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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윤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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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을하 Feb 11. 2020

약속, 그 단어 뒤에

지킨다, 그 유일한 하나.

[ 함께 들으면 좋을 곡 : You're gonna live forever in me(John Mayer) ]





‘내게 있어서 약속이란 무엇일까.’


언젠가 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는 고맙고 소중한 문장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덕택에 그동안 은연중에 지니고 있던 의문을 다시금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곤 오랜 게으름을 뒤로하고 계속해서 묻어 두기만 했던 의문에 비로소 갈고리를 달 수 있었고,  어느 정도는 갈무리할 수 있는 질문으로 끄집어낼 수 있었습니다.





잠깐 질문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면, 개인적으로 질문을 하는 것도 받는 것도 몹시 즐기는 편입니다. 누군가에게 질문을 한다는 것은 그 상대방에게 호기심이 있다는 것이고, 그 호기심은 관심이 있어야만 비롯될 수 있는 것이며, 관심이 있다는 것은 일정 부분의 마음에 그 상대를 담아 살펴보려고 노력할 때 비로소 이뤄질 수 있는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이처럼 누군가로부터 질문을 받는다는 건, 그 질문 너머가 모호함 투성이라도 이를 무릅쓰고 서라도 더 알아가고 싶다는 빛나는 용기에서 비롯된 소중한 마음을 선물 받는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물론 때로 어느 누군가들은 물음표 안에 느낌표나 온점 등을 감춰 두기도 하지만 말이죠. 그런 것들에는 구태여 그 너머의 의미까지 파악하려 들지 않는 게 유익하다는 것도 조금씩 배워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전에는 잘 몰랐습니다. 어느 누군가에겐 질문을 하는 데에 있어서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요. 제가 그 누군가가 되어서야 비로소 함께 끄덕일 수 있었습니다. 그 이전의 제겐 누군가를 더 알아가기 위해 던지는 질문은 무조건 다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사실 제게 건네지는 대다수의 질문들에 대해 여전히 그러한 마음 가짐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상대방에 대해 더 많이 아는 것만이 친밀하다는 것을 증명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믿곤 하였거든요. 그래서 순전히 호기심에 목적을 두고 다가오는 질문들을 통해 여러 지경을 넓힐 수 있음에 감사했고 다른 이들도 그러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어렵지 않게 질문들을 건네고 더 알아갈 수 있었던, 제 나름의 관계를 진전시키는 방법이었습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에게는 질문 자체가 아픔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소중했던 한 친구의 많은 것들을 알아가고 싶어서 이것저것 질문하곤 했는데요, 때론 그 질문들 중에도 아픔이 될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걸, 더불어 그 아픔들이 쌓이면 그 질문 대상자와의 관계를 단절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부터 제 안에 물음표를 없애려 부단히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적당히를 익히면 되었는데 자책하는 데에 급급하여, 애초에 싹을 잘라버리겠다는 어리석음이 앞서버렸습니다. 과거를 빌미 삼아, 궁금증을 갖기가 어렵다는 것에 타당성을 부여하고 싶진 않습니다. 나의 아픔을 무기로 타인에게 휘두르는 사람은 더더욱 되고 싶지 않습니다. 만약 나로 하여금 그런 아픔을 겪은 이가 있다면, 몇 번이라도 찾아가 그 마음이 나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며 사과하고 싶습니다. 소중한 관계 앞에서 자존심을 고집하고 싶지 않습니다. 용기를 내어 표현해주는 이에게 몇 번이라도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함께를 오래도록 지켜낼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또 무지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는 것에 대해서요. ‘아니요’라고 말하고 싶은 순간에 때론 ‘네’라고 말하기도 한다는 것을, 저마다의 이유로 마음속 이야기를 그대로 말하는 것을 힘들어 할 수도 있다는 것을요. 이전에는 그저 상대가 진심을 말하지 않은 것에 배신감을 느끼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러나 역으로 그때와 비교적 비슷한 상황이 닥치며 상대방의 입장이 되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상대방 입장이 되어 느꼈던 모든 것이 그 사람과 완전히 똑같은 것이라 할 수는 없겠습니다. 어디까지나 타인인 제가 알 수 있는 것들은 지극히 표면에 불과할 테니까요.) 그 시간을 통해 고달팠지만 감사하게 그때의 우리들을 조금이나마 더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제 자신의 무지함을 일찍 깨닫고, 어떤 면에서는 눈치가 몹시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더라면 조금은 다를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오랜 시간을 그러한 후회들에 뒤얽혀 제 자신을 책망하곤 했지만, 이제는 압니다. 그때의  눈치 없는 자신 나름으로 파악하고자 했던 노력도 깃들어 있었다는 것을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며 나 몰라라 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관계에 있어서 한쪽 책임만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지, 그 배움이 그때의 제게 잘못이나 책임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말하려 했던 게 아닙니다. 그저 맹렬한 자책만을 스스로에게 퍼부으며 그 가시를 여전히 품고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습니다. 비판적으로 그때를 바라보며, 기억하며 다시는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다짐입니다. 여전히 그때의 미성숙한 모습들이 지금에도 튀어나오곤 하는 것을 보며 한참 멀었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전에는 그런 제 모습만을 한참 묵상하며 그저 주저앉아 있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함께 이제는 ‘왜’를 넘어 ‘어떻게’를 조금씩 모색해가며, 그 모든 힘을 부어주시는 하나님을 묵상하려 나아가는 이 시간들이 참 소중합니다. 그러한 시간과 힘을 주신 신께 참 감사드리고요. 이런 부족한 저임에도 곁을 지키며 함께 해주는 이들에게도 고맙고 감사합니다.






