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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작가 Oct 16. 2023

마들렌

         

언제부터인가 스크래치나 얼룩이 보이면 견딜 수 없었다. 그때마다 곧장 페인트를 주문해 셀프페인팅을 했다. 흰색도 여러 종류가 있어 매번 다른 걸 칠했는데, 미묘하게 다른 흰색이 벽면에 칠해질 때마다 나름의 기분전환이 되었다. 이번에는 스노화이트를 주문해 봤다. 페인트 뚜껑을 조심스레 열었다. 자칫하다가는 페인트가 넘쳐 거실 바닥을 엉망으로 만들 것 같았다. 페인트 통 안으로 교반봉을 넣고 신중하게 휘저은 후, 페인트를 팔레트에 부었다. 팔레트에 롤러를 대고 천천히 문질렀다. 둥근 몸통 구석구석 하얀 페인트가 묻을 때까지 여러 번, 섬세한 손동작이었다. 마침내 롤러를 들어 올려 미세한 스크래치가 난 부분에 대고 문질렀다. 이번에는 거침없는 손길이었다. 롤러가 지나간 자리에는 새하얀 페인트가 덮였다.

“또 칠해? 얼마 전에도 칠했던 것 같은데.”

남편이었다.

“스크래치가 생겼길래.”

나는 시선을 그대로 벽에 둔 채 말했다.

“어디? 보이지도 않던데. 이왕 칠할 거면 다른 색으로 해보지?”

모르면 말이나 말지. 대답 없이 페인트칠에 집중했다. 아침부터 기분 상하고 싶지도, 상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남편이 식탁에 차려놓은 아침밥을 먹기 시작했는지 수저가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페인트 냄새를 내보내기 위해 열어 놓은 창문 밖에서는 자동차 바퀴가 아스팔트 바닥에 마찰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집 안에서는 롤러를 문지르는 소리, 그릇 소리만 났다.

벽면을 다 칠할 때쯤, 나갈 준비를 마친 남편과 선아가 다녀오겠다고 했다. 두 사람은 내 대답은 필요 없이 현관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갔다. 나도 서둘러 페인트칠을 마무리하고 배드민턴 채를 챙겨 집을 나섰다. 시간이 이렇게 된 줄도 모르고 페인트칠에만 열중하다 보니 운동 시간에 간당간당했다. 오늘은 외벽이 거슬려도 그냥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수련관 출입문을 그냥 통과하지 못하고 멈춰 섰다. 출입문 옆 외벽에 페인트칠이 벗겨진 곳이 매번 거슬렸다. 페인트가 벗겨진 그 부위를 볼 때면 마치 헐벗긴 여자의 몸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낯 뜨거운 맨살을 드러낸 외벽에는 언뜻 까만 머리카락처럼 보이는 균열이 있었다. 우두커니 서서 헐벗은 벽면을 보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대로 뒀다가는 결국 건물 전체가 무너져버릴 것만 같았다. 데스크 직원에게 건물 외벽 도색은 언제 할 건지 물었다. 여직원은 매번 귀찮게 왜 그런 걸 묻냐는 듯 뚱한 표정으로 네? 라고 되물었다.

2층 체육관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은 이미 파트너와 배드민턴을 치고 있었다. 윤주 엄마에게 늦어서 미안하다며 양손을 모아 보였다. 윤주 엄마는 내가 코트 안에 자리를 잡고 서자마자 손에 쥐고 있던 셔틀콕을 허공에 띄운 후 힘차게 채를 휘둘러 나에게 패스했다.     

운동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는데 수련관 건물 앞 벤치는 만석이었다. 건물을 둘러싼 수십 그루의 벚꽃 나무는 봄이 되면 핑크빛 무드로 착시를 일으켰고, 2주가 채 안 되는 이때만큼은 이곳이 꽃구경 나온 동네 사람들로 북적였다.

“너무 예쁘다. 그렇죠?”

