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소희의 대학 친구 나래가 페이스북 페이지 대나무 숲에 글을 하나 남겼다.
[22학번 경영학부 여자 3명. 미팅 구해요!]
대학에 입학한 후 친해진 네 명의 친구들 중 유일하게 남자 친구가 있는 나래는 한마디로 인싸였다. 3월 한 달 사이 경영학부 내에서 나래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나래는 친화력이 좋고 리더십도 있었다. 코로나 이후로 작년까지는 온라인 수업이었는데, 얼마 전 거리두기가 해제되고 제대로 캠퍼스 생활을 할 수 있게 올해 입학한 게 얼마나 다행이냐며 나래가 친구들의 미팅을 주선했던 것이다. 나래의 글이 올라간 후 미팅에 굶주린 수많은 남학생들의 메시지가 쏟아졌다.
오늘은 고민 끝에 나래가 최종 선택한 연세대 기계공학과 21학번 오빠들과 미팅을 하는 날이었다. 소희는 평소처럼 비비크림만 바르고 면 티에 청바지를 입고 집을 나섰다. 몇 걸음 걷다가 몸을 돌려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였다. 예뻐서 사두었지만 손이 잘 가지 않던 아이보리색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마스카라를 하고 핑크빛 블러셔를 살짝만 발랐다. 그리고 평소 거의 신지 않던 하이힐을 꺼내 신었다. 갑자기 옷을 갈아입고 나름의 메이크업을 하느라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채플에 늦게 될 것 같았다. 이대역 지하철 문이 열리자마자, 백 미터 달리기 하듯 전력 질주해서 겨우 채플이 열리는 대강당에 들어갔다. 소희는 오래간만에 신은 하이힐 때문에, 게다가 뜀박질을 한 탓에 까진 뒤꿈치가 쓰라려 채플 내내 만지작거렸다. 그러면서 지각을 면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50여 분간 지속된 채플을 마치고 강당을 나와 수업이 있는 강의실로 향하던 길, 나래와 마주쳤다.
“이따 저녁 6시에 알지? 3:3 미팅. 연대 기계공학과 오빠들이랑.”
“응.”
“오늘 총 8명이 나간다. 너희 셋과 나 그리고 찬이 오빠와 세 명의 오빠들.”
“3:3 이라며. 찬이 오빠가 누구야?”
“내가 올린 글 보고 메시지 보낸 사람인데. 대화 나눠보니까 제일 괜찮더라고. 그 오빠는 좋아하는 여자 있어서 그냥 나오는 거래. 그래서 나도 미팅 궁금해서 둘이 같이 나가서 구경하기로 했어.”
“아.”
“오늘 소희 예쁘네. 내가 볼 때 너 오늘 남자 친구 생긴다. 어떻게 여태 좋아한 사람이 없어?”
“그러게. 좋아한다는 게 어떤 건지 아직 잘 모르겠더라고. 나 오늘 모쏠 탈출하는 거야?”
“네가 모쏠이라니 진짜 의외였다.”
“그랬어? 나도 진짜 이번에는 꼭 남친 만들고 싶다.”
“내가 오늘 적극적으로 도와줄게.”
“고마워 나래야.”
그날 저녁 여섯 시, 2호선 신촌역과 홍대입구 사이에 위치한 작은 호프집이었다. 3:3 미팅인데 여자 넷에 남자 넷이 한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나래와 찬이 오빠는 미팅 참여자가 아니라고 거듭 강조했다.
“다들 코로나로 미팅은 처음이시죠?”
평소 리더십이 있고 인싸 기질이 다분한 나래는 처음 본 오빠들 앞에서 어색하지도 않은지 계속 말을 하며 분위기를 띄웠다. 긴 테이블 너머로 오고 가는 눈빛 속에서 각자가 시그널을 주고받는 중이었다. 소희는 몸이 배배 꼬였다. 그날 처음 만난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어색하면서도 설레는 마음에서였다. 괜히 긴 생머리를 쓸어 넘기는데, 스피커 너머로 멜로망스의 ‘취중고백’이 흘러나왔다.
“어. 이 노래!”
