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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을하 Mar 01. 2020

두 걸음, 다섯 걸음

이해, 오해 (최종 수정)

[ 함께 들으면 좋을 곡 : 밤의 기차(위아더나잇) ] 


(다소 감정선이 짙을 수 있으니,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두 걸음만 걸어 볼 걸, 종종 세 걸음을 더 걸어 버리곤 하였다. 오해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나로부터 나를 자주, 더 멀리 걷게 하였다. 그게 어떤 이들의 눈에는 다소 따갑게 느껴졌던 것일까, 그리하여 그 따가움을 이기지 못하고 쏘아붙이듯 바라보는 것일까. 내 행동들이 내가 뜻했던 바대로 읽히길 바랐는데. 계산한 바라는 게 아니라, 그냥 그 마음에 담긴 것 그대로 말이다. 미처 기대일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던 바람은 그저 나부끼는 낙엽에 불과했다. 당연하다 생각했던 것들이 커다란 기대였음을 하나둘 깨닫게 되어갈 때마다, 그저 내려놓는 법을 추스르듯 배워 갔다. 내려놓지 못하면 미워하거나 멀어져야 했기에. 이는 결국 나와 타자를 망치기에. 나를 위해, 부지런히 기대를 놓고 타인을 들었다. 



이해는 바라지 않을 테니 하다 못해, 그 자체로 바라봐주길 바랐다. 오해받지 않길 바랐다. 이전에는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라 생각했다.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되는 일이라 생각했기에. 사과가 놓여 있다면, 사과가 놓여 있구나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간단한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계속해서 편견으로 나를 보는 사람들을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잘 알지 못하면, 먼저 묻는 게 상책이지 않은가 라는 생각이 앞서기도 하더라. 그러나 "넌 참 행복한 삶을 살았구나."라는 문장과 더불어 '아니요'라는 함의를 지닌 '네'라 대답하는 대화법이 내 마음을 지나쳐간 시간을 통해 비로소 배울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이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을. 물론 나를 비롯해서도. '은연중에 감춰진 것을 파악하지 않고서는 미처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다', '또다시 끝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이러한 자각은 그 모든 불투명으로부터 겁을 먹게 했다. 또한 그 불투명의 극단이 사람이라는 것 또한 말이다. 그때의 자각은, 한없이 사랑스러운 그 모든 이름이 도망치고 싶은 모든 이름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 후로 다른 누군가가 다가올 때마다 생각했다. 아니, 판단했다. 내 앞에 서 있는 저 상대방은 나를 무너뜨릴 이인가를 살피기 위해 숨을 멈추고 뒷걸음질 쳤다. 마음을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했는데, 때론 진정으로 다가온 그 소중한 마음들조차 눈으로 재단하기에 그치곤 하였다. 두려웠다. 한 번 내 안에 사람을 받아들이고 나면, 내 안에 지닌 그 모든 것을 내어 주어야 직속이 풀리는 나인데 그렇게 내어 준 자리에 그 상대방을 하나 가득 채워야 하는 나인데. 그렇게 채워져 있던 상대가 떠난 공간은 여백이 아닌 구멍과도 같았다. 발 하나 놓을 곳 없이 딛는 그 순간 한없이 떨어지기만 하는. 



