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종현 씨 왜 그렇게 복지나 사회적 기업에 집착하세요?"
자주 듣는 질문이다. 웃으면서 그냥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에 원래부터 관심이 많았다고 짧게 대답한다. 길게 대답을 안 하는 이유는 시시콜콜 '제가 사회적 기업을 하려는 이유는요..' 이러면서 얘기하기 귀찮아서였다. 굳이 그 사람이 듣고 싶어 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최근 친해진 사람들에게 내가 왜 사회적 기업을 하려고 하는지 진지하게 얘기한 적이 있다. 다들 놀라거나 대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응원을 보냈다.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꺼내는 게 쉽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응원을 해주기에, 필자인 나도 한 번 이 이야기를 진지하게 써보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내보고자 한다.
엄마는 교대를 졸업했다. 5남매 중 첫째 딸이라고 열심히 공부했단다. 임용을 마치고 첫 번째 부임한 엄마는 학교에서 꽤나 예쁘다는 소리를 들었다. 특히 엄마 담당 학년 부장 선생님이 마음에 들어하셨다. 부장 선생님은 너무 마음에 드셨는지 다가가 " 선생님, 선생님은 남자 친구 있어?"라고 물었다. 배시시 웃더니 " 저 남자 친구 없어요"라고 얘기했다. 그다음 바로 "선생님, 내가 아는 괜찮은 총각이 있는데 한 번 소개받아볼래?"라고 물어보셨단다. 부장 선생님이 소개하는 자리라 어떻게 거절도 못한 그녀는 "네"라고 대답했다. 그 날 부장 선생님은 아들을 찾아가 얘기했다. " 우리 학년에 괜찮은 선생님 있으니 다녀와라. 엄마가 많이 아끼는 선생님이야" 남자는 알았다고 말하며 회사가 끝난 후 엄마가 있는 선 자리에 갔다. 엄마가 꽤 괜찮았나 보다. 열심히 쫓아다녔고 헤어지자고 엄마가 얘기할 때는 눈물을 보이면서 붙잡았다. 그렇게 투닥투닥 2년이 지난 후 둘은 결혼하고 아들을 갖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첫째까지 낳고 둘째를 가졌다. 96년 10월 31일. 엄마는 둘째를 낳았지만 기쁘지 못했다. 낳는 과정에서 아이가 1.5초 동안 숨을 못 쉬었고 낳자마자 인큐베이터에서 엄마 얼굴을 못 본체 한 달을 지냈다. 의사가 아빠에게 말했다.
마음에 준비를 하시죠. 아이가 살기에는 너무 힘들 거 같습니다.
그렇게 한 달을 매일 울면서 아빠는 기도를 했다. 기도가 통했을까, 아이는 기적적으로 살았다. 뱃속에서도 우량아였던 동생은 병원에 나와서도 건강하게 잘 자랐다. 부모님은 그렇게 동생을 잘 키워냈고 잘 키울 수 있을 거라 믿었다. 2년 후, 아빠는 아이를 보던 중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침을 닦지 못하고 계속 흘렸다고 한다. 불안한 마음에 병원을 가보았고 의사는 말했다.
뇌성마비 장애입니다. 아마 평생을 갖고 살 거 같습니다.
부모님은 병원에 고소할 준비까지 하지만, 예상보다 많은 소송 비용에 결국 포기를 하고 아이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시간이 흘러 나는 동생을 보며 마음을 먹었다. 의사가 되겠다고, 동생 같은 장애 아동과 엄마, 아빠 같은 장애 부모를 보며 그들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치료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동안 2시에 자고 7시에 기상하며, 수능을 4번까지 치르며 시험을 보았다. 하지만 계속해서 의대를 떨어졌고 기계공학과를 가기로 결정했다.
대학도 대학이지만 주변에 군 전역을 하는 친구들을 보며 일단 빨리 군대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대 가는 것도 경쟁이라 어떻게 하면 빨리 갈 수 있을까 이리저리 알아보던 중 헌혈과 봉사활동을 하면 가산점이 붙어 군에 가기 쉽다는 것이었다.
정기적으로 헌혈을 하던 차라 헌혈은 문제가 없었고 봉사활동 점수를 채워야 했다.