소희가 반응했다. 맞은편에 있던 남자가 소희에게 물었다.
“왜요?”
“이 노래 요즘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거예요. 오늘 아침에 카톡 프로필 뮤직도 이걸로 바꿨는데.”
“진짜요? 나도 이 노래인데.”
“정말요? 오빠 이름이 뭐였죠?”
“소희 씨 실망이에요. 난 처음부터 외웠는데. 민호예요, 유민호.”
“아, 맞다.”
“신난다. 재미난다. 더 게임 오브 데쓰!”
소희가 민호와 이제 막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는데 나래가 게임을 시작했다. 나래는 어떻게 저런 게임을 다 아는 건지. 역시 인싸는 다르다.
“이거 무슨 게임이야?”
“나도 알려줘. 나도 잘 몰라.”
올해 신입생인 소희와 친구들이 게임 방법을 물었다. 나래가 핸드폰으로 유튜브 영상 하나를 재생했다.
“자. 이 영상 보면 게임 방법 알 거야.”
설명 대신 영상을 한 번 보여주자 모두 이해했다. 게임을 하는 와중에도 소희는 자꾸만 한 남자와 시선이 닿았다. 소희는 호프집에 들어와 네 명의 남자들과 마주 앉아 인사를 나누었을 때부터 한 남자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터였다. 유민호. 까만 피부에 마른 편이었지만 다부져 보이는 넓은 어깨를 가져 소희의 이상형에 가까웠다. 말이 적은 편이었지만 간간이 던지는 농담에 소희는 웃음이 났다. 어쩌면 웃기거나 재밌는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건 상관없이 미소를 지어 보일 만큼 호감을 느꼈다. 게다가 카톡 프로필 뮤직까지 같은 곡이라니. 소희는 자꾸만 가슴이 두근거렸다.
소희는 게임에서 자꾸만 걸려 술을 마셨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소주를 받아마셨는데 네 잔째가 되니 취기가 올라 어지러웠다. 망설이다가 소주잔을 입에 가져다대는데 민호가 말했다.
“제가 대신 마실게요. 소희 씨 지금 얼굴 엄청 빨개요.”
“오. 유민호.”
오빠들이 환호했다. 민호가 소희가 들고 있는 소주잔을 가져가 자신의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소희를 봤다. 소희는 가뜩이나 붉어졌던 얼굴이 더 달아오르는 게 느껴져 자신에게 닿은 민호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마지막으로 하트시그널 하자. 하트시그널, 그 프로 봤죠? 마음에 드는 상대를 저에게 갠톡으로 알려주세요. 제가 서로의 시그널을 확인한 후에 연결된 분들은 알려드릴게요.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전 남친 있습니다. 저를 선택하시면 곤란합니다.”
나래가 신선한 제안을 했다.
“하트시그널 진짜 재밌게 봤었는데. 난 바로 보냈음.”
“나도.”
오빠들과 소희의 친구들이 나래에게 카톡을 보냈다.
“다들 보냈네요. 소희는?”
“아. 나도 이제 보낼게.”
소희는 망설일 필요가 없이 처음부터 민호였지만 고민하는 체했다. 쉬워 보이지 않고 싶어서였다. 당장 핸드폰을 들어 카톡에 이름을 적으려는 손을 자중시키느라 한참을 애쓰면서 최대한 느릿느릿 민호의 이름을 적었다.
“결과는 이따 개별적으로 알려줄게. 오늘은 이만 해산!”
좋았던 그날의 분위기를 그대로 마무리하고 싶었던지 나래는 결과 발표를 하지 않고 그대로 만남을 마무리했다. 소희는 술에 취한 건지, 민호를 향한 이끌림에 취한 건지 어질한 몸을 겨우 가눠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와 씻고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민호와 자꾸만 눈이 마주쳤고 그와 시그널을 주고받았다고 느꼈다. 흑기사를 자처한 건 분명 그가 보낸 시그널이 맞는 것 같은데… 나래는 왜 여태 연락이 없는 건지.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민호가 말 걸었을 때 자연스레 번호를 물어볼 걸. 빨리 그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더 이상은 기다릴 수가 없어 나래에게 카톡을 보냈다.