    어릴 적에는 온 세상이 투명한 유리창일 거라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렇지 못한 마음들이 어떠하다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그저 있는 현실을 비로소 정면으로 마주하기 시작하게 되었다는 걸 말하고 싶었습니다. 많은 시간을 나는 이러하기에 당신도 그래야 한다는 이기심 가운데에서 살곤 했거든요. 때론 누구나 그저 솔직하게 속 마음을 말할 수 없을 때가 오기도 하잖아요. 어떠한 악의가 아닌, 그저 순수하게 저마다의 이유로 말이죠. 사실 모두가 마음에 드는 생각들을 거리낌 없이 그대로 말하는 세상이었다면, 얼마나 많은 갈등이 있을지 상상만으로도 눈이 질끈 감깁니다.




    흔히들 겉과 속이 다른 부분들을 보며 위선적이다, 가식적이다 하며 비판하곤 하지만, 그에 대해 저는 이견을 지닙니다. 겉면과 속면은 같거나 다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모든 상황에서 항상 겉과 속이 같기는 어려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또한 속면과 다른 겉면은 모두 거짓이라는 정의가 항상 성립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부정적인 의도로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겉과 속에 차이가 있을 뿐 모두 진심일 수 있다는 그 모순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 안에 수많은 생각들이, 자아들이 뒤얽혀 있곤 하니까요. 그냥 정말 이해관계의 문제가 아닐까요. 사실 한 발자국 물러나 바라보면, 사연 없는 사람 하나 없고 선택할 수 없이 그저 그렇게 흘러가야 했던 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오랜 습관을 돌이키기에는 여간 적잖은 힘이 들곤 하니까요. 그렇기에 그럼에도 돌이켜 나아지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토록 빛나는 것이겠습니다.




