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두모악 김영갑 갤러리
오전 9시 30분, 다행히 주차장에는 차가 한 대도 없었다. 우리가 가장 먼저 온 모양이었다. 제주 중산간 성산읍 삼달로에 있는 김영갑 갤러리는 사람 없는 시간, 조용히 둘러보아야 제맛이다. 차를 세우고 주차장 옆으로 난 갤러리 두모악 입구로 익숙하게 들어섰다. 늦가을의 아름다운 풍경화 한 폭이 거기, 갤러리 정원 가득 펼쳐져 있었다. 오랫동안 분교 운동장이었다가 지금은 갤러리가 된 정원에는 황갈색 낙엽이 카펫처럼 깔려 있었다. 단풍나무는 떠나는 가을이 선물해 준 화려한 붉은 가을 코트를 아직 걸친 채 불타 오르고 있었다. 감나무는 앙상한 가지마다 주홍빛 감을 매달고 있었다. 도시에서는 이미 자취를 감춰버린 가을 정취가 이곳에는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김영갑 갤러리는 사진작가 김영갑의 마지막 작품이다. 루게릭병이 점점 깊어져 더 이상 카메라를 들 수 없었을 때, 하루하루 굳어가는 근육을 막기 위해 직접 손을 움직여 꽃과 나무를 심고 돌담을 쌓아 올려 만든 곳이
바로 이곳이다. 그가 카메라에 담은 무수한 제주의 풍경처럼, 그의 마지막 작품은 계절마다 다른 옷을 입고 오는 이들을 맞이한다. 여러 계절 이곳을 방문해 봤지만 정원은 지금 이 계절이 가장 아름다운 듯하다.
갤러리에는 그의 영혼이 오롯이 담긴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 전시회를 두고 용눈이 사진을 봤어요. 용눈이 오름 사진을 천 여점을 찍었는데 그래도 골라내기가 부족하게 느껴졌어요.”
갤러리 안 다큐멘터리 영상 속에서 병색이 짙은 그가 전시회를 준비하던 당시를 회고하며 말한다. 용눈이 오름 사진을 천 여 점이나 찍었는데도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고르기에 부족했다는 작가, 그는 대체 얼마나 많은 용눈이 오름의 풍경을 눈에 담았길래 천여 장의 사진으로도 담지 못한 아쉬운 모습이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
김영갑의 제주 오름 사진을 보면 자연이 만들어낸 곡선이 이렇게 부드럽고 아름답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여행이랍시고 차를 몰고 휙휙 돌아다녀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제주 풀 샷의 아름다움이 그의 사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언젠가 그의 사진 전시회에 온 제주 도민이 물었다고 한다.
“여기가 진짜 제주 맞아요?”
제주 사람도 알지 못하는 제주의 속살을 카메라에 담아온 작가, 제주의 햇살과 바람, 시간이 어울려 찰나의 아름다움을 연출하는 순간, 그는 바로 그 찰나의 순간에 ‘삽시간의 황홀’을 느낀다고 했다.
“ 내가 사진에 붙잡아 두려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있는 그대로의 풍경이 아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들판의 빛과 바람, 구름, 비, 안개이다. 최고로 황홀한 순간은 순간에 사라지고 만다. 삽시간의 황홀이다.” -김영갑 저서 <그 섬에 내가 있었네> 중
‘삽시간의 황홀’, 그 순간을 담기 위해 그는 얼마나 오랜 시간 한 풍경을 보며 기다렸을까? 그의 사진은 기다림의 기록이다. 제주의 빛과 바람, 공기가 어우러져 찰나의 아름다움을 연출하는 순간을 낚아챈 기록이 그의 사진이다. ‘아름다움은 발견한 자의 것이다’고 말한 김영갑 작가, 그가 자연이 그리는 그 찰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위해 치른 혹독한 댓가들을 생각하면 범인의 상식으로는 잘 이해되지 않는 면도 있다.
제주도로 관광객이 물밀듯이 밀려들기 전인 1980년대, 그는 서울을 떠나 제주에 정착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도시에서 온 낯선 청년에게 당시 제주는 참 야박했다. 고단한 몸 누일 방 한 칸 얻기 쉽지 않았다. 사정사정 끝에 남의 집 재래식 부엌을 얻어 흙바닥에 장판을 깔고 곤로에 밥을 해 먹으며 버티던 시절도 있었다, 카메라를 메고 시도 때도 없이 들녘을 오가다가 빨갱이로 신고돼 경찰에 끌려간 일도 다반사였다. 빈 속을 채울 따뜻한 우유 한 잔 사 먹을 돈이 없을 정도로 가난해 밭의 당근과 고구마를 뽑아 먹으며 허기를 채웠다.
“ 우유 한잔 마실 여유는 없지만 필름과 인화지만큼은 늘 여유가 있어야 한다. 양식이 떨어지는 것은 덤덤하게 넘길 수 있어도 필름과 인화지가 떨어지면 두렵다. 끼니를 때우지 못하는 괴로움은 작업하며 견딜 수 있지만 필름이 없어 작업하지 못하는 서글픔만은 참지 못한다. - 김영갑 <그 섬에 내가 있었네> 중
봉쇄 수도원에 스스로를 가두고 영혼의 길을 찾는 수도사처럼 뭍에서의 모든 인연을 끊고, 오로지 제주의 사진에만 몰입한 삶, 제주에 사로잡히지 않고는 설명되지 않는 삶이다.
그러나 인생은 때때로 얼마나 가혹한지, 그가 더 이상 필름 값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졌을 무렵 병이 그를 찾아왔다. 손과 발이 마비되고, 서서히 온몸의 근육이 마비돼 죽조차 삼킬 수 없게 되는 루게릭 병이었다. 더 이상 카메라를 들 수 없었고 죽음을 준비해야 할 때 그가 가장 염려한 것은 사과 박스마다 담긴 그의 필름들이었다. 그는 폐교된 지 5년이 지난 분교를 어렵게 임대해 갤러리로 꾸미기 시작한다. 직접 구상을 하고 교실을 갤러리로 만들고 운동장을 정원으로 하나씩 하나씩 바꾸어 갔다. 갤러리 두모악은 그렇게 탄생했다.
갤러리 뒤편 무인 카페에 앉아 직접 내린 커피를 한잔 마셨다. 넓은 유리창 밖 큰 나무 사이로 삽상한 가을바람이 지나가고 있었다. 육지에서부터 안고 온 모든 시름들이 바람에 씻겨가는 듯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의 지독한 가난과 고집이 만든 공간에서 느끼는 한없는 평안과 위로를 생각하면 ‘인생은 아이러니’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엇박자 인생의 오묘함을 우리가 가진 논거로 설명할 수 없을 때 ‘아이러니’라는 한 단어의 무게가 절묘하게 다가온다.
“때가 되면 떠날 것이고
나머지는 남아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철들면 죽는 게 인생 여한 없다.
원 없이 사진 찍었고 남김없이 치열하게 살았다.”
사진 작업에 치열하게 몰입했던 그는 48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어쩌면 떠났다는 표현은 맞지 않을지 모른다. 그는 그가 직접 가꾼 갤러리 마당 감나무 아래에 잠들어 영원히 이 갤러리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늦었지만 이제야 그를 사로잡았던 제주의 ‘삽시간의 황홀’에 매료된 사람들이 줄이어 갤러리를 찾는다. 그중의 한 사람이 된 나도 제주에 오면 루틴처럼 이곳을 찾아 그가 포착한 ‘삽시간의 황홀’의 순간들을 넋 놓고 바라보며 감동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