이 이상의 반복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단순히 마음 하나 무너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학생 시절 그 모든 것이라 여겼던 친구가 사라진 시간 직후에, 내가 내게 행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여전히 너무도 선명히 반복되곤 하였다. 여름 끝무렵 가을, 태풍이 불던 날이었다. 내리는 비 가운데에 자전거와 함께 여러 신호등을 지닌 내리막길을 그저 손 놓고 쭉 달렸다. 한 번도 끊김 없이 타고 내려간 적이 없던 길이었는데, 그날만큼은 계속해서 초록불이 켜져 있더라. 그 이후로 자전거는 도난당했고,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여전히 선명한 그날은 신의 존재를 느끼다 못해 확신하게 된 날이었다. 한 편의 시트콤 같을 수도 있겠으나, 그때 당시에는 나름 진지했겠다. 한 편의 하이틴 영화를 찍고 있었던 걸 수도 있겠다. 어쩌면 어떤 부분의 나는, 새로 등장할 앞으로의 나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었을 수도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제는 그 일에 대해서 조금씩 감사하게 되어가는 것 같다. 그대로 많은 나날을 살아갔다면, 언젠가 꼭 한 번은 대학 한 번 못 가는 걸로 끝나지 않았을 수도 있을 테니까. 그만하길 다행이라 생각한다, 정말. 아니었다면 모든 것이 풍비박산이 나고서야 그나마 깨달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돌이키기에는 너무도 많은 걸음을 돌아온 후였을지도 모른다.(물론 그럼에도 다시 돌이켜 걸을 것이다. 더 이상 포기는 세고 있지 않겠다.) 그 당시에는 하고 싶은 공부 앞에서 넘쳐 드는 생각을 부여잡으며 우는 게 전부라 애석해하기도 했지만, 그 덕에 조금이나마 세상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시점을 지니게 되었으니. 이로 인해 학벌은 고수하고서라도, 세상을 보다 담대히 날 배움을 얻었으니 남는 장사였다고 생각한다. 그래. 어떤 시점으로 바라보든 바꿀 수 없는 지난 과거라면, 평생 함께 가야 할 것들이라면, 남이 무어라 하던 내게 있어서만큼은 '덕택'으로 기억하련다. 어떻게 해서라도 치울 수 없는 물건이라면, 발판 삼아 찻장에 컵 꺼내는 용도로라도 사용해버리겠다는 그런 심산이다. 






지난날에 일어난 일을, 책장 한편에 두지 못하고, 가장 메인 스토리로 이끌고 나갈 때에는 그 나날이 나의 모든 순간이었다. 매일을 후회와 자책 속에서 살았다. 이별의 단계도 아주 철저히 밟아 봤겠다, 웃플정도로. 옆에서 보던 어느 친구는 사귄 것도 아닌데 뭐 그리 유난이라 하더라. 나는 이성애자이지만, 다 떠나서 소중한 사람이 떠났는데, 슬퍼하는 것에 종류가 있는 게 말이 되냐 싶더라. 그때의 나는 화를 냈던가. 아마 화낼 정신도 없이 슬퍼하느라 바빴던 것 같다. 여념이 없었으려나. 그 후로 나는 내게서 자꾸만 멀어졌다. 문장들을 부지런히 만들어 마음의 공허를 메웠다. 대개 "나는 부담스러운 사람이다.", "사람은 위험하다.", "사랑은 죽음이다." 등의  이제 와서 들으면 터무니없는 그런, 하지만 아직은 여전히 겁을 먹게 되는, 그런 문장들이었다. 그 당시에는 뭐가 그리도 다 사실 같던지, 어리석게도 이들을 내 삶의 철칙이자 원칙으로 여겼다. 



그리곤 나 자신이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을 명분 삼아, 내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부지런히 나만의 시선으로만 바라보았다. 판단 기준 조건은 앞서 말했듯이 단 한 가지였다. 다가오는 저 사람은 무슨 의도인가. 내게 해가 될 사람인가. 그 모든 무너짐의 시작부터 끝을 거행했던 것은 결국 내 안에서 벌어진 일이었는데, 오랜 시간을 돌이킬 수 없는 그때의 상황과 결부시키며 살았다. 이는 눈을 깜박이는 것 마냥 무의식과 의식을 넘나들며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오고 가던 생각들이 보다 선명히 의식되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내 안의 판단자로서 그 모든 기능을 수행하던 이로부터 떨어져 나를 비롯한 타인들에게 무참히 손가락질을 거행하는 행위를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읽히기를 바라면서 정작 나는 그렇지 못한 그 모순을, 그 여러 시간을 지나서야 비로소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더라. 그 모든 판단이 나와 타인을 틈 없이 비틀리기만 한 틀에 가두고 있음 또한. '그 누구에게도 오해받고 싶지 않다'. 그런 나의 이상에서 비롯된 생각이 나를 숨 막히게 만든 원인이었다는 것도. 이러한 생각이 뿌리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게 새겨져 있던 나날의 대다수의 시간 동안 남이 나를 향해 비판하지 못하도록, 그 어떠한 빈틈도 보이지 않으려 기를 쓰고 완벽을 향해 박차를 가하는 데에 모든 에너지를 소모하도록 했다는 것도. 그렇게 나는 내게 있어서 피해자임과 동시에 가해자였음을.