    그냥 뭐랄까요.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것들에 마냥 쉽게 웃음 짓긴 힘들지만, 그 시간들을 통해 이 또한 더더욱 많은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또 제 주위 소중한 사람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깊이 공감할 수 있다면 앞으로도 얼마든지 더 감내해 보고 싶기도 합니다. 나중에 이렇게 말한 저 스스로를 원망하게 되는 때가 온다고 하더라도요. 나는 조금 슬프더라도 내 주위 소중한 사람들을 보다 더 살펴주고 돌볼 수 있다면, 그 슬픔도 내겐 행복한 슬픔일 거라 생각이 됩니다. 누군가는 이런 저를 위선이라 할 수도, 실속 없다며 자신을 챙기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이제는 그 말에 쉽게 제 자신의 소망을 내려두지 않겠습니다. 나만 행복하자고 살아가는 세상이라면 사실 그렇게 많은 것들을 견딜 필요는 없다고 생각이 됩니다. 자주 넘어지더라도 그 시간들을 통해 보다 더 넓어지고, 채우려 하기보다 비워낼 수 있는 연습을 하게 되며 더 많은 사랑들을 담아 전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가치 있는 삶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겠죠. 그렇다면 그들 또한 그냥 그런 겁니다. 그냥 서로의 생각이 다를 뿐이죠. 더 이상 타인과 다른 제 생각을 틀린 것이라며 제 존재 의의 자체를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잠깐 이야기하고 온다는 게 생각보다 길어졌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이야기해보자면, 제게 있어서 약속은 하나의 책임이자 언약과도 같습니다. 제게 사랑이 감정이 아닌 약속이듯이요. 내 목숨과 맞바꿔서라도 끝내 약속은 남겨야 한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 그 질문을 듣고 흘러든 한 문장이 그러했거든요. 사실 장황한 문장과는 별개로 모든 약속에 그러한 태도를 곧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스스로를 보며 자주 좌절하곤 합니다. 그럼에도 가끔 그렇게 온 마음을 다해 지키고 싶게 되는 약속들이 아주 가끔 있는데, 그때에는 필연적으로 저러한 문장들이 잇따라 오는 것 같습니다. 어떤 약속에 있어서는 보다 부족한 태도를 보이기도 하는 반면 말이죠.(대체적으로 플래너에 세운 오늘의 계획들이 그러 하달 까요. 사실 이 부분은 제 능력치 밖의 계획을 수립하는 무모함에서 오는 이상에서 오는 것들이라, 부지런히 현실성을 키워내면서 나아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처음 떠올린 생각은 위와 같았습니다. 여러 날을 그 질문과 잇따라 난입한 문장에 대해 곱씹곤 했습니다. ‘약속, 목숨을 버리더라도 지켜내야 하는 것’. 그러나 그 문장을 곧바로 답으로 달진 못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불쑥 끼어든 문장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동시에, 지켜내지 못한 약속들이 생각나며 그 괴리에 생각하기를 그만 두곤 했거든요. 어떤 때에 이 문장이 성립되는가에 대해 생각해보면, 관계적인 측면에 있어서 사랑으로 맺어진 약속들 중 소수가 그러한 것 같습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고 싶지만 아직 이러한 생각의 결부 성에 관하여 제 안의 복잡함을 완전히 체계화하진 못해서요. 어쩌면 영영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됩니다. 관계는 사람이 하는 게 아니다 라는 말처럼요. 미워할 레야 미워할 수 없는 사람처럼 그렇게 기어이 사랑하게 되고 마는 관계들이 있는 것을 보며, 머리로만 알았던 것들을 마음으로 느끼게 되곤 합니다. 약속을 지켜야겠다는 그 책임이란 마음도 그러한 것 같습니다. 그러한 마음은 갖는 게 아닌, 가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어떠한 약속에 있어서는 기어이 지켜내도록 부어주시는 사명에 따른 마음 같습니다.



