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기억들은 마치 오래된 필름 속 사진처럼 단편적이고 흐릿하다.
때로는 선명하게 떠오르는 한 장면이 있다가도, 그 전후의 맥락은 안갯속으로 사라져 버리곤 한다. 유년기의 일상은 마치 물방울이 유리창을 타고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웃음소리, 친구들과의 장난, 유치원 안의 소란스러움. 그저 한 컷 한 컷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내게 있어 진정한 의미의 첫 기억은 조금 특별하다. 그것은 단순히 시간의 순서로 첫 번째가 아닌, 내 삶에 깊은 의미를 새긴 최초의 순간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할머니와 함께했던 그 버스 여행.
할머니가 일하시던 시장에서 할머니 집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 그때는 여행이라 느껴졌다.
버스를 타고 모르는 동네 풍경에 가장 오랫동안 버스로 이동한 그 여행 같은 감각.
그 시간은 어린 나에게 세상과의 첫 만남과 같았다.
창밖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칼이 흩날리고, 차창 너머 펼쳐진 세상이 신기하게 다가왔다.
그때 할머니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나에게 닿았다.
그날 하루종일 할머니의 일을 도와드렸던 것에 대한 칭찬인지. 평소의 나를 보고 넌지시 던지는 말이신지.
"너는 참 똑똑하구나, " "뭐든 해낼 거야." 할머니의 그 한마디는 어린 나에게 강한 믿음과 용기를 심어주었다. 나는 그때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할머니는 나를 무한히 사랑하면서도, 때로는 전통적 가치관이라는 단단한 틀 속에 나를 가두려 하셨다.
"여자는 남자에게 맞춰 살아야 한다"는 할머니의 말씀은 어린 내 마음에 작은 균열을 만들었다.
할머니의 그 말은 나의 자유로운 꿈과 욕망 사이에 늘 균형을 맞추려 애쓰게 만들었다.
그녀는 내 대단함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동시에 내가 세상의 틀에 맞춰 살기를 바랐다.
그 모순은 나에게 큰 숙제로 남았다.
그러나 나는 이해하려 노력했고, 할머니가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 이루고 싶다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나의 첫 기억은 단순한 추억 그 이상이다. 그것은 나의 삶을 지탱하는 기초가 되었고,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중요한 시간들이다.
할머니와의 그 버스 여행은 내게 그런 의미였다.
그때의 따스한 햇살과 바람, 할머니의 사랑과 기대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나는 여전히 그날의 기억을 안고, 세상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추억이 아닌, 나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근간이 되었다.
할머니가 심어주신 용기와 꿈, 그리고 그 속에 담긴 모순과 고민까지도, 모두가 지금의 나를 이루는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첫 기억의 빛나는 조각들은 여전히 내 안에서 반짝이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나의 길을 밝혀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