옷을 갈아입고 나온 윤주 엄마가 여느 때처럼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릴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꽃이 요샌 왜 이렇게 눈에 들어오는지 모르겠다고 하자 윤주 엄마가 자기도 그렇다면서,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꽃은 관심도 없었는데 세월이 흐르긴 흐른 모양이라고 했다. 윤주네 모녀는 윤주 엄마가 남편과 이혼하면서 우리 윗집인 친정으로 이사했고,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던 윤주와 선아가 같은 반이 되면서부터 가깝게 지냈다. 윤주네 모녀는 말수가 적은 편인 우리 모녀가 묻지도 않은 걸 떠들어 대며 살갑게 다가왔고 덕분에 금세 가까워졌다. 윤주 엄마의 솔직함에 나는 매번 놀랐지만, 그게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미세먼지 없이 맑은 하늘 아래 부드러운 봄바람이 불어와 얼굴에 닿았고, 연분홍색 벚꽃 눈이 온 사방에 흩날렸다. 평소와 같은 그런 날이었고, 특별할 게 없었는데 벚꽃을 보고 있자니 콧잔등이 간질간질한 게, 마음이 허공에 둥둥 뜨는 느낌이었다. 엉겁결에 내뱉은 한숨에 윤주 엄마가 걱정할 게 없는데 웬 한숨이냐고 했다. 공부 잘하는 효녀에 돈 잘 버는 의사 남편이 있으니 얼마나 좋냐는 것이었다. 윤주 엄마의 말에 ‘빛 좋은 개살구’가 딱 나한테 맞는 말이 아닐까 생각했다. 10년 전에 개업한 남편의 ‘아름다운 피부과’는 자리 잡기 시작할 때쯤 코로나가 터졌고, 지난 몇 년간 빚만 늘다가 올해 들어 조금 갚아나가기 시작했다. 돈 많이 벌면 호강시켜 주겠다고 했는데, 그 호강은 대체 언제 누릴 수 있는 건지. 윤주 엄마에게 이런 구차한 이야기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벤치에 자리가 나자 윤주 엄마가 재빨리 자리 잡고 앉더니 내 손을 잡아끌었다. 평소에는 운동을 마치자마자 서둘러 출근하더니 오늘따라 여유를 부렸다.

“우리 엄마는 이혼하고 혼자 나 키우느라 고생하면서도 나름 잘 살아왔어요. 엄마를 보면서 나도 이혼이라는 게 겁나지 않았어요.”

윤주 엄마가 묻지도 않은 걸 말할 때는 매번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됐다. 오다가다 마주친 윤주 외할머니는 볼 때마다 환하게 웃는 얼굴이었고, 여유롭고 건강해 보였기에 놀랍기는 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스러워 머릿속으로만 맴도는 말을 내뱉지 못하고 있는데 윤주 엄마가 부탁할 일이 있다고 했다. 최근 들어 치매기가 생긴 친정엄마가 어제는 숫자가 다섯 개 밖에 안되는 도어록 번호를 기억하지 못해 몇 시간 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했다. 퇴근하고 들어오면서 현관 앞에 쪼그리고 앉은 채 잠든 엄마의 모습을 봤을 때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는 말을 하면서는 눈물까지 글썽였다.

“위급할 때는 아래층 선아 엄마한테 가라고 했어요. 괜찮죠?”

나는 윤주 엄마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끄덕였다.

위급이라는 단어가 주는 위태롭고 급한 느낌을 경험한 적이 있다. 선아가 돌 되기 전이었을 거다. 잘 놀던 아이가 갑자기 자지러지게 울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더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 힘들게 몸을 움직여 ‘보호자’인 남편에게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다. 선아를 들쳐 안고 집 앞 병원으로 달려갔는데 다행히 팔이 빠진 것이었다. 울다 지쳐 잠든 아이를 안고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눕히는데 그제야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진료 중이었다는 남편의 태평한 말에 위급할 때 연락도 안 되는 게 무슨 가족이냐고 소리를 질렀고, 그 바람에 잠들었던 선아가 깼고, 우는 아이를 달래다가 나도 덩달아 울음이 터졌다. 그날 이후로 남편이 진료 중이었다는 말로 뒤늦게 연락해 와도 흥분하지 않았다. 지금껏 남편은 진료 중이었다는 말이 면죄부라도 되는 줄 안다.

윤주 엄마는 내가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하자 고맙다고 하더니 덥석 내 손까지 잡았다. 지하철역 앞까지 나란히 걸어오는 동안에도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 언제 눈물을 보였냐는 듯 씩씩하게 손을 흔들고 지하철역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윤주 엄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겨 마트로 갔다.     