내 안에 수많은 판단자를 만들어두고, 이렇게 행동할 때마다 저마다의 의견을 가지고 나와 저마다의 시선으로 교정하기 일 수였던 것이었다. 이 모든 실상을 깨닫자, 내 눈에서 다른 사람들이 재단되어 가는 것을 가만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결국 끝에 가서는 재단되는 것이 나임을 알았다. 모두에게 손해인 이 행위를 멈추고 싶었다.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곳으로 내 마음을 가꿔가고 싶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면서, 나조차 발을 딛기도 전에 겁에 질려 도망가는 현실을 지속하고 싶지 않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다는 말을 연신 반복하며, 인식된 모든 정보를 판단하는 데에 지쳐갈 즈음 생각했다. 차라리 그 무엇도 볼 수 없고 들을 수도 없으면 좋겠다고. 설령 그렇게 만들어진 곳이 아무것도 닿지 않는 골방이라 하여도, 내 눈에 다른 이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정의되고 결판나는 것을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내가 나에게 그렇게 당하였기에. 그러나 멈출 수 없었다. 이 판단이 왜 시작되는지조차 알지 못했기에, 무엇을 만져야 멈추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렇게 어쩔 수 없다며 회피하기 시작했다. 



나의 모순을 깨닫고도, 나를 향한 타인의 눈짓 혹은 나 자신의 잣대, 소나기 마냥 굵고 무수하게 떨어지는 시간 속에서 오해받지 않는 데에 온 정신을 기울였다. (사실 비를 몰고 온 대다수의 구름들은 결국 내가 떨치지 않으려 한 것들일 것이리라.)  하지만 떨어져 내리는 비를 우산도 없이 무슨 수로 피할 수 있었을까, 발버둥 쳐도 그저 내리면 움푹 젖고 축축해지다 보니, 때론 이해로 걸음해야 할 때에 쓰여야 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더라. 숨을 들이켜고 내쉬는 것도 참은 채, 가만히 있으면 잠깐은 가능할 수 있었으려나. 이러한 날씨는 구태여 타자가 있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만이 있는 세상에서도 예고 없이 들이닥치곤 하였다. 우산을 들고 다녀보기도 했지만, 지칠 대로 지친 몸은 우산을 펼 힘도 없더라. 그럼에도 다음 걸음을 향해 내디뎌야 했기에 그냥 맞았다. 내리는 모든 비를 온몸으로 맞았다. 맞다 보니 장대비같이 느꼈던 모든 것들이 가랑비처럼 느껴지게 되었다. 역시 사람은 적응해 가며 나아가는 건가 하며 그 나날을 누볐다. 내리는 비의 산성에 나의 머리카락이 빠지는 것도 모르는 채, 빗물이 마음에 스며있는 것은 찰나일 뿐이라며 대수롭게 여기지 않은 채. 후에 비가 그치고 해가 뜨는 날에 그 모든 것이 회복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해가 뜬 날에도 비는 내리곤 하였으며, 해가 쨍쨍한 날에 스민 빗물은 마른 마음에 얼룩져 있었다. 여러 날을 해가 번뜩이는 하늘 아래서, 자국이 지워지지 않는다며 애꿎은 주위 사람들을 붙잡고 애를 태웠다. 또한 나 자신을 붙들고 애를 태웠다. 그냥 재가 되자고, 그렇게 있지도 않았던 사람처럼 사라져 버리자고. 그러나 내가 내게 붙인 불씨는 내 곁의 사람들에게도 퍼져 나갔다. 이전에는 나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그 시선들이 주위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말을 들어도 머나먼 이야기라며 넘기곤 하였다. 하지만  그것들이 실로 작용하여 주위 사람들조차 다치게 하고 멀어지게 하는 순간들을 보게 되자, 그제야 허겁지겁 자기 연민으로부터 뛰쳐나왔다. 그리곤 내게 외쳤다. 비껴가는 시선들의 근원은 사실 내가 나를 보는 방식이 각박했기 때문임을 인정해달라고. 더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다고. 있는 그대로를 돌아보며, 돌봐야 한다고. 