“나래. 자?”
카톡 창에 숫자 1이 없어지자마자 나래에게서 전화가 왔다.
“너 궁금해서 못 자고 있었구나?”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
“준서 오빠 번호 알려줄게. 연락해봐.”
나래는 민호의 옆에 있던 준서의 연락처를 알려주겠다고 했다.
“민호 오빠는? 나는 그 오빠 이름을 보냈는데 왜 다른 사람하고 연결시켜주는 거야?”
“그게 사실은…”
“응. 뭔데?”
“민호 오빠도 네 이름을 보냈어. 안 그래도 민호 오빠한테 네 연락처 주겠다고 했는데 아직 누구 만날 상황이
아니라고… 미안하대. 그래서 너한테 연락이 늦어진 거야.”
“아…”
소희는 나래의 말을 들은 순간 실망감에 할 말을 잃고 황급히 통화를 마무리했다.
“나 너무 졸리다. 끊을 게.”
실망감이 잠을 끌어왔는지 불현듯 쏟아지는 졸음에 눈을 감았다. 감은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갑작스러운 눈물에 소희는 당황스러웠다. 대체 무슨 사정이 길래… 누구 만날 상황이 아니면 미팅에는 왜 나온 걸까. 그냥 즐기러? 그렇다면 왜 자꾸 시그널을 보낸 거지? 나쁜 남자? 기분이 나빴다. 농락당한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아니다. 사실은 그보다 마음이 아팠다. 짧지만 강했던 이끌림을 이대로 마음속에 묻어버려야 한다니… 실연당한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다음 날 소희는 준서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나래가 소희의 연락처를 알려준 모양이다. 미팅 날에는 온통 민호에게 신경이 쏠렸기 때문에 그 옆에 앉았던 준서는 관심 밖이었다. 통화를 하다 보니 꽤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았다. 소희의 이야기를 차분히 잘 들어줬고 자상한 사람인 듯했다. 그가 다음날 당장 학교 앞으로 와서 기다리겠고 하는데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소희는 그렇게 미팅 날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준서와 만나기로 했다.
수업을 마치고 준서를 만나러 가는 길, 소희는 막상 준서의 얼굴을 보면 어색할까 걱정이 되었다. 소희의 걱정과 달리 준서와 만나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낯설지는 않았다. 준서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 과에서 오늘 주점 하는데 같이 갈래?”
소희는 그 순간 준서에게는 미안한 생각이 스쳤다.
‘그곳에 가면 민호 오빠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네.”
민호를 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소희는 가겠다고 답했다.
준서를 따라 과 주점이 열렸다는 호프집으로 들어서는 길, 소희가 두근대는 가슴을 토닥여봤다. 민호를 만나게 되면 인사를 해야 할지, 대화를 나누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머리가 복잡했다. 북적거리는 호프집 안으로 들어섰다. 준서가 이끄는 대로 따라 들어가 한 테이블에 앉았다. 소희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티 내지 않으려 태연한 척하는 중이었다. 어디선가 민호가 나타나 인사를 건넸다. 미팅 날 모자를 썼던 그는 이번엔 쓰고 있지 않았다. 염색하지 않은 까만 짧은 헤어스타일이지만 스타일리시하게 만져진 모습이었다.
“안녕 또 보네.”
소희는 민호에게 한 번 더 반했지만 인사를 건네는 민호에게 고개만 끄덕였을 뿐, 대답도 안 하고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민호와 시선을 맞추고 대화를 나누면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커질 것 같아서였다. 소희는 준서와의 대화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오랜 시간 동안 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소희는 사실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단 몇 초에 가까운 짧은 순간 민호가가 건넨 한 마디의 인사만 머리에 맴돌 뿐이었다.
집에 와서 씻고 침대에 누운 소희는 아무런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아 잠을 청했다. 한참을 침대에서 뒤척여 봤지만 소용없었다. 혼란스러운 마음은 그녀가 쉽게 잠들도록 놔두지 않았다. 전날 밤 잠들기 전 흘러내린 한 방울의 눈물로 씻어버린 줄 알았던 민호에 대한 이끌림은 여전히 소희의 마음속에 있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혼란스러웠다.