저녁 반찬거리와 케이크를 사서 계산하는데 윤주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친정엄마와 연락이 안 된다고, 집으로 올라가 볼 수 있느냐는 말에 그러겠다고 했다. 통화종료 버튼을 누르려다가, 별일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왼손에는 반찬거리가 든 에코백을, 오른손에는 케이크 상자를 들고뛰려니 몸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 급한 마음에 다리를 빠르게 움직여 봐도 내 걸음은 경쾌해 보이지도 씩씩해 보이지도 않았다. 애꿎게 케이크만 상자 속에서 묵직하게 부딪히는 느낌이 났지만, 당장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마침내 아파트 1층에 도착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데 핸드폰 벨이 울렸다. 에코백을 바닥에 내려놓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핸드폰 화면에 뜬 발신자 ‘윤주 엄마’를 보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더니 이내 조여 오는 느낌이 들었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친정엄마와 연락됐다는 말에 왠지 울컥해서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다행이라고 하고는 통화를 마쳤다. 급하게 뛰어온 탓인지 힘이 풀려 버린 다리에 가까스로 힘을 주고 에코백을 들어 올리려는데 메시지 수신음이 울렸다. ‘아름다운 피부과’에서 생일 축하한다는 메시지가 온 것이었다. 핸드폰을 그대로 주머니에 넣었다가 다시 꺼내 메시지 창을 띄워놓고 잠시 고민했다. 남편에게 늦냐고 메시지를 보내고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현관문을 열자 페인트 냄새가 났다. 냄새가 없다는 친환경 페인트를 써도 며칠은 창문을 열고 열심히 환기를 시켜 줘야 했다. 양손에 들고 있던 짐을 내려 두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신혼집에 입주하는 날도 페인트 냄새가 심했다. 선아를 임신 중이었는데, 페인트 냄새에 입덧이 심해져 얼마나 고생했던지. 그때 생각이 나자 먹은 것도 없는 빈속에 신물이 넘어왔다. 남편을 만난 건 대학 때였다. 본과 졸업을 앞두고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고, 겨우 졸업만 하고 내조와 육아에 전념해 왔다. 남편이 원했고, 나도 동의했다. 사람들은 이런 내 선택을 안타까워했고, 그래서 다시 생각해 보라고 말리기도 했지만, 마땅히 선아를 맡길 데가 없었다. 선아가 좀 크면 바로 커리어를 이어갈 텐데 뭐가 그렇게까지 안타까운 건지 당시의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선아가 초등학교에만 가면, 중학교에만 들어가면 하다 보니 금세 이 나이가 될 거라는 걸,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요즘 나의 일상은 비슷하게 반복됐고, 그날이 그날 같았다. 남편과 딸이 각자 병원과 학교로 가면 배드민턴 채를 들고 나도 밖으로 나갔다. 운동을 마치고 집에 오면 대체로 청소를 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청소를 열심히 한 건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먼지 한 톨 없는 바닥에 매일 청소기를 돌렸다. 청소기를 돌린 후 하루는 베란다 청소를, 다음 날에는 화장실을 청소했다. 그다음 날에는 주방 선반이나 싱크대를 닦았고, 그다음 날에는 옷장을 뒤집어 정리했다.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여야 잡생각도 안 났고, 빨리 시간이 소모됐다.

두 달에 한 번쯤은 친구들을 만났다. 고등학교 때 친했던 여섯 명 중에 지금껏 모이는 건 결혼한 세 명뿐이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다 보니 화제가 아이 중심으로 이어졌다. 아직 미혼인 애들은 걔들끼리 말이 더 잘 통하는 듯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우리 셋이서만 만나게 되었다. 세 명 중에서 나만 빼고 다들 결혼을 늦게 해 아이가 유치원에 다니거나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도 분리불안이 있다는 이야기에서부터 남편이 유치하게 옆에서 자겠다고 아이랑 싸우다가 아이를 울렸다는 이야기까지, 화제는 달라졌지만 만날 때마다 고등학교 그 시절 소녀처럼 재잘재잘 수다를 떨었다. 쉴 틈 없이 떠들다가 누가 나에게 어떻게 지내냐고 발언권을 넘길 때면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우리 가족은 대화가 거의 없고, 이렇게 된 지 좀 됐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끝내 뱉어내지 못했다. 내 대답을 기다리는 친구들의 눈빛에 잠시 망설이다가 애가 크고, 결혼 20주년에 가까워지면 서로 떨어져 있는 게 편하다며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다들 농담이려니 한 건지 나를 따라 웃고는 화제를 돌려 대화를 이어갔다. 끝내 입 밖으로 뱉어내지 못한 말이 목에 걸린 채 거슬렸고, 친구들의 대화 속에 나의 헛기침 소리가 겉돌았다.     