돌아본 그 자리에는 어떻게 이곳에서 살았을까 싶을 정도로 발 한 자국 놓일 자리도 없이 구멍이 가득했다. 가끔 마음이 어디론가 떨어진 듯한 느낌을 받는 이유는 이 때문이었으려나. 두리번거리다 쳐다본 너머에 한 발 겨우 디딜 수 있는 자리가 있더라. 그곳에는 어떤 이들이 내게 혹은 나 자신이, 내가 아닌 문장들을 들고 나라고 외치는 문장들을 기어이 집어 들고 와서는 쌓아 두는 나이면서도 내가 아닌 내가 있었다. 이리저리 베인 흉터 투성이인 손을 지닌 나는 그 문장에 서린 날들을 향해 계속해서 나를 내몰았다. 차마 울어지지가 않아, 웃으며 물었다. 너는 정말 저런 사람이냐고. 저게 정녕 네가, 그러니까 내가 맞냐고. 나는 나조차 믿지 않는 시간 속에서 부지런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열심히 믿어달라 애원했지만, 나도 혀를 찰뿐이었다. 그어진 문장들 아래에 무엇이 나의 진심인지 이제는 나조차 모르겠다고 생각하더라. 이 공간에 내가 설 곳이 없는 듯하여,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여쭈었다.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이냐고. 아버지도 나를 그런 사람으로 보시느냐고. 그렇다면 정말 죄송하다고. 아버지는 내게 침묵으로 대답하셨다. 대답하지 않은 그 순간 그 모든 침묵으로 대답하고 있으셨음을. 그 침묵이 무엇인지, 지금은 감히 다 헤아릴 순 없다. 다만, 분명히 알 수 있는 건 그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덧없는 걸음을 늘리려는 노력을 줄이는 게 좋겠다는 것이며 분명 그 모든 것으로 말씀하실 그분을 믿고 그럼에도 계속 여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언젠가 헤아릴 때가 올 것이라는 것 또한, 분명.





그러다 문득, 사람의 오고 감에 있어서 급격히 떨곤 하는 스스로를 알아차리게 되었다. 숨조차 쉬이 오고 가지 않는 영원 같은 잠깐의 순간들은 예고 없이 갑작스레 마주하게 되는 교통사고와도 같았다. 다른 게 있다면, 겉모습은 멀쩡하다는 것일까. 그때서야 깨달았다. 생각보다 지난 나날의 후유증이 예사로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어쩌면 이는 길고 긴 싸움이 되리라는 것을. 동시에 가장 근본의 이야기였다. 예상치 못하게 유발되는 것들이 단순한 해프닝이 아닌, 증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이러한 지각의 통보는 절망스러웠다. 그러나 이내 담대하게 하였다. 이는 문제임과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해결책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판단, 그 기저에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음을.




통증의 이름을 자각하는 동시에 회복은 시작되었다.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고통은 필연적이라는 것을 그저 수용하기로 결심하자, 상대를 가리지 않고 가차 없이 이뤄지던 판단의 잣대가 조금씩 깎여 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쉴 새 없이 잘라내던 그 모든 가시들이 다듬어지기 시작하자, 비로소 가시덩굴에 가리어져 있던 나와 타인들을 보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시작할 수 있게 되어갔다. 있는 그대로, 그렇게 점차, 그리고 고스란히. 