“휴…”
적막한 방 안을 소희의 한숨소리가 채웠다. 그때 소희의 핸드폰이 울렸다. 나래였다.
“여보세요?”
“너 아까 주점 다녀갔다며.”
“응. 너 갔었어?”
“어. 미팅 나왔던 찬이 오빠 알지? 그 오빠가 놀러 오라 그래서 갔었거든.”
“그랬구나.”
“너 가고 나서 내가 갔나 봐. 그런데 민호 오빠 너 간 다음에 술 엄청 먹더니 울더라고.”
“민호 오빠가 울었다고? 왜?”
“너한테 마음이 많이 가는데 가지를 못하니까 힘든가 봐. 소희야 네가 먼저 연락해 보면 어때?”
“누구 만날 상황이 아니라며. 대체 무슨 상황이 길래 설명도 없고… 나는 그냥 오빠 동생 사이로 지내는 건 못할 것 같은데 이 오빠랑.”
“어떤 관계를 특정하지 말고… 우선 연락하면서 썸만 타.”
나래의 말에 소희는 용기가 생겼다. 민호의 연락처를 받아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소희에게 그 늦은 시각은 당장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신호음이 울렸다.
“여보세요.”
“오빠. 저예요. 소희.”
“응. 그래. 왠지 연락이 올 것 같았다.”
“저한테요? 오빠가 먼저 하지 그랬어요.”
“내가 먼저 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라서.”
민호가 말하는 처지의 의미가 뭔지 묻고 싶었지만 그만큼의 용기는 나지 않았다. 소희와 민호 둘 사이의 강한 이끌림이 긴장될 만큼 무거운 공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할 만큼 무겁고 긴장되었지만 소희는 그 공기가 싫지 않았다. 민호도 그런 것 같았다.
“주점에서 준서 오빠랑 대화하는 동안 하나도 집중 못했어요.”
“왜?”
“오빠가 와서 인사하고 가서요.”
“그런데 왜 내가 인사했을 때 눈도 제대로 안 마주쳤어?”
“그냥 눈을 보고 싶지 않았어요.”
소희는 알지 못하는 민호의 ‘처지’ 때문에 기분 나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을 마주치면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커질 것 같아서였다는 아이러니한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기는 싫었다. 혼자 어색해진 소희가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오빠는 가족관계가 어떻게 돼요? 저는 두 살 차이 나는 오빠 한 명 있어요.”
“나는 남동생 한 명 있어. 연년생이야.”
서로에 대한 질문과 답이 이어졌다. 이를 테면 혈액형, 취미, 취향에 대한 것들이었다. 서로 비슷한 면이 많았다고 해도 없었다고 해도 그런 건 이미 상관이 없는 두 사람이었다. 그 후엔 시시콜콜한 일상 이야기도 이어졌다.
힘들고 무겁게 시작했던 대화지만 그 마음은 금세 잊고 핸드폰 너머로 느껴지는 서로의 마음에 젖어들었다. 어느새 다른 건 생각할 수 없었다. 서로의 목소리에만 집중했다. 미세하게 떨리는 숨소리까지 들릴 만큼이었다. 대화를 나눌수록 서로 간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느낌이었다. 처음 눈을 맞춘 그 순간 이미 서로 간의 거리가 맞닿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더 갈 필요 없을 만큼. 중력에 이끌려 땅에 닿는 것처럼, 자석의 양극이 만나는 순간 철석 닿아버리는 것처럼, 둘 사이의 이끌림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예요? 오빠는 누구 만날 처지가 아니라고 해서…”
“우선 다른 건 생각하지 말자.”
소희는 민호가 그의 처지나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기를 원했다. 다른 건 생각하지 말자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혼란스럽고 서운했지만 민호의 말대로 다른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민호에게 전화를 건 순간부터 다른 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당장은 첫 눈 맞춤으로 이미 닿아버린 서로의 마음만 생각하기로 했다. 묵직하게 힘든 마음으로 시작한 통화가 밤새 이어졌다.
“오빠. 지금 해 뜬 것 같은데요?”
“그러네.”