장 봐 온 것을 정리하고 싱크대와 가스레인지를 닦았다. 수시로 닦는데도 어쩜 이렇게 매번 지워내야 할 얼룩이 보이는 건지. 수세미에 세지를 묻힌 후, 얼룩에 대고 문질렀다. 어쩌다가 같이 저녁을 먹던 날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왜 이렇게 맥없는 얼굴이냐고, 청소 좀 그만하고 잘 챙겨 먹기나 하라고 했던 남편의 말이 떠오르자 절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온 힘을 쏟아 수세미를 문질러 대자 금세 얼룩이 사라졌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오후 네 시, 곧 선아가 하교할 시간이었다. 학원 가기 전에 간식으로 뭘 해줄까 고민하는데 어릴 때 자주 가던 집 근처 분식집에서 파는 떡볶이가 먹고 싶다고 했던 선아의 말이 떠올랐다. 지금 나가면 선아가 도착할 시간에 맞춰 사 올 수 있을 것이다. 서둘러 주방 청소를 마치고 집을 나서는데 현기증이 났다. 그러고 보니 종일 먹은 게 없었다.

무심코 걷는데 바람이 부드럽게 볼을 스치더니 콧속으로 들어왔다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가슴에 뭉클한 게 차올랐다포장된 떡볶이를 받아 들고는 올 때보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 집으로 향했다. 선아가 집에 도착할 시간에 가까웠다. 걸을 때마다 바닥에 깔린 꽃잎이 허공에 휘날리며 발걸음을 감쌌다. 선아처럼 떡볶이를 좋아하던 나이에 친구들이 연분홍 눈송이를 맞으며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줬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즈음에 좋아하던 선배 오빠에게서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한마디로 얼마나 기뻤던지. 몸을 바쁘게 움직이면 안 그러더니, 오늘따라 자꾸만 잡생각이 들었다.

포장해 온 떡볶이와 어묵을 그릇에 옮겨 담고 식탁에 놓았다. 선아가 도착할 시간이 지났는데도 오지 않았다. 전화를 거니 친구와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먹고 있다고, 곧장 학원으로 가겠다고 했다. 짜증 섞인 말이 입 밖으로 나가려는데 작년 내 생일날 갑작스러운 울분을 쏟아내던 선아의 얼굴이 떠올라 겨우 참아냈다. 선아에게 한마디라도 했다가는 영영 우리 사이가 틀어져 버릴 것 같았다.

남편이 밖으로 돌았어도 외로운 줄 모르고 살았던 건 선아 덕분이었다. 갓난아기 때부터 유난하다 싶을 만큼 나를 따랐다. 분유를 탄 젖병은 거부했지만, 젖을 물리면 힘차게 빨아 댔다. 작고 여린 손으로 내 새끼손가락을 꽉 움켜쥔 채, 반짝이는 두 눈을 내 눈에 맞추며 꿀떡꿀떡 모유를 삼켜내고는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잠들던 그 생생한 느낌. 선아가 초등학교 1학년 때 학원에서 단체로 응시한 수학 경시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그때 나도 모르게 환하게 웃었던지, 선아는 엄마 웃는 얼굴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며 나에게 와락 안겼다. 애교도 많았던 선아는 엄마의 행복을 위해서 열심히 공부한다며 코를 찡긋하고 웃어주곤 했다.

매년 내 생일이면 선물을 줬는데, 어릴 때는 색종이를 접었고, 그러다가 문구점에서 파는 머리핀, 그 후에는 올리브영에서 파는 화장품까지 나름 고민한 흔적이 보이는 것들이었다. 선아는 매년 케이크 대신 마들렌을 사 왔는데, 어릴 때 엄마와 마들렌을 먹었던 기억이 좋아서라고 했다. 선아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윤주와 등교를 함께 하면서부터는 괜찮아졌지만, 그전에는 아침마다 유치원에 가는 걸 힘들어했다. 다른 이유는 아니었고, 나와 떨어지는 게 싫어서였다. 엄마와 헤어지기 싫다며 우는 선아를 달래다가 빵 먹고 갈까? 하고 물으며 근처 파리바게트로 데리고 들어갔던 적이 있다. 크림빵도, 단팥빵도, 소보로빵도, 뽀로로 빵도 다 싫다던 선아는 마들렌을 들어 보여줬을 때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저번에 엄마랑 바다에 갔을 때 가져온 조개껍질 같아.”