군대 가기 전, 어차피 채워야 할 거 좋은 일 한다 생각하고 동생이 자주 다니던 복지관에서 봉사활동 60시간 이상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실제로 2달 130시간을 했다.
재밌었다. 봉사활동을 하면서 동생과 같은 장애인들과 소통하고 주변 봉사자 분들이 어려워하실 때, 먼저 가서 돕는 것이 보람찼다.
의사는 못 되었지만 장애인들과 같이 활동하면서 그들이 웃는 모습을 보며 잘하고 있는 거라고 확신했다.
열심히 하는 봉사자가 장애 부모님들이 보기에 기특했나 보다. 어떨 때는 선생님보다 나를 더 믿는 경우가 생겨났다.
사회 복지사들은 사례 관리를 해야 한다. 오늘 한 활동이 우리 아이에게 좋았는지 싫었는지 얘기를 해야 하는데 가끔씩 부모님들이 나한테 얘기할 때가 있었다.
주로 하시는 얘기는 하소연이었다. " 우리 애는 이걸 해야 하는데, 이런 프로그램이 그나마 여기밖에 없어", "선생님 군대 가지 말고 좀 더 하다가 가면 안 될까? 선생님 같은 봉사자 있으면 얼마나 좋아"
이런저런 얘기를 듣다 보니 같은 장애 가족으로서 공감이 되었다. 해결이 필요한 문제들도 보였다. 그렇다 한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입장이라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냥 어쩔 수 없는 것들이라 치부하며 넘겼다.
2016년 3월 25일 날짜도 기억나는 이 하루는 내게 꽤나 충격적이었다. 군에 가기 전 봉사활동 마지막이었다. 이 날 약속이 있어 먼저 인사를 드리고 봉사활동을 끝내고 약속 장소로 이동하던 중 매번 친근하게 인사해 주시던 어머님을 뵐 수 있었다. 그렇게 인사를 드리려고 다가가던 중 낯선 모습에 그만 흠칫했다.
어머님의 아들은 몇 번 봉사활동 때 봤던 아이다. 자폐아다. 자폐아의 특징 중 자기가 꽂힌 대상에 대해 반복적인 말이나 행동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그날도 무엇에 꽂혔는지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했던 말을 반복하며 자기 엄마에게 얘기를 하던 중이었다. 그 모습이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낯선 것은 어머님의 표정. 이 세상 짐을 혼자서 다 지신 모습이었다.
뭐라 인사드리기도 애매했다. 나도 낯설고 어머님도 나를 못 알아보셨는지 그냥 지나가셨다. 그렇게 집에 왔다. 저녁을 준비하는 엄마를 봤는데 동생 얘기를 듣는 표정이 그 어머님과 똑같았다.
그때부터였다. 간과할 문제가 있고 아닐 문제가 있지만 이건 간과하지 말아야 할 문제라고. 더욱 나 같은 장애 가족을 가지고 있는 문제는 누가 먼저 해결해 주지 않을 것이기에 내가 먼저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루는 엄마에게 물었다. "결혼한 후에 엄마의 삶은 어때? 그렇게 이뻤던 엄마가 엄마보다 잔소리가 더 많은 아빠와, 대학도 늦게 가 돈이란 돈은 다 까먹은 첫째와, 아픈 동생을 낳으면서 힘들지 않아?" "나 같으면 결혼 안 할거 같아"라고. 엄마는 은은하게 웃으며 "괜찮아. 엄마가 태어나서 너랑 네 동생 낳은 게 제일 잘한 거야, 네 아빠랑 결혼한 게 두 번째고" 그 날 울면서 옛날 엄마 사진을 핸드폰에 찍어 지금까지 배경화면으로 두고 있다. 가끔씩 친구들이 여자 친구냐고 묻는다. 맞다. 내가 태어나서 첫 번째로 사랑한 여자 친구가 좀 더 행복했으면 좋겠어서. 그리고 누군가의 엄마가 , 누군가의 아내가, 누군가의 딸이 골치 아픈 일이 없으면 좋겠어서. 제일 잘한 일이 내 가족을 만난 거라고 그렇게 얘기했으면 좋겠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