“나 오늘 1교시부터 강의 있는 날인데. 지금 자면 일어날 수 있을까요?”
“내가 모닝콜해줄게. 걱정 말고 조금이라도 자.”
“네.”
두 시간이나 잤을까. 소희의 핸드폰이 울렸다. 평소 알람을 몇 번이나 끄고도 일어나기 힘든 소희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여보세요?”
“일어나자. 학교 가야지.”
“네. 오빠는요?”
“난 오늘 수업이 없어서. 너 모닝콜해주려고 안 잤어. 이제 자야지.”
“네. 고마워요.”
“학교 잘 가고. 일어나면 연락할게.”
짧은 몇 마디의 대화가 이어진 통화가 끝났다. 두 시간 만에 들은 민호의 목소리가 어찌나 반갑고 설레던지 통화 내내 두근대는 마음을 달래지 않고 놔뒀다. 기분 좋은 그 두근거림을 온종일 느끼고 싶었다.
1교시부터 시작된 수업은 오후가 되어서까지 이어졌다. 오후 3시쯤 민호에게서 연락이 왔다.
“수업 언제 끝나? 우리 오늘 볼까? 다섯 시까지는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아. 다섯 시 좋아요.”
“영화 볼까? 롯데월드 몰에서 만나자. 내가 예매해 놓을게.”
“좋아요.”
“뭐 보고 싶어?”
“오빠 보고 싶은 걸로. 뭐든 좋아요.”
그날 곧장 만나자고 할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소희는 두 시간도 채 못 자고 일어나서 급하게 나오느라 대충 세수만 하고 뛰쳐나왔었다. 민호가 만나자는 말에 예스를 외친 소희는 통화를 마치고 나서 머리가 복잡했다. 완벽하게 꾸민 모습으로 만나고 싶었는데… 속상했지만 그렇다고 민호와의 만남을 다음으로 미루고 싶지는 않았다. 당장 그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수업을 마친 소희가 나래에게 말했다.
“나래야. 오늘 약속 내일로 미뤄도 돼?”
수업을 마치고 근처에 전시를 보러 가기로 했는데 민호의 연락에 나래와의 선약을 까맣게 잊었다.
“갑자기?”
“사실은 어제 네 말 듣고 민호 오빠한테 연락했거든.”
“대박. 잘했네! 그래서? 뭐래? 그 상황이 뭐래 대체?”
“아직 못 들었어. 좀 전에 카톡 와서 갑자가 영화 보자는데 순간적으로 전시 보러 가기로 한 거 깜박하고 오케이 해버렸어. 미안해 나래야.”
“괜찮아. 나랑은 언제든 가면 돼! 우선 민호 오빠 만나는 게 중요하지. 이럴 줄 알았다니까. 처음부터 둘이 시그널 통한 거 내가 알았다니까.”
“어떻게 알았어?”
“야 민호 오빠는 계속 너만 보더라.”
“그랬어?”
“그래. 너도 민호 오빠랑만 대화 나눴잖아.”
“응.”
“뭔지 모를 오빠의 상황이 빨리 정리되면 좋겠다. 어쨌든 우리 소희 드디어 썸남 생긴 거야?”
“썸남은 무슨.”
지하철을 타고 가는 길, 소희는 가방에서 거울을 꺼내 얼굴을 비춰봤다. 어디 이상한 데는 없는지 자꾸만 거울을 꺼내 자신의 모습을 체크했다. 잠실역에서 내려 롯데월드 몰 5층에 위치한 롯데시네마를 향해 걸어갔다. 민호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단 몇 걸음 후면 민호를 만나게 될 것이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가는데 저 멀리 민호가 보였다. 민호도 소희를 보고 있었다. 민호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소희는 민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붉어진 얼굴이 부끄러웠지만, 당장 바로 앞에 온 민호 앞에서 가릴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오빠. 저 오늘 엉망이에요. 아침에 급하게 대충 나오느라.”
“그래도 예쁜데 뭐.”
서로를 바라보느라 어디에 앉자는 말이나 어디에 들어가자는 말도 잊은 두 사람이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아무 곳에 앉았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가까이 앉은 건 처음이었다. 심장 두근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는데 그 소리가 본인의 것인지 상대방의 것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소희야, 이거.”