마들렌을 받아 든 선아는 눈물을 쓱 닦더니 금세 웃어 보였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매일 아침 유치원에 가기 전에 파리바게트에 들러 마들렌을 사고, 울지 않기로 서로의 새끼손가락을 고이 걸어 약속했다. 재잘재잘 떠들며 마들렌을 먹는 선아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넘겨주던 그때. 엄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선아. 잊고 지낸 그 시절의 기억이 선아에게는 애틋하게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재작년 내 생일날 편지와 선물, 그리고 마들렌을 건넨 선아에게 공부할 시간에 이걸 준비했냐고 했다. 공부한다고 잘 시간도 부족한데 나 때문에 시간 낭비했을 걸 생각하니 미안했다. 고맙다고 말하려는데 선아는 내 말은 듣지도 않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선아가 존댓말을 쓰기 시작한 시점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즈음부터였을지도 모르겠다. 일 년을 서먹하게 지내다가 작년 생일날, 열두 시가 다 되어 귀가한 선아에게 엄마 선물은 없냐고 농담처럼 물으며 웃었는데 갑자기 선아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작년에는 선물하지 말라더니 저더러 대체 어쩌라는 거냐면서, 엄마는 진짜 짜증 난다고 새빨개진 얼굴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말문이 막혀 멀뚱하게 눈만 끔벅거리는데 선아는 그대로 방문을 닫고 들어갔다.     

퉁퉁 불어버린 떡볶이와 어묵을 싱크대에 쏟아버렸다. 반나절 내내 닦아 깨끗해졌던 싱크대는 순식간에 빨간 떡볶이 국물로 얼룩졌다. 반사적으로 수세미를 들고 싱크대를 문지르는데 갑자기 가슴속에 숨이 차올랐다. 계속 숨을 내쉬어 봐도 시원하지 않았다. 수세미를 집어던지고 도망치듯 집 밖으로 나왔다. 숨이 턱턱 막히는 게, 그대로 있다가는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에 비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모습이었다. 아직 4월인데 벌써 초여름에 접어든 건지 등줄기에서 땀이 흘렀다. 요즘 들어 수시로 이렇게 얼굴이 후끈거리고 가슴이 답답했는데, 오늘따라 이런 증상이 좀 심했다. 벌써 갱년기가 온 건 아닐 텐데. 이게 다 잡생각 때문이구나 싶었고, 몸을 더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에 공원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계절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캔디바색을 띠고 있었다. 햇살은 부드러웠고, 바람은 시원했다. 포장된 산책로를 따라 걸음을 옮길 때마다 벚꽃 잎이 흩날렸다. 저녁 먹기 전에 벚꽃 구경을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아장아장 걷는 딸의 양쪽 손을 잡고 걷는 부부의 모습을 봤을 때는 울컥한 게 올라와서 잠시 벤치에 앉아 쉬어야 했다. 산책로 주위에 사람들이 북적였고, 수다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선아 또래로 보이는 학생들, 연인들, 중년 부부까지 많은 사람이 보였다.

사람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하늘이 연보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몸을 일으켜 다시 걷기 시작하는데 남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내가 보내는 메시지를 제대로 읽기는 하는 건지. 늦냐는 물음에 진료 중이었어, 라니. 다시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고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빨리 찬물로 샤워해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집을 향해 걸었다.

수련관 건물을 지나는데 페인트칠 벗겨진 외벽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에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데스크 직원에게 외벽 도색 계획은 없는 거냐고 물었다. 직원은 잘 모르겠다고 하고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데스크 위 컴퓨터 화면만 응시했다. 이상하게 순식간에 화가 치솟았는데 참을 수 없었다. 잘 모르겠다는 말 밖에 할 줄 모르냐고, 이러다가 건물이 무너지면 그때도 잘 모르겠다고 할 거냐고,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소리치는데 누군가 내 팔을 붙잡았다.

“선아 엄마.”

