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티치 Sep 07. 2021

[어느 주말] 1. 자판 위에서

1. 멀지 않은 과거의 그대를 돌아보며


마음을 달래려 노트북 워드창을 켰다.


달랠 마음이랄게 뭐가 있나 싶지만, 그래도 활자로 풀어내고 나면 성인이 되고선 염치없어 못하는 산 위 고함지르기를 세 네번 정도 내지른 느낌이거든.



아까 터벅터벅 내려오는 언덕길에서 그를 떠올렸다. 그의 선명한 형체를 떠올렸다기보다는, 일상을 주고받던 타자의 부재를 허전해했다. 그의 장난스런 말투나, 그의 무미건조한 표정이나, 그와 손을 잡을 때의 온도를 떠올리기보단 그저 적적한 허전함을 느꼈다.



지금 난 다시 오르고 싶은 마음이 없는, 완만한 경사의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가고 있다.


채찍질로 굴러가는 아픈 팽이 위에서 아슬하게 균형을 잡기보단, 그냥 하염없이 내려가고 있다. 이건 아쉽기도 한 일이다. 속절없이 벗어던질 수 있다는 거니까. 거칠게 벗어던질 필요도 없이, 이렇게 서서히 내려놔도 괜찮다는 거니까.


불타오르는 관계를 열망했다. 우물처럼 한 사람을 깊이 파고들 때의 어두컴컴한 안락함을 느끼고 싶었다. 난 이제 그럴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충만해지고자 자기의 흠결을 찾아 방황하는 두 사람이 만나 터뜨릴 불씨를 고대했다.




허나, 빌어먹을. 나는 상대가 없는 줄다리기 시합에서 온 힘을 다 써버렸다. 밀고 당기기 따위의 고루한 전략에 내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지어니, 하고 핏대 올려 당긴 밧줄 너머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있었다 떠나간걸까? 원래부터 없었던걸까.




사실 내가 느낀 이 피로함은 밧줄의 무게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무엇을 당기고자 하는지도 모른 채 당기기만 해버렸던 거지. 밧줄의 무게는 서서히 늘려가면서. 그래, 냅다 웨이트해댄듯한 시간이었다. 이 악물고 참 열심히도 잡아당겼던 시간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어느 주말] 0. 프롤로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