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ai훈 Sep 23. 2019

바람 맞아 좋은 날

여느 때처럼 공부하러 가는 길이었다. 요 며칠 장마와 태풍이 자리해 날씨 감각이 무뎌지던 참이었는데, 버스에서 하차하자마자 내리쬐는 볕과 서늘한 바람은 촉수를 건드렸다. 나는 후각이 예민한 편인데, 이름 모를 익숙한 향기가 났던 것이다. 1차로 후각이 반응하고 그것이 모든 감각을 깨웠다. 하차지점부터 독서실까지 평소 고정된 동선을 본능적으로 이탈하게 했다. 가까운 카페를 찾아 커피를 주문했다. 오늘의 볕과 바람은 왠지 맞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커피를 받고 득달같이 밖으로 나섰다. 어디선가 방종을 허락받은 나는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 껴 천천히 호흡했다. 발걸음은 기분에 맡겼다.      


나는 냄새로 기억을 소환하곤 한다. 어느 날의 냄새가 코끝을 때리면 그 냄새의 출처를 찾는다. 대체로 기억이 선명했던 추억들이다. 실로 큰 의미는 없다. 기쁨과 슬픔, 사랑과 이별, 성공과 실패처럼 무 자르듯 감정을 계산할 수 없던 기억들이다. 그저 그 당시에도 그날의 바람과 볕과 풀과 흙의 냄새를 맡고 모든 감각을 열어 재꼈던 것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오늘의 냄새가 따라하려는 그날의 향기 말이다. 그날엔 좋은 일이 있었던 것도, 나쁜 일이 있었던 것도 딱히 아니다. 아스라이 지나가는 기억을 붙잡아 마음껏 그날의 기분에 취해보는 일일 뿐이다.   


이 순간 누군가가 스틸컷 하나만 찍어줬으면 좋았겠다. 발걸음을 재촉하는 출근길의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이격된 이방인. 투명인간이 되어도 좋으니 아무도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는, 그래서 더 이상한. 현장을 생생하게 담아내는 역동적인 느낌의 장면 말고, 오히려 날씨는 감추어 저 사람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모든 감각을 유린당한 듯한 느낌을 받게끔 그런 원초적인 장면 말이다. 실제로 완벽히 그렇지는 못했다. 다만 그렇게 되고 싶었다. 머리 뒤에서 울리는 자동차 소음과 상가의 음악들이 그것을 방해했으리라고 위로했다.  

    

나는 그냥 가을이 코를 찔러서 발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출근하지 않는 출근길 위에서 출근하는 사람들과 똑같이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밟고 카페에 앉아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싶어 출근을 늦추겠다고 말하고 싶었다던 은유 작가의 바람이 짐짓 떠오르며 이 시간조차 지금의 내게 주어진 특권이라 생각하면 오늘의 일탈은 소중하다. 오늘의 냄새가 미래 어느 시점에 또 다시 소환될지도 모를 일이기에, 머리가 아닌 코로 쌓는 기억은 낭만스럽기에 마음껏 고개를 젖힌다.    

작가의 이전글 글 쓰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