윤주네 외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달콤하면서도 고소한 냄새가 풍기는 쇼핑백을 들고 서 있었는데, 나는 한동안 꼼짝없이 그 쇼핑백을 응시했다. 익숙하지만 낯설게 되어 버린 그 냄새가 그냥 지나쳐지지 않았다. 할머니는 쇼핑백에 시선이 꽂힌 나를 보더니 제빵 수업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이라면서, 오늘 마들렌을 만들었는데 함께 집으로 가서 맛보지 않겠냐며 쇼핑백을 열어 보였다. 나는 황급히 몸을 돌려 곧 남편이 퇴근해 올 시간이라서 저녁 준비해야 한다고 둘러대고는 수련관 건물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오는 내내 애먼 데스크 직원에게 소리 지른 걸 후회했다. 데스크 직원에게도, 윤주네 외할머니에게도 내가 분노 조절도 못 하는 모자란 사람으로 보일 걸 생각하니 입이 바싹 말랐다. 아파트 앞 사거리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서 있는 동안에는 차도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까지 느꼈다. 다행인 건지 금세 보행자 신호가 들어와 무사히 횡단보도를 건넜다.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옷을 벗어 던지고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샤워기가 쏟아내는 찬물에 몸을 가만히 대고 있다가 손으로 비누를 문질렀다. 부지런히 손을 움직여 만들어진 비누 거품을 몸 구석구석에 차례대로 대고 문질렀고, 몸에 닿은 거품은 곧장 샤워기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물과 함께 씻겨 내려갔다. 이런 과정을 수없이 반복했다. 마치 이 과정이 내가 외면해 온 것을 씻어내 주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문 닫힌 화장실 안에 증기가 가득 차 사방이 온통 뿌옇게 되고서야 비로소 샤워기 수전을 아래로 내렸다.

주섬주섬 옷을 입고 물기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감싸고는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최대한 아무 일 없었던 사람처럼 행동하는 중이었다. 잡생각을 외면하기에 편리한 방법이었다. 미역국을 끓이고, 불고기와 잡채를 했다. 저녁상을 차리고 냉장고에 넣어 두었던 케이크 상자를 꺼내 식탁 위에 올렸다. 선아는 학원 끝나면 열 시가 넘을 테고, 남편은 저녁을 먹고 올 건지, 어쩔 건지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수건을 둘렀는데도 머리카락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져 어깨가 다 젖었다. 축축하게 몸에 달라붙은 옷이 성가시게만 느껴져 당장 벗어버리고는 그대로 소파에 널브러졌다. 종일 굶은 탓인지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이 없었고, 적막 속에서 눈만 깜박거렸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어둠 속에 검은 실루엣만 보였다. 언제 이렇게 어두워진 거지? 남편인가? 선아가 벌써 왔나? 몇 번 눈을 끔벅거리다가 그대로 잠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여전히 어두운 적막 속이었다. 몸을 일으켜 전등 스위치를 올렸다. 갑자기 환해진 탓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을 때 나를 바라보던 실루엣은 책장 옆 옷걸이였다는 걸 깨달았다. 머리가 지끈대기 시작했다. 남편과 선아에게 올 때 타이레놀 사 오라는 메시지를 보내고서 멍하게 앉아 있는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고 손은 떨렸다. 오늘만큼은 혼자 먹기 싫었는데 몸이 자꾸만 배고프다고 신호를 보내오니 어쩔 도리가 없어 숟가락을 들었다. 숟가락을 국그릇 안으로 넣었는데, 국물을 머금어 퉁퉁 불은 미역만 걸리적거렸다. 숟가락으로 미역을 이리저리 휘젓는데 남편이 들어왔다. 저녁은 먹었냐고 물으려는데 남편이 먹고 왔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멈췄던 숟가락을 움직여 미역을 입 안으로 쑤셔 넣었다. 원래부터 국물이 아니라 미역을 먹으려던 듯이. 평소처럼 못 본 체하고 방으로 들어가 버리지, 오늘따라 한동안 내 앞에 서 있던 남편은 하얀 봉투를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고맙다는 말이라도 기다리는 건지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던 남편은 끝내 그 말을 듣지 못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봉투 위에는 생일 축하해, 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꾸역꾸역 쑤셔 넣은 미역이 가슴에 걸렸는지 답답했다.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려도 시원해지지 않았고, 아까처럼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쿵쾅대고 걸어가 안방 문을 열었다. 와이셔츠 단추 푸는 데만 집중하고 있는 남편에게 타이레놀은? 하고 묻자 남편은 타이레놀? 하고 되물었다. 메시지를 못 봤냐고 묻자 남편은 그제야 단추에서 손을 떼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또 진료 중이었어?”

갑자기 높아진 언성에 흐리멍덩하던 남편의 눈이 커지더니 나에게 시선을 맞춰왔다.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본 남편의 두 눈에서 나를 마주했고, 그 순간 남편을 노려보고 있던 눈꺼풀에 힘이 빠졌다. 전의를 상실하고 나자 머쓱해져 안방 안으로 들어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서 있는데 마침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 안 받냐는 남편의 말에 몸을 돌려 거실로 나왔다. 윤주 엄마였다. 친정엄마와 연락되지 않는다는 말에 내가 올라가 보겠다고, 안방에 있는 남편에게 들리도록 큰 목소리로 말했다.