이전에는 모습들 그 자체를 보기 위해, 매번 무수한 걸음들을 헤매었고 그럼에도 결국 바라던 그 무엇에도 닿지 못할뿐더러, 이상한 곳에 이르러 있곤 하였다.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 가려 걸음을 돌리려 했지만, 사방에는 가시만 가득해서 어느 곳이 돌아가야 할 길인지 알 수 없었고, 그렇게 돌이켜 걸을 힘조차 남아있지 않곤 하였다. 근데 이렇게 가만히 서 있어도 고스란히 닿을 수 있는 시선이라니. 그동안 무엇을 했던 것인가 하며 허탈해하는 것도 잠시, 서둘러 채비를 했다. 있는 그대로의 그 모든 것을 이해하는, 그 여정을 떠나고 파서. 그토록 닿고 싶던 것들에 온전히 닿고 싶어서. 



나의 시선이 다른 그 모든 상대방들을 향해, 한 치의 오해도 하지 않았다면 그건 결단코 사실이 될 수 없을 것이리라. 분명 나도 다른 사람들을 오해했던 역사가 유구하다 못해 패일대로 파여 그 사이로 바람이 쉼 없이 몰아치곤 하였으니. 의도적으로 오해하려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오해하고 있었던 시간도 수두룩할 것이었다. 그렇기에 어쩌면 오해는 결국 나일 수밖에 없는 나들의 사이에서 자연스러운 게 아닐까라는 체념 아닌 체념을 해본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힘을 빼는 연습을 하게 되는 것 같다. 구태여 자연스러운 흐름을 애써 바꾸려 하기보다, 그 자리에 서서 나의 심지를 굳히는 데에 보다 더 열심을 기울여 보자는 것이다. 이제 내 삶에 있어서 오해받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자는 것이다. 또한 되려 감사하자고, 수많은 오해 가운데에 그럼에도 이해하기 위해 힘쓰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지닐 수 있음에, 이를 통해 오해 받음이 얼마나 가슴 아픈지 아주 조금은 더 공감할 수 있음에. 또한 나도 그들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자고. 어떤 이는 그러한 우리들을 보고, 또 우리와 함께 걸으려 하지 않겠는가 라는 소망을 조심스레 품고서 말이다. 삶 속에서 등장하는 나를 향한 판단들 사이에서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실조차 들어가기 힘든 구멍으로 나를 내모는 것이 아니라, 그냥 딱 두 걸음씩만 걷자고. 오해받지 않기 위해, 이해받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게 아니라, 그냥 이해하기 위한 걸음들을 딛기 위해 노력하자고. 나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그렇게, 이해만 건네자고. 이해할 수 없다면 이해하게 해 주시라고, 설령 똑같은 일을 함께 겪을 지라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시라고. 사랑할 힘을 구하며 나아가자고. 마음에 슬픔이 아닌 사랑을 남기기 위해 노력하자고. 그렇게 마음 가운데에 이해만 남기자고 생각하게 되는 요즘이다.







물론, 오해하지 않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안다 하여. 나 또한 다른 사람들을 마음 편히 오해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그동안 나만을 생각하며 오해받지 않기 위해 온 정신을 쏟곤 하였던 것들을 돌이켜 조금이라도 이해에 힘을 보태고 싶다는 마음이다. 나를 향해 두 걸음, 타인을 향해 두 걸음 그렇게 걸음 하여도 심지어 한 걸음이 남으니. 할 수 있다면 더 머나먼 곳에 있는 타인에게도 한 걸음을 건네 보자고 조심히 다짐해 보게 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 또한 내가 사랑해보자고. 이해해보자고. 그 오해 받음에 속상해하기보다 그들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한 번이라도 더 헤아려보려, 그렇게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 노력해 보자고. 그렇게 미움 가운데에 사랑을 가득 부어, 사랑만을 채우자고.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은 결국 나를 병들게 할 터이니. 그저 사랑만 남길 수 있는 힘을 주시라고, 간절히 소망하는 바이다.