민호가 자신의 왼쪽 손에 짜낸 손 소독 젤을 오른쪽 검지 손가락에 묻혀 소희의 손바닥에 묻혀줬다. 살짝 스친 민호의 손가락에 소희의 심장은 더 크게 두근거렸다. 마스크로 가려진 서로의 얼굴은 눈만 보였다. 덕분에 서로의 눈에 더 집중하게 되는 듯했다. 상영시간이 되어 영화관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서로에게는 오롯이 둘 뿐이었다. 온 신경이 서로에게 있었기에 영화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영화가 끝나고 근처에 보이는 아무 식당에나 들어갔다. 음식을 먹는 동안에도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서로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다. 해 질 녘에 만났던 두 사람이 서로에게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깜깜한 밤이 되었다. 헤어지기 싫었지만 소희는 서둘러야 했다.
“버스 끊기기 전에 집에 가야 할 것 같아요.”
“그래. 내가 데려다줄게.”
버스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서로를 향한 이끌림이 함께 하는 내내 마음을 휘저었기에 잠시 쉼이 필요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곁에 앉은 두 사람은 가깝지만 몸이 닿지는 않은 채였다. 진즉에 닿아버린 마음과 달리 몸은 쉽사리 닿지 못했다. 거침없지만 조심스러웠고, 불편하면서도 좋았다. 민호를 만난 이후로 줄곧 소희는 아이러니한 감정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소희가 사는 아파트까지 걸어가는 길, 두 사람은 서로의 속도에 맞춰 느리게 걸었다. 최대한 천천히 도착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민호가 소희를 보며 말했다.
“이쯤 되면 네가 오빠 팔짱도 좀 껴주고 그래야지.”
“오빠가 먼저 손잡아주길 기다렸는데요.”
민호가 기다렸다는 듯 소희의 손을 잡았다. 버스에서부터 닿고 싶었던 두 사람의 손이 비로소 닿았다.
“사실 아까 손 소독 젤 네 손에 묻혀주면서 손이 닿았을 때부터 네 손, 잡고 싶었다.”
“저도요.”
벚꽃 잎이 흩날리는 봄 밤, 깍지를 낀 두 사람의 그림자가 가로등 아래에 길게 이어졌다. 민호와 헤어지고 집에 들어간 소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민호와 보낸 시간을, 그와 시간을 보내며 가슴을 채웠던 감정들을 되새기는 중이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게 어떤 감정인지 알지 못하던 소희지만, 민호를 만나고 순식간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충동적인 것에 가까울 만큼 빠르게 마음을 줘버린 상대와 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니, 소희는 기쁘면서도 뭉클한 감정이 마음 가득 차올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던 것이다. 겨우 몸을 일으켜 씻고 나오는데 침대 위에 올려두었던 핸드폰이 울렸다. 민호였다. 아직 통화버튼을 누르기 전, 그의 목소리를 듣기 전인데도 가슴이 뛰었다.
“여보세요.”
“나 집 도착. 너 인스타 계정 SoHee22랬지?
“네.”
“어? 비공개네. 팔로우 신청했으니 수락해줘. 나 우선 씻고 와서 전화할게.”
“알겠어요.”
소희가 핸드폰 화면을 터치해 인스타그램 창을 열었다. 민호가 보낸 팔로우 신청 수락 버튼을 눌렀다. 민호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클릭했다. 민호의 계정에는 민호의 뒷모습이 찍힌 사진 한 장만 있을 뿐이었다. 그 사진 아래에 여러 개의 댓글이 있었는데 하트 이모티콘을 찍은 댓글 하나가 소희의 눈에 들어왔다. 그 댓글을 단 아이디를 클릭했다. 이건 여자의 본능 내지는 직감대로 행한 일이었다. 그 계정으로 화면이 넘어갔다. 비공개였지만 프로필 사진으로 선글라스를 끼고 모자를 쓴 한 남자와 다정하게 찍은 셀카가 등록되어 있었다. 사진을 본 순간 소희는 민호가 말한 상황이나 처지에 대한 생각이 스쳤다. 마음이 복잡해지려는 찰나 핸드폰이 울렸다. 민호였다.