    이에 대해 곰곰이 곱씹다 보니 뒤이어 오는 생각들이 있었습니다.  약속을 지키는 데에 있어서 정말 많    은 은혜가 필요하구나라는 것을요. 분명 약속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렇지 못하는 순간들 또한 그럴 수 있겠구나라는 것입니다. 이전의 저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다른 타인들을 보며 실망하곤 했거든요.  조금씩 시간을 먹어 가며, 이따금 지키지 못한 약속들이 쌓여가곤 하는 것을 보며 점차 깨달아 갑니다. 스스로에게 있어서는 그렇다고 해도, 타인과의 약속에 있어서 악착같이 지켜냈던 과거의 저와는 달리, 때론 아무리 노력해도 이뤄낼 수 없는 영역들이 있다는 것을 배워가며, 약속에 있어서 나름의 관대함을 길러 가는 순간들을 봅니다.(아직까진 타인에게 보다 잘 적용되는 부분이긴 하지만요. 제 자신에게 또한 적정선에 있어서 너그럽게 수용하는 태도는 계속해서 단련시켜 가야 할 부분으로 여겨집니다.) 끝내 지켜내지 못한 약속들을 바라보며 오랜 시간 저 자신을 탓하고 옥죄곤 하였는데요, 그 약속에 대해 허락된 시간의 정량이 정해져 있었음을 깨달으며 조금씩 제 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배워가는 것 같습니다. 그 여정 가운데에 제가 할 수 있는 건 함께로 허락된 시간 안에서 사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것임을. 최선 끝에 그럼에도 풀렸다면, 제게 남은 매듭 한쪽을 마음에 ‘덕분’이란 이름 하에 품고 그저 감사로 남기는 것임을. 다른 한쪽을 구태여 붙잡으려 하지 않고 그저 행복하기를 축복하는 것임을. 그렇게 오고 가는 것들의 시작부터 끝까지 사랑을 가득히 새기려 노력하는 것임을. 은혜로 그 시간들을 선물하신 하나님께 그 또한 그러한 시간을 통해 약속을 지키지 못한 모든 이가 의도적으로 약속을 깨고 싶어서 그렇게 행동하는 게 아니라는 것 또한 배워갑니다. 살아가다 보면 옷 사는 것조차 귀찮아지는 그런 무기력함이 찾아들기도 하고, 하루의 숨을 고스란히 다 뱉어내는 데에 온 집중을 기울여야 하는 때가 찾아오기도 하는 것처럼, 지키고 싶어도 끝내 못 지키는 순간들이 오기도 하더군요. 지켜내는 그 모든 순간들이 제 힘이 아닌 오직 은혜로 해낼 수 있었음을  깨우침에 그치지 않고 마음으로 느껴내는 순간들을 늘려가며 비로소 감사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약속의 중요성에 있어서 크고 작음이 어디 있겠냐만은, 이 생각의 발단을 도운 벗의 걱정스럽지만 따스한 염려에 이끌려 보다 유연성을 길러보는 연습도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약속의 포괄성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의 융통성은 허용될 수 있진 않을까, 제 자신에게 조심스레 이야기를 시도해 보기로 합니다. 가령, 평생 곁에서 함께 하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약속은 죽음보다도 중요하다는 대전제 하에 이 명제를 함께 성립시키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단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겠습니다. 어쩌면 오랜 시간 동안 곁에서 함께 하겠다는 더 큰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건네받은 따스한 다독임이 그랬듯, 지친 몸을 잠시 쉬어가는 법도 익혀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그 누구도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며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어떠한 약속도 지킬 수 없을 것 같을 때 제 자신을 없애가며 약속을 지키려 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무엇이 저를 이렇게 만드는지 몰랐습니다. 그 누구도 제게 약속 앞에 모든 것을 바치기를 강요하지 않았으니까요. 저를 향한 진심 어린 조언을 통해 뒤늦게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를 괴롭혔던 것은 다름 아닌 제 자신이었다는 것을요. 사람은 완벽함에 다가서기 위해 노력할 수는 있겠지만, 결코 완벽함에 거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이에 대해 머리로는 알면서도 마음으로 제 자신에게 완벽함을 강요하곤 했습니다. 제 자신이 보기에 완벽해 보이는 순간에만 저를 사랑했습니다. 완벽하지 못한 스스로를 그 누구보다도 가혹하게 책망하곤 하였습니다. 제 자신에게서 자유를 앗아간 건 다름 아닌 제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혹은 상황이 제게 어떻게 다가오던, 이에 낙심할지 말지는 제게 달려 있습니다. 저는 잦은 순간들을 제 뒤에 떨어진 낙심의 조각들을 주워 제 마음에 꽂곤 하였습니다. 저의 마음을 향해 제 자신 스스로 끊임없이 떨어진 칼날 조각들을 주워, 쏘아 대곤 하였습니다. 이는 의식적으로 이뤄지기도 했지만, 후에는 저 자신조차도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습관처럼 이뤄지곤 하였습니다. 생각은 허상에 불과하다고 믿었습니다. 그 허상들이 마음에 가득히 쌓여 저를 병들게 하고 있는 줄도 모른 체 말이지요. 상황이 좋지 않다며, 애먼 것을 탓하기에 바빴던 것 같습니다. 보다 시급한 건 저 스스로가 직접 제 마음을 살피는 것이었는데 말이지요.



    그래요, 사실 이렇게 보면 제일 처음의 문장과는 반대로, 어떤 면에서 목숨은 약속보다 더 중요하기도 하네요. 목숨을 지켜야, 결국에 약속을 지킬 수 있으니까요. 이 두 문장 모두에 고개를 끄덕이는 제 자신의 합리화에 저절로 고개가 저어 지네요. 미안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약속에 관한 생각은 여전히 그러합니다. 목숨은 두고 가더라도, 약속은 기어이 지켜내야 하는 것. 동시에 죽어서도 지켜내야 할 약속은 신이 주신 목숨의 기한을 기어이 다 살아, 맡기신 일을 다 해내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영원히 사랑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겠다고요.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겠지만요. 이 모순을 지켜내기 위해 많은 순간을 외줄 위에서 걸어야 한다고 하더라도, 꼭 해내겠습니다. 목숨을 맡길 각오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되, 주께서 주신 이 길을 끝까지 다 걷기 위해 때때로 쉬어 가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겠습니다. 그 또한 그 순간의 최선일 테니까요. 잘 해내겠습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제 자신이 지켜야 할 태도입니다. 다른 이들에게 그 무엇도 요구하지 않고 싶습니다. 그저 이 생을 함께 걸어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축복이라서요. 또한 먼저 뒷모습을 보이지 않겠습니다. 내 소중한 사람들이 내게 그러하더라도 감히 괜찮다고 다짐하겠습니다. 관계의 온도가 늘 같을 순 없을지라도, 그 온도를 피어내는 마음만큼은 평생 품고 가겠습니다. 인연은 여러 번 고개 저어봐도 신이 주신 가장 큰 선물이니까요. 결코 잊히지 않을 것들이라면, 이따금 떠올리게 될 때 감사함으로 남겨두고 싶은 욕심이랄까요. 그렇기에 그 뒷모습 또한 사랑으로 기꺼이 배웅하며 축복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먼 훗날에 그 약속들의 페이지를 돌아보며 고마웠다고 감사하다고 말하기 위해, 늦었지만 자그마한 사랑을 들고 지나간 것들을 하나 둘 닦아봐야겠습니다. 저마다의 마음 빛으로 찬란히 빛날 수 있도록 말이지요.