현관문을 열고 나와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랐다. 윤주 외할머니가 또 못 들어가고 문밖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행히 할머니는 집 안에 있는 듯했다. 찬양 흥얼거리는 소리가 문밖으로 새어 나왔다. 벨을 누르자 금세 문이 열렸다. 나를 본 할머니는 흠칫하며 놀란 듯 보였다. 샤워하고 머리카락을 제대로 말리지 않고 누웠던 게 생각났고,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아까 샤워하고 바로 잠들어서 머리가 엉망이에요. 원래 안 이런데…… 윤주 엄마가 연락해 왔더라고요. 어머니랑 연락이 안 된다고. 윤주 엄마가 요즘 어머니 걱정이 많아요.”

목소리를 깔고 차분하게 말했다. 원래는 이렇게 이성적이고 차분한 사람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윤주 외할머니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빵 수업을 들을 때 무음으로 바꿔놓고서 깜박했나 보다고, 미안한 일을 만들어서 어쩌냐며 내 손을 잡았다. 그러더니 특유의 미소를 띠며 집에 들어와서 마들렌을 먹고 가라고 했다. 아침에 해뒀던 페인트칠에 덧칠해야 된다고 했더니 잠깐 먹고 가라면서 내 손을 잡아끌었다. 못이기는 척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윤주네 집에 들어간 건 처음이었다. 우리가 이사 오기 전부터 이곳에 살았던 윤주 할머니 댁에는 곳곳에 세월의 흔적이 보였다. 마룻바닥에 시커먼 얼룩이 있는 곳도 보였고, 벽지는 군데군데 찢기거나 누렇게 변색된 모습이었는데 거슬리는 느낌이 없었다. 곳곳에 물건이 쌓여 있고 정리가 안 된 어수선한 분위기였지만 지저분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고 오히려 익숙한 느낌이었다. 집 안을 두리번거리는 동안 윤주 엄마와 통화를 마친 윤주 외할머니가 우유를 따뜻하게 데워 건넸다. 남편이나 선아에게 우유를 챙겨주기나 했지 내가 마실 일은 없어서였는지, 선뜻 마시고 싶은 생각이 안 들었다. 윤주 외할머니는 따뜻한 우유를 마시면 왠지 마음이 차분해진다면서 선아 엄마도 얼른 마시라고 했다. 먼저 우유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말없이 나를 쳐다보는데 거절할 도리가 없었고, 할머니가 권한대로 한 모금 마셨다. 정말 마음이 차분해지는 듯했고, 뜨거운 줄도 모르고 홀짝홀짝 마셔 금세 잔을 비워냈다. 접시에 놓인 마들렌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에 넣었다. 부드러우면서 촉촉한 마들렌이 혀에 닿자 낯설게만 느껴졌고, 울컥한 게 목울대를 건드렸다. 조심스레 입을 오물거리자 달콤한 맛이 느껴졌다. 윤주 할머니는 마들렌을 하나 더 꺼내 접시에 덜어줬다. 얼른 마들렌을 집어 입속으로 넣고는 씹지도 않고 있었다. 말없이 입안 가득 마들렌을 머금고 있는데, 윤주 외할머니가 마들렌을 좋아하나보다고 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움직였다. 기억을, 어쩌면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되어버린 행복을 음미했다.

다시 텅 비어 버린 입이 허전해 마른침을 한번 삼켜야 했지만, 오랜만에 기분은 좋았다. 윤주도 고3이라 힘들 텐데 어릴 때랑 변함없이 잘 웃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우리 선아도 예전처럼 잘 웃어주면 좋겠다고, 여태 빈속이었는데, 마들렌을 먹으니 이제야 좀 살겠다고 떠들어 댔다. 윤주 외할머니는 선아 엄마가 이렇게 수다스러운 줄 몰랐다며 웃었다. 윤주 엄마가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고, 특히 웃는 모습이 비슷하다고 하자 무슨 고민이 있는 듯 잠시 머뭇거리더니, 사실은 딸에게 거짓말하고 있다고 했다.

윤주 외할머니는 치매기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약을 잘 챙겨 먹어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었다. 정말 도어록 번호를 기억하지 못한 건 아니었고, 일부러 딸이나 손녀의 전화를 잘 받지 않았다. 관심받고 싶어서, 거짓말이라도 해서 수시로 연락하게 만든 것이었다. 젊어서는 남편하고 사는 게 고통이었고, 그래서 이혼 후 혼자인 게 좋았는데 이제 와서 외로워졌다. 자기 연민에 빠지고 싶지 않아 외로움을 느낀 자신을 외면해 왔지만, 끝내 인정하고 나니 오히려 후련했다.

