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등 기관사 멜 스미스를 만나다
뉴욕주의 면적이 전 세계 도시 가운데 가장 크다는 말은 들었지만 딱히 실감할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메러디스 빅토리호 3등 선박 기관사 멜 스미스와 만나기 위해 주소를 검색하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분명 뉴욕주에 살고 있다고 했는데 뉴욕 한복판에 있는 우리 숙소에서 그의 집까지는 3시간이 걸린다는 안내멘트가 나왔다. 놀란 표정을 하자 옆에 있던 현지 코디는 "뉴욕에서 그 정도 걸리는 건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사실 메러디스 빅토리호 수송작전에 대한 취재를 준비하면서 가장 궁금했던 건 '어떻게 60인승의 화물선에 1만4천 명의 피난민을 태웠을까'였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출발부터 항해 전 과정을 함께 한 멜 스미스라면 그 궁금증을 해소시켜 줄지도 몰랐다. 3시간 거리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침 8시 서둘러 멜 스미스의 집으로 향했다. 3시간을 달리자 뉴욕과는 너무 다른 풍경이 이어졌다. 사방이 숲과 나무와 호수로 둘러싸인 고즈넉한 시골 마을이 눈앞에 나타났다. 빌딩 숲인 뉴욕 맨해튼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그리고 집 입구에 도착하자 인심 좋은 할아버지의 얼굴을 한 멜 스미스가 반갑게 우리를 맞아주었다.
나는 백신을 두 차례 다 맞았어요. 걱정하지 말고 들어오세요.
큰 키에 구부정한 어깨의 90대 미국 노인이 71년 전 흥남부두에 있었다는 사실은 잘 연결이 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는 내 생일이었어요. 생일을 그런 식으로 맞이하다니...
21번째의 생일을 맞던 그 날을 절대 잊지 못할 겁니다.
멜 스미스는 킹스 포인트 상선 학교에서 3등 선박기관사 자격증을 가지고 졸업을 한 뒤 바로 취업했다. 그가 생애 처음 오른 배는 바로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였다.
때는 1950년,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한 배는 일본을 거쳐 대한민국으로 향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과 계약을 맺고 군용 물자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은 화물선이었다. 일본에 도착한 메러디스 빅토리호에게 맡겨진 임무는 북한 지역에서 전투 중인 미군에게 전달할 기름을 싣고 함경남도 흥남항으로 가는 것이었다. 당시 배의 선원들은 대부분 20대 초중반, 선장은 겨우 30대 중반의 젊은이였다.
12월 매서운 겨울바람을 헤치며 그들이 흥남부두에 닿았을 때 전쟁 상황은 예사롭지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유엔군은 갑자기 한국 전쟁에 끼어든 대규모의 중공군에 밀리고 있었고, 작전상 후퇴를 결정한 유엔군이 선택한 흥남철수작전은 거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그런데 1950년 12월 22일, 흥남항에 닻을 내리자마자 군인들이 배에 올라타더니 미스터리한 주문을 했다. 화물선인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피난민들을 태울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멜 스미스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그냥 화물선이었어요. 짐을 싣는 화물선이었죠. 일반 승객은 없었습니다. 선실에 더 탈 수 있는 인원은 12명에 불과했습니다. 나머지는 전부 짐 칸이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선장을 향했다. 군은 거듭 명령이 아니니 선장이 판단하라고 했다. 배가 항구로 접근하다가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피난민을 태울지, 태우지 않고 남쪽으로 향할지 결정권은 오로지 선장에게 있었다.
앞서 만났던 2등 항해사 로버트 러니 역시 라루 선장의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그는 월셔 방송에 나와 "라루 선장은 한시도 망설이지 않고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했다"며 "그것은 (군의) 명령이 아니었다"고 이야기했다. 멜 스미스는 긴박했던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피난민을 싣기 위해서는 항구 가까이 접근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바다밑이 기뢰밭… 가장 큰 기뢰밭 중 하나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조심조심 항구로 접근했습니다.
배가 항구로 접근하자 피난민들이 배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화물선이었던 만큼 승객을 태울 방편이 마련돼 있지 않았다. 그들이 생각해 낸 방법은 사람을 화물과 같은 방법으로 싣는 것이었다.
