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정 Nov 07. 2024

귀와 눈물.

날이 갑자기 추워지며 얼굴이 아려온다.

소개팅을 나가 애매하게 까인 덕에 과거의 여러 만남과 헤어짐이 뒤따라 생각의 꼬리를 물고 특히 3년 전의 이별을 유독 푸근하게 상기한다.


이별이라는 경험은 언제나... 언제나... 저릿한 고통을 수반한다.

마치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던 서사가 한순간에 단절된 것 같은 느낌, 시간의 불가역적 흐름 속에서 홀로 남겨진 듯한 느낌.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그 아이와의 이별은 내게 필연적인 사건이었다. 내면 깊이 묻어둔 감정들을 정리하고, 더 이상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필요했던 과정이었다.


유치하고 귀엽게 첫눈에 빠져 들이댄 어린 나의 당돌함.

초반에 훌쩍 떠난 속초바다, 비바람으로 거세던 파도의 속도와 높이처럼 관계가 시작됐었지.

그렇게 많은 곳을 쏘다니고 즐거움을 나누던 해.

함께 오른 산에서 등을 보이며 먼저 올라가는 너를 보고 눈치챘었어.


그날, 너에게 '시간을 갖자'라고 말했던 순간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해. 너무 지쳐 있었어.

외로움에 무너져가는 내 모습이 너무도 초라해 보여서, 더는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에 너에게 시간을 달라고 했던 거야. 나 자신을 미워하지 않기 위해, 나에게 시간이 필요했어.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4개월 전에 네가 나에게 '시간을 갖자던, 먼저 손을 놓았던' 순간이 겹쳐 떠오르더라. 그때 나는 끝없이 울면서, 그 관계는 끝이 난 걸 알면서도 내가 더 노력하고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면 뭔가 달라질까 하는 희미한 희망으로 널 계속 붙잡았었지.

그리고 그렇게 질질 끌던 4개월, 너의 지쳐 있는 얼굴이 아직도 내 마음 한구석에 아린 흔적으로 남아 있어. 그 표정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가끔 마음이 저려와.


그로부터 시간이 지나고 내가 결정한 이별은 너에게 질린 게 아니었어.

나 자신에게 질려버린 거였어. 스스로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지쳐 있었으니까.


너와 내가 함께했던 시간을 떠올리면, 마치 아침에 간식을 하나 던져주고 나가는 주인처럼, 단 한 번의 연락으로 오후 늦게까지 기다리는, 그럼에도 아무렴 좋다는 강아지처럼 느껴졌어.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사실 내 깊은 곳에서는 그 기대를 내려놓지 못했던 것 같아.

우리 둘 다 서로의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거야. 그저 형식적으로 이어가려 했던 대화들.


너와의 연애는 내 삶에서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자각하게 해 준 경험이었어.

사랑이라는 감정에 나를 온전히 내맡겼지.


나의 귀를 만지던 네 그 습관, 처음에는 정말 어색하고 불편했던 것 같아.

어느 순간 그것은 우리의 일상이 되었고, 지금도 무의식적으로 손이 귀로 향할 때면 그때의 네가 떠올라.

내 귀는 아직도 그 온기를 기억하고, 이제는 네가 곁에 없어도 여전히 그 흔적을 간직하고 있어.

내게 귀라는 신체 부위를 새롭게 인식하게 해 준, 너는 그만큼 신기한 존재였달까.


그때의 나는 언제나 너에게 모든 것을 헌신했던 것 같아.

왜인지 모르게 나는 연애의 모습 때만 '을'의 위치가 되었었잖아.

너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너의 사랑을 받기 위해 애쓰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했지.


그 헌신은 때로는 나 자신을 잃게 만들었고, 결국 우리 둘 다 지치게 했던 것 같아.

그럼에도

음…

후회하지 않아. 그 감정들을 후회 없이 경험했기 때문에, 그 순간들이 결국 나의 일부가 되었으니까.

진심으로 고마운 감정이야.

나를 온전히 던져 사랑을 알게 해 주었던 그 시간들, 온전히 바닥 끝까지 추락해 느끼는 차가운 슬픔.


이 정도 폭의 감정을 느끼다니. 마냥 놀랍잖아.



어느 날, 너는 내게 물었어. 만약 외계인이 찾아와 '사랑이 무엇인가' 묻는다면 어떻게 설명할 거냐고.

사랑은 눈물이라고, 그 눈물을 보여주고 맛보게 할 것이라고.

그때 가장 많은 눈물을 흘렸었거든. 행복할 때에도 속상할 때에도 고마울 때에도.


외계인이 그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겠지. 그러니까 맛이라도 보라고 하려고.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너는 그 외계인의 귀를 만져주었을 것이다.

내가 느꼈던 그 따스한 손길을 외계인도 느낀다면, 사랑이라는 감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이별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이별을 통해 나는 나 자신과 다시 마주할 수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스스로에게 지치지 않기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을 미워하지 않기 위해 살아가고 있다. 이별은 내게 고통스러운 사건이었지만, 그 고통 속에서 나는 진정한 나를 다시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내 삶에 꼭 필요했던 변화였다.



그 시절을 반추하면서 떠오른 책 문장

“너 나 만나서 불행했니?”
그러곤 곧장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저쪽에서 긴 침묵이 이어졌다. 초조해진 서윤이 황급히 변명하려는 찰나 경민이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
“그런 거 아니었어”
“....”
“힘든 건 불행이 아니라… 행복을 기다리는 게 지겨운 거였어.”

김애란 작가의 <비행운>



작가의 이전글 말랑한 샤프가 갖고 싶었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