이야기 들어줘서 고맙다고, 조만간 딸에게 사실대로 말할 테니, 말하지 않고 기다려달라는 말에 그러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은 자는지 문 닫힌 방 안은 조용했다. 형광등 불빛 아래 냉장고 돌아가는 미세한 소음만 적막한 거실을 채웠다. 설거지하기 위해 주방으로 갔는데, 식탁 위에는 케이크만 그대로 있었다. 남편이 식탁을 정리하고 설거지까지 한 모양이었다. 살다 보니 이런 일도 다 있었다. 건조대에 투박하게 올려진 그릇은 불규칙하게 쌓여 여린 진동에도 무너져 내릴 듯 위태로워 보였다. 행주를 꺼내 조심스레 맨 위에 올려진 그릇부터 물기를 닦아 정리해 넣기 시작했다. 중심을 잃은 그릇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상상을 했고, 그 순간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눈꺼풀을 닫아 버리면 외면할 수 있다는 듯이. 소용없었다. 눈을 감아도 머릿속에서 그릇은 떨어졌고, 바닥에 닿은 그릇은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났다. 손을 뻗어 유리 조각을 집는데 따끔하더니 피가 나기 시작했다. 그대로 주저앉아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빨갛고 뜨거운 액체가 손가락을 지나 허벅지에 뚝뚝 떨어졌다.

고개를 저으며 눈을 떴다. 건조대에서 그릇을 하나 집어 꺼내는데, 그 아래 있던 그릇이 중심을 잃은 듯 휘청거렸다. 행주를 내팽개치고 그 손으로 흔들리는 그릇을 잡아 건조대에 똑바로 올렸다. 그릇은 이제야 건조대에 제대로 안착한 듯 보였다. 외면하던 것을 인정하고서야 비로소 편해졌다는 윤주 외할머니 말이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고, 주방에서 안방까지 얼마 안 되는 거리를 저벅저벅 걸어 안방 앞으로 갔다. 문을 열고 남편이 누워 있는 침대를 향해 다가갔다. 자는 건지, 자는 척하는 건지 눈을 감은 남편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문득 주름 가득해진 남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조심스레 남편의 얼굴에 손을 올렸다가 이내 내렸다.

그때 도어록 번호 누르는 소리가 났다. 안방 불을 끄고 거실로 나가니 선아가 와 있었다. 저녁은? 하고 묻자 선아는 시선도 맞추지 않은 채 먹었다고 답하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릇을 마저 정리하러 주방으로 가는데, 케이크 상자 옆에 타이레놀이 놓여 있었다. 타이레놀 알약 하나를 꺼내 이리저리 만져보다가 입 안에 넣고 삼켰다. 케이크를 꺼내 초에 불을 붙였다. 위태롭게 타 내려가는 초를 바라보다가, 깊은 숨을 뱉어내 초를 껐다.     

아침이었다. 어제 못한 2차 페인트칠을 했다. 남편과 선아는 식탁에 차려놓은 아침을 먹고 준비를 마치더니 다녀오겠다고 했다. 나는 롤러를 손에 쥔 채 현관으로 뛰어나가 좋은 하루, 하고 인사했다. 두 사람은 무표정한 얼굴로 동시에 좋은 하루, 하고 답했다. 그때 갑자기 선아가 엄마! 하면서 손가락으로 롤러를 가리켰다. 롤러에서 페인트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마룻바닥에 몇 군데 하얀 점을 만들었다는 걸 그제야 발견했다. 남편과 선아는 서둘러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롤러를 들고 벽면 앞으로 뛰어가 페인트칠을 마무리했다.

배드민턴 채를 챙겨 집을 나서다가 다시 집으로 들어가 베란다 창을 활짝 열었다. 냄새가 며칠이나 가려나. 이제 페인트칠은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운동 시간에 간당간당했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뛰어가도, 걸어가도 어차피 애매했다. 밤새 비가 내리더니 바닥에 온통 연분홍 꽃잎이 깔려 있었다. 사거리 횡단보도에서 수련관 건물 앞까지 깔린 분홍 카펫을 따라 걷다 보니 금세 수련관 출입문 앞이었다. 그대로 문을 통과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출입문 옆 헐벗은 외벽은 어제와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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