    이렇게 비추어 본다면 과거의 약속을 오늘들에 여전함으로 지켜 나가기 위해 일정 부분을 한결같이 유지하려는 노력이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 생각들을 정리하면서 적립된 것이지만, 한결같음을 유지한다는 것은 정말 열심히 움직여야만 이뤄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저의 경우 일정 부분에 있어서 한결같은 사람이고자 하는 소망이 있는 편인데, 그 한결같음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그저 제자리에 가만히 머무는 것이라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이따금 새려운 것들이 밀려올 때면, 눈을 감고 귀를 막았습니다. 그게 고유성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거든요. 분명 가만히 머물러 있었음에도, 너무도 많이 변한 스스로를 보며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변해가는 그 모든 것들 사이에서 한결같음을 지켜내는 건, 과거의 것이 오늘에도 어울릴 수 있게 부지런히 닦아 내어 오늘의 반짝임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뒤늦게서야 들더군요. 그리고 어느 누군가는 지난날의 모습들을 내려두고 그저 지금에 있는 힘으로 헤엄치며 흘러갈 때, 자신의 지난 모든 한결을 지니고 그 흐름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그만큼 더 큰 무게를 이고, 보다 더 많은 힘을 내어 열심히 헤엄치고 있는 건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끊임없이 변해가는 것 또한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 생각이 됩니다. 흐름에 있어서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있어서는 호불호만 있을 뿐이겠습니다.




    이밖에도 약속에 대한 저마다의 다양한 생각들이 있을 거라 생각이 됩니다. 약속에 대한 여러 생각들에 대해 얼마든지 존중할 수 있으며, 한 번에 이해되지 못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기도를 해서라도 더 알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약속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에 있어서도요. 제 의견은 어디까지나 제 안팎의 이야기일 뿐이며, 타인 또한 그러하니까요.




    제가 이르고 싶은 길은 제게 생명을 주신 주님이 걸어가셨던 길입니다. 웃음만 가득할 것이라는 저의 생각은 크나큰 오산이었지만, 주님께서 선물하신 소중한 시선을 조금씩 익혀가게 되면서 그렇기에 고난 가운데에 끄덕여지는 찰나가 고맙고 감사한 요즘입니다. 헤쳐 나가는 이 시간이 마냥 쉽지만은 않지만 함께라면 끄덕 없겠습니다. 마음에 누군가를 들이는 건, 아니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있던 그 마음의 방을 다시금 개방하게 된 건 정말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서요. 그렇기에 보다 더 열심히, 부지런히 청소를 해내야 함을 느낍니다. 그렇기에 제 자신의 시선으로 저를 규정짓는 것이 아닌, 오직 주님의 시선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려 열심히 노력해야겠습니다.  그분은 저를 위한 보호 울타리를 주셨을 뿐이지, 가둬두는 틀을 주시진 않았거든요. 그 울타리는 제가 딛는 그 어디든 따라오는 곳이기에, 결코 저를 한 곳에 머물도록 속박하지 않습니다. 안전하도록 지키실 뿐이지요. 저도 하루빨리 주님의 마음을 닮아 평생도록 든든한 힘이 될 수 있는 벗이 되고 싶습니다.




아직은 정갈되지 못한 많은 복잡함들에서 비롯하여 적잖이 두서없었습니다.

읽어 주심에 감사드리며

이곳에 닿은 그 발걸음의 앞으로 또한 평안과 행복이 가득하길 바라겠습니다.



이 모든 은혜를 값 없이 선물하신 주님께

그 모든 시간의 인연들께

그럼에도 곁을 주는 벗들에게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영원히.


이 모든 감사 주께 올려드리며,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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