“오빠. 오빠는 저를 왜 만나요?”
복잡해진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소희가 물었다.
“너는 나 왜 만나는데?”
눈빛이나 행동으로는 시그널을 보내면서도 명확하게 둘 사이의 관계를 정의한다거나, 확실하게 감정을 표현하지는 않는 민호였다. 또 이렇게 표현하는 대신 소희에게로 질문을 돌렸다.
“오빠가 좋으니까…”
소희는 또 민호에게 먼저 표현하고 말았다. 소희의 답에 민호가 웃으며 말했다.
“나도 너랑 같은 마음이니까 이렇게 너랑 연락하고 만나는 거겠지?”
민호의 말을 듣는 순간 소희는 다른 건 생각나지 않았다. 그가 말 한 대로 우선 다른 건 생각하지 않고 둘 사이의 감정에만 집중했다. 민호는 아무래도 나쁜 남자가 아니면 연애 고수인 것 같다.
지난 며칠 동안 긴 시간 대화를 나눴음에도, 밤늦게 시작된 통화는 밤새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가족들이 집에 있었기에 방문을 닫고 침대에 누웠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핸드폰을 얼굴에 바짝 갖다 댔다. 그리고 속삭이듯 말했다. 민호 역시 속삭이는 소희의 목소리 톤에 맞춰 함께 속삭이듯 말했다. 남녀 사이의 작은 속삭임은 은밀하고 온전하게 서로에게만 집중하도록 했다.
사흘 내내 소희와 민호는 밤새 통화하고 학교 수업을 마치면 만났다. 서로에게 더 깊이 빠져들었다. 두 사람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나흘째 되던 날 오후였다. 강의실에 앉아 재무회계 수업을 듣고 있는 소희가 다른 날과 다르게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다. 온 신경이 주머니 속 자신의 오른손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진동으로 설정해 놓은 주머니 속 핸드폰이 울리기만을 기다렸다. 전날 밤, 민호가 통화를 마치기 전 망설임 같은 것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 내일 상황을 정리하고 올게. 너한테 갈 수 있도록.”
“네.”
잘하고 오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소희는 상황을 정리하겠다는 민호의 말을 그토록 기다렸으면서도 막상 그 말을 들었을 때 반갑거나 기쁘지 않았다. 가슴이 답답했다. 환승 이별… 네 글자가 소희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복잡한 마음 때문인지 길게 느껴졌던 수업이 드디어 끝났다. 주머니 속 핸드폰을 재빨리 꺼냈다. 민호로부터 카톡이나 전화가 온 건 없었다. 진동이 울리지 않았으니 연락이 오지 않았다는 건 알았지만 굳이 핸드폰을 꺼내 확인해 봤다.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는 길 소희는 내내 안절부절못했다. 가슴이 자꾸만 뛰었다. 민호를 만난 이후로 두근대던 가슴은 오늘은 설렘이나 이끌림보다는 불안 때문인 듯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자꾸만 뛰는 가슴이 소희를 지치게 했기 때문이다. 다른 생각을 하려 해도 자꾸만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생각할수록 더 불안해져서 생각이라는 것을 멈춰야 했다. 왜 이렇게 불안한 거지. 나쁜 사람이 되기는 싫은 걸까. 소희는 당장 생각을 멈추는 방법을 찾지 못해 잠을 청했다. 한참을 뒤척이다가 깜박 잠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자는 동안 해가 졌는지 방안이 깜깜했다. 핸드폰을 확인했다. 민호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눈물이 양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때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민호였다. 온종일 기다렸던 그의 전화이지만 받기 망설여졌다. 무슨 말을 할지 두려웠지만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여보세요.”
“나야.”
“네…”
소희는 최대한 덤덤한 목소리를 냈다.
“울었어?”
소희가 애쓰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민호가 눈치 없이 물었다. 울음을 들켜버린 소희가 솔직하게 답했다.
“네.”
“왜 울었어.”