아직 이러한 되뇜은 쥐어진 두 손의 다짐으로 맺혀 있을 뿐, 그 손을 펼쳐 쓰다듬는 마음으로 나아가는 게 힘이 드는 나를 본다. 이해하려는 마음 이전에 곡해받는 마음이 튀어나와, 그러한 행동들의 부당성에 대해 소리치고 싶어 진다. 그때마다 나는 내가 미처 헤아리지 못한 나날들에, 그럼에도 나를 이해해주었던 고마움들을 부지런히 떠올려 다독인다. 나도 많은 헤아림이 있었기에, 그나마 살아서 지금에 있는 것이라고. 아픔으로 남은 생각들은 결국 서로를 병들게 할 뿐이라고. 나의 아픔을 고집하기만 해서는 그 무엇도 나아질 수 없을뿐더러, 독을 품을수록 곪아가는 건 나일 것이라며. 나의 아픔은 잠시 내려두고, 이해받고 싶은 마음들도 내려두고, 이해하기 위해 힘을 내어 걸음 하자고. 그렇게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길을 걷자고. 내가 사랑이라 생각하는 길을 걷자고. 나조차 의심하는 그 모든 시간이라 할지언정, 부지런히 고개를 올려 하늘을 바라보며 아버지께 여쭈며 그가 이끄시는 길을 따라 걷자고. 아주 작은 티끌만큼의 사랑만을 지닌 오늘의 나라 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걸어내다 보면 언젠가 더 많은 이들과 나눌 수 있는 사랑을 지니게 될 수 있으리라는 것을, 그렇게 채우시리라는 것만큼은, 그 신념만큼은 잃지 않고 걸어 내자고. 언젠가 그 모든 때에 이 모든 시간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그분을 기대하면서, 그렇게.





이해하겠다는 마음은, 그런 마음인 것이다. 

그저 착한 사람이 되겠다는 게 아니다.

이해하지 못하면, 결국 닮고 말게 될 것이니.

닮다가 닳지 않기 위해서라도, 기어이 이해해내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로서, 나답게 살아가겠다는 마음이다.


또한

다가오는 말들에 그저 나를 내맡기기보다

나를 지으신 이의 시선 안에서 바라보겠다는 것이다. 


애초에 다물어지지 않을 입들이라면, 

애꿎은 힘을 들이며 주위 사람들을 힘 들이게 하기보다,

그저 주가 주신 나의 길을 여쭈며 한 발 한 발 딛는 데에 집중하겠다는 말이다. 


그런 쪽에 관심을 기울이기엔, 소중함들을 향해 고마움을 전할 시간도 부족하기에. 

나의 부족함을 보다 더 성장시켜, 보다 더 좋은 것들을 나누기에도 시간이 없기에.



언젠가. 아주 언젠가. 이 무수한 빗금들을 지나치다 보면, 무수하게 쌓인 것들 위로 하여금 새롭게 더해지는 빗금들에 보다 덜 걸음 할 수 있을 것이다. 구태여 빗금들을 향해 귀 기울이지 않고, 어떻게 하면 나는 그 누구에게도 나에게도 빗금을 건네지 않을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그어진 빗금들을 가만히 쓰다듬어 줄 수 있을지, 이 고민들을 고심하며 이에 열중하는 데에 보다 심혈을 기울이자. 이렇게 노력하다 보면 지금 당장은 그럴 수 없을지라도, 알맞은 때에 나의 아픔만을 보는 것이 아닌 아파하는 사람들을 향해 함께  더 많은 걸음을 나눌 수 있으리라. 빗금들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을지언정, 때로는 그저 그렇구나 하고 끄덕여 줄 여유도 가질 수 있게 되리라. 당장은 그 언제가 보이지 않는다 하여 주저앉곤 하더라도, 쉬이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새벽의 끝으로 걸음 하리라.



 왜 남한테 장단을 맞추려고 하나. 북 치고 장구치고 니 하고 싶은 대로 치다 보면, 그 장단에 맞추고 싶은 사람들이 와서 춤추는 거여. 

- 박막례 할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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