이었다. 학벌, 외모, 성별, 지역, 성적 취향 등 수많은 기준으로 서열화되는 한국 사회는 ‘누구나’ 타자가 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여성학을 공부한다고 손해 볼 일이 없다. 실리적으로 말하자면, 나 자신의 권리를 지키는 일이다.
사실 그간 페미니즘 도서를 읽고, 페미니스트 작가들의 강연을 듣고, 넷 상에서 이뤄지는 젠더갈등의 양상을 보며 사유해왔지만 직접 말하고 쓰는 건 주저해왔다. 가부장제 중심의 사회교육에 의해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던 내 안의 차별과 고정관념들이 일종의 폭력으로 기능해왔다는 데서 오는 죄의식, 그 폭력에 의해 주변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고통을 감히 내가 가늠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공감능력의 한계, 그리고 이들과 함께 맞서 싸워야 하는 대상들이 내 눈앞에만 해도 수두룩하다는 데서 오는 공포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저함 앞에서 과연 나는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누군가를 짓이기고 얻어낸 모순적 특권 위에 서서 그것을 향유해봐야 피해는 고스란히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앞에서 서술한 사회적 인정 잣대들이 나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것이고, 누군가는 누군가에 의해 타자가 되어 부당한 대우를 면치 못하는 상황이 반복될 것이다. 최악은, 그 부당함이 부당하다고 생각조차 들지 않는 그런 사회에서 자기 자신을 깎아내리며 훼손해야 하는 그런 전말이다. 그 시나리오는 불행하게도 지금 현실에서 상영되고 있다. 나를 비롯해 모두의 인생에서 그런 일말의 기운들이 휘돌고 있을 것이다. 왜? 우리는 그런 사회에서 살고 있으니까.
페미니즘에 관련한 글을 ‘연재’해보고 싶었다. 페미니즘이 말하는 세계관을 습득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사회 전반을 보면 후자에 조금 더 힘이 실린다. 확실한 건, 젠더갈등의 양상만 늘어놓고 누구의 잘못인지 규명하는 데 매몰되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대부분의 언론이 여성주의, 페미니즘 이슈가 사회를 흔들고 있는 데에 조응하며 관심을 가지고 보도하고 있지만, 제대로 파헤치고 뒤쫓는 언론은 찾아보기 어렵다. 단순히 집회를 취재하고 칼럼을 연재하는 식이 아니라 구조적 측면을 조망하는 장기 연재식의 기획보도들이 주를 이루어야 함에도, 젠더갈등을 이슈화하는 데 그칠 뿐이다.
작금의 젠더갈등은 결국 남자들이 변해야 끝이 난다. 이 말조차 거슬리게 들릴 수 있겠지만, 자명한 사실이다. 내가 페미니즘을 말하고 쓰려는 것도 여기에 일조하고 싶어서다. 장남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동생들에게 돌아가야 할 사랑의 몫을 홀로 독차지하고 학교와 사회에서도 그런 삶의 연장선상에서만 살아온 내가, 여성학을 조금씩 이해하고 실천해나가는 과정을 중심으로 보따리를 풀어놓으려 한다. 비단 스스로에 대한 면죄부를 내리려는 게 아니다. 나 또한 말하고 쓰며 반복되는 혜택 앞에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학습의 연장선에 있다. 나아가 또래 남성들에 조금이라도 더 공감대를 확장하고 싶은 마음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