배에는 짐을 싣는 크레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위에 사람이 탈 수는 없었죠. 우리는 임시로 나무판자로 플랫폼 같은 걸 만들었습니다. 그 위에 사람이 타면 크레인으로 들어올렸죠. 한 그물에 15명 정도가 탔던 것 같습니다.그들을 화물칸에 내려놓았죠.
화물칸은 그 많은 피난민을 싣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화물칸 외에는 그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어디에도 없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에는 총 5칸의 화물칸이 있었다.
1칸의 화물칸은 철판으로 2칸, 혹은 3칸으로 또 나눌 수 있도록 설계 돼 있었다. 선원들은 사람들을 더 많이 태우기 위해 화물칸을 나누는 방법을 택했다. 철판으로 막자, 13칸 정도의 공간이 마련됐다.
1950년 12월 23일 오후 5시, 드디어 피난민 싣는 작업이 시작됐다. 더 많은 피난민을 싣기 위해 화물칸의 바깥쪽부터 사람들로 채워가기 시작했다. 작업은 밤새 이어졌다.
미국에 가기 전, 한국에서 만났던 올해 80세의 양승권씨 역시 멜 스미스와 비슷한 증언을 했다. 그는 당시 부모님과 함께 배에 올랐다.
" (12월) 23일 날 정오 정도였던 거 같아요. 이제 배에 타라고 해서 화물선에 막 타기 시작했는데 그때 배에 승선할 때 물자를 싣는 화물선이니까 (사람을 올릴만한) 엘리베이터나 그런 게 없죠 . 지금 말로 하면 로프로 짠 큰 광주리 같은 게 있어요. 거기에 사람이 모두 들어가서 앉는 거예요. 그래서 (배 바닥에) 쭉 내려서 제일 밑에는 남자들(이 타고) 그 다음 2층에는 여자들, 아이들(이 타는) 그런 구조로 돼 있었어요.
다음날 오전 11시가 되자 배 안의 모든 화물칸, 심지어 갑판 위까지 피난민들로 가득 찼다. 더 이상 피난민을 태울 공간은 없었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배 위에는 피난민을 위해 준비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살을 에는 칼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이었다. 난방시설은 고사하고 화장실조차 없어 몇 개의 드럼통을 피난민 사이에 두었다. 무엇보다 식량이 문제였다. 멜 스미스는 당시를 회상하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우리에게도 식량이 부족했습니다. 겨우 선원 48명의 식량만 약간 남아 있었습니다. 이 식량을 피난민들에게 나눠줄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10명에게 식량을 나눠주면, 나머지 만 명의 사람들이 어떻겠습니까.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죠. 그래서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나에게 캔디바라도 있었더라면 아이들에게라도 나눠줬을 텐데, 우리에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70년이 지난 일을 회고하며 멜 스미스의 목소리가 낮게 잠겼다. 그들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한 것이 평생 사무친 듯 회한에 찬 목소리여서 옆에서 그의 이야기를 듣는 우리도 함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 이후로도 오랫동안 배를 탔다는 멜 스미스는 그 후 라루 선장과 같은 선장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선장치고는 참 조용한 사람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선장들은 시끄럽고 욕을 입에 달고 살았죠. 라루 선장과 함께 있을 때 선원들도 욕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후에는 그런 선장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피난민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에 가슴 아파했습니다. 단지 피난민들이 죽지 않고 살아남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는 배 위에서도 매우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피난민을 싣는 작업은 12월 22일 밤에 시작돼 23일 정오무렵까지 계속됐다. 거의 피난민을 배에 태웠을 무렵 중공군의 대포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갑판에 사람들이 다 차고 더 이상 사람들을 실을 수 가 없을 때… '자 이제 그만합시다' 라고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항구에 사람들을 얼마나 두고 왔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거의 다 태우고 떠난 것 같습니다.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배에 탄 피난민은 물론, 승무원들 모두 배가 출발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멜 스미스는 빗발치는 포탄의 한 가운데서 그렇게 21번째 생일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