소희는 답을 할 수 없었다. 민호는 소희의 답을 기다리는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렇게 서로의 말을 기다리며 정적이 흘렀다. 아무런 대화 없이 핸드폰 화면에 찍히는 통화 시간만 흘러갔다. 밤새 대화가 이어지던 둘 사이에 처음으로 정적이 흘렀다. 일 분여 간의 정적을 깨고 민호가 입을 열었다.
“소희야.”
소희는 민호가 들리지 않도록 최대한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네.”
“내가 오늘 정리하고 오겠다고 했잖아.”
“네.”
“정말 마지막으로 만나서 정리하려고 했어.”
그 처지라는 게 여자 친구가 있다는 것이었구나. 소희의 직감이 맞았지만 이번에도 묻지 못했다. 그저 네, 라는 대답만 했다.
“네.”
“그런데 정리하지 못했어.”
소희는 민호와 끝내기가 싫었다. 끝내기가 싫은데 환승 이별을 시키는 나쁜 년이고 싶지도 않았다. 소희는 갈팡질팡하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너에게 가지 못할 것 같아. 미안해.”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마지막을 전하는 민호의 말에 소희는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순간에는 욕심내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에게로 오도록 설득하거나 붙잡지는 않을 것이었다.
“미안해하지 말아요. 가겠다는데 어떻게 붙잡겠어요. 그동안 즐거웠어요.”
최대한 쿨한 목소리를 냈다.
“그래. 잘 지내. 나도 즐거웠어.”
소희는 다시 울음이 터질 것 같아 재빨리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서로를 향한 이끌림만 생각하며 달려온 나흘간의 만남은 그렇게 끝났다. 소희는 마지막을 말하는 민호에게 더 묻지도 않고 기꺼이 그를 보내줬다. 좋은 기억만 남기고 싶었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꽤 오랜 시간 동안 마음이 아팠다. 차라리 나쁜 놈이라며 욕이나 하고 말지 민호에게 미련이 남았다. 어떤 날에는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목적지까지 가지 못하고 내려야 했다. 자꾸만 눈물이 났고 결국에는 소리 내어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날 소희는 울음을 그치자마자 민호의 연락처를 삭제하고 카톡을 차단해 버렸다. 인스타그램 앱을 열어 민호의 계정을 차단했다.
제대로 시작해 보지도 못하고 끝난 만남은 다른 것보다 미련을 남겼다. 그로 인해 욕심낼 걸 그랬다는 후회를 했다. 소희는 빨리 시간이 흘러 이 미련이 그저 추억이 되기를 바랐다.
“이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욕심낼걸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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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너어무 오랜만이에요.
<욕심낼 걸 그랬어.> 이 소설은 브런치에 연재했던 소설인데요. 여러 번 퇴고하여 공모전에 냈는데 당선되었습니다^^
2년간 에세이만 쓰다가 1월부터 이곳 제 브런치에 소설을 써보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3월부터 본격적으로 소설에 집중해서 매일 글을 썼답니다.
그동안 장편 3편, 단편 8편을 썼고 문예지 4곳에서 각각 다른 소설로 신인상을 받았습니다^^
첫 번째 장편은 출판사 투고로만 진행했는데 모두 거절받았고 나머지 두 편은 현재 공모전에 내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말로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었고 두 아이 챙기고 나머지 시간은 오롯이 글을 썼습니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기에 지치지 않고 한 단계 씩 이뤄나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장편 공모가 되기를 바라지만, 안된다고 해도 포기하지 않고 매일 글을 쓰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랜만에 독자님들께서 제 에세이를 읽고 작성해주셨던 후기들을 다시 읽어 봤는데요. 울컥해서 울었지 뭐예요. 읽을 때마다 감동 주시는 울 독자님들 최고^^ 그래서 깜짝 선물처럼 제 소설 당선작을 브런치에 올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 소설을 기다려주시는 독자님들께 문예지를 선물로 보내드릴까 생각했다가, 보통 일이 아닐 것이라 생각되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계속 울 독자님들 생각하고 있었던 제 마음 아시죠?^^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또 돌아올게요! 그땐 정말 진짜 대박 소식을 들고 돌아올 수 있기를 기도해주세요.
모두 사랑합니다. 굿나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