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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작가 Jan 11. 2022

싸이월드 일촌명:예전 그녀(6)

다시 잡은 손.

"오랜만이에요."

"전화해줘서 고마워. 연락 오기를 기다렸어."

"기다려줘서 고마워요."

"몇 년 만이지, 우리?"


여자와 남자는 반가움과 떨림이 뒤엉켜 심장이 거칠게 뛰고 있었다. 여자는 최대한 차분한 말투로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입에서 내뱉어지는 말에는 자꾸만 떨림이 묻어났다. 남자가 그 떨림을 알아채지 못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래서 더 차분하게,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말투로 말했지만, 감춰지지 않았다. 남자는 여자와 통화를 하기 전부터, 연락을 기다리면서부터 떨고 있었다.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여자의 떨리는 음성에 남자는 더 가슴이 뛰는 것 같았다.


남자는 궁금한 것부터 확인해야 했다.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있는 사진을 보니까, 남자친구가 있는 것 같던데.. 맞아?"

"아.. 두 달 전에 헤어졌어요. 정신이 없어서 함께 찍었던 사진을 정리하지 못했네요. 오빠도 여자친구처럼 보이는 분과 함께 찍은 사진을 봤는데.. 여자친구에요?"

"난 너보다 더 전에 헤어졌어. 네가 싸이월드 안 하는 동안 사진 다 지웠는데, 그건 아직 못 봤나 봐."


남자는 안심했다.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여자에 대한 오랜 미련을 사랑으로 바꿀 최적의 타이밍이라고 확신했다. 망설일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고 이제는 망설이지 않기로 했다.


"밤이 너무 늦었지? 우선 자. 너 공부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푹 자고, 내가 아침에 열 시쯤 집 근처로 갈게. 나와줄 거지..?"

"네. 열 시에 봐요. 잘 자요."

"응. 잘 자고 내일 봐. 고마워."


짧은 통화를 마쳤다. 두 사람이 오랜만이었던 만큼, 길고 긴 이야기를 주고받아야 할 것 같았지만, 몇 분간의 통화면 됐다.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 지난 이야기는 필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남자가 핸드폰 번호를 보냈을 때부터, 여자가 전화를 걸었을 때부터,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더 이상의 시간 내지는 긴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통화가 연결된 순간, 지난 몇 년간 잠겨있던, 서로를 향한 마음의 빗장이 열렸다. 연인이 되기 전 서로를 알아간다거나,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거나, 밀당한다거나 하는 것 따위는 이제 두 사람에게 필요하지 않았다.




통화를 마치자마자 곯아떨어진 여자는 여느 때처럼 5시부터 울리는 알람에 일어나지 못하고, 9시가 다 되어서야 눈을 떴다. 한동안 잠이 깨지 않아 베개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지난밤 남자와 통화를 했고, 당장 아침에 만나기로 했던 것이 꿈이었는지 생각하고 있었다. 


'큰일 났다!'


남자와 만나기로 했던 것이 현실이었다는 걸 깨달은 순간, 여자는 마음이 급해졌다. 준비할 시간이 한 시간도 남지 않았다니.. 왜 꼭 이런 날에는 늦잠을 자게 되는 건지, 아침잠이 많은 스스로를 탓하고 있었다. 중요한 약속인데 자기 전에 입을 옷도 정해놓지 않고 잠들어 버렸으니 마음이 더 급했다. 욕실로 뛰어 들어가 여자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를 내서 씻었다. 씻는 내내, 로션을 바르는 동안에, 머리를 말리는 동안에 어떤 옷을 입을지 고민했다. 


연보랏빛 맥시 나시원피스 위에 하늘하늘한 하얀 카디건을 걸쳤다. 선크림까지만 겨우 바르고 다녔던 여자는 오랜만에 비비크림을 찾아 고르게 펴 발랐다. 아이라이너를 그리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화장대 서랍을 이리저리 뒤지던 여자가 블러셔를 꺼냈다. 양볼에 핑크빛 블러셔를 톡톡 발랐다. 그리고 오렌지 빛 도는 립글로스를 발랐다. 준비를 다 마친 여자가 핸드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새 열 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그때 남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잘 잤어?"

"네."

"나 너희 아파트 쪽에 거의 다 왔는데.. 나올 수 있어?"

"네. 준비 다 했어요. 나갈게요."


집을 나선 여자는 앞머리가 바람에 날려 갈라질까 봐 신경을 쓰면서 천천히 걸었다. 자꾸만 걸음이 빨라졌다. 거의 다 도착할 때쯤에는 뛰고 있었다. 바람에 앞머리가 갈라지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독서실 마준 편, 아파트 담벼락 아래 가로등이 이어진 그 길로 뛰어갔다. 저 멀리 남자가 서 있었다. 여자도 남자도 서로 어디서 만나자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그곳에 가면 서로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가로등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가 남자와 여자에게 지난 몇 년간, 아프지만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섰다. 


"반가워요."


여자가 활짝 미소 지어 보이며 손을 한 번 흔들고는 내렸다.


"안녕? 반가워."


남자도 환하게 웃으며 여자가 자신을 향해 흔들었던 손을 잡았다.


가로등 아래, 두 사람이 다시 서로의 손을 잡았다. 남자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이 순간을 얼마나 그리워했었나. 이 순간이 얼마나 미련으로 남았었나, 이 순간을 얼마나 바라 왔었나... 만감이 교차한 남자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선택으로 여자와 어긋나 버렸고, 그래서 여자에게 돌아가면 안 된다는 걸 알았지만 남자는 지난 몇 년간 여자에게 가고 있었다. 여자에게 가는 길이 결국 여자에게 닿을 거라고 감히 생각하지 못했지만, 결국에는 이렇게 여자의 손을 잡고 있는 이 순간이 꿈만 같았다. 어렵게 잡은 여자의 손을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자는 지난날 남자에게 강한 이끌림이 있었지만, 한번 어긋난 인연은 절대 다시는 이어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가끔씩 남자가 생각날 때면, 아팠다. 무뎌질 만큼의 시간이 흐르지 않았나 싶었지만, 생각이 날 때면 아팠다. 여자가 외면하고 있던 남자에 대한 미련 때문이 아니었을까. 두 달 전에 남자가 싸이월드로 연락을 해 왔을 때만 해도 이렇게 남자의 손을 잡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지 못했다. 정말 사람 사이에는 인연이라는 게 있는 걸까. 보이지 않는 붉은 실이 두 사람 사이에 연결되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한 두 사람은 그렇게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제 우리 어떻게 되는 거예요?"


지난날 언젠가, 여자가 남자에게 던졌던 질문을 그대로 던졌다.


"답은 정해져 있잖아."

"그러니까. 그 답이 뭐나구요."

"넌 이제 내 여자야. 다시는 이 손 안 놓을 거라고."


미팅 날, 남자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의 여자가 되고 싶었다. 활짝 웃는 여자의 볼이 핑크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너 지금 부끄러운 거야? 볼이 빨간데?"

"아니에요. 내가 왜 부끄러워요! 이거 볼터치한 거예요!"

"아닌데. 너무 좋아서 부끄러운 것 같은데!"


여자 친구가 있었던 당시 남자의 상황 그리고 서로를 향한 강한 이끌림으로 인해 긴장되고 무거웠던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편해졌다. 예전 그녀 그리고 예전 그 남자, 과거의 인연이 아닌 연인이 된 두 사람이 가로등 길게 이어진 길을 걷기 시작했다. 손을 꼭 잡은 두 사람이 걷는 그 길은 한동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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