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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작가 Jan 09. 2022

싸이월드 일촌명: 예전 그녀(5)

미련을 사랑으로 만들고 싶어.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급하게 시작했던 자격시험 준비는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D-65에서부터 시작했던 시험날짜는 순식간에 D-10으로 성큼 다가왔다. 핸드폰 폴더를 열면 화면에 보이는 D-day 만 의식했을 뿐, 날짜도 모르고 지낸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여자는 늦은 밤까지 독서실에서 공부했다. 


밤 열두 시가 다 되어서야 여자는 가방을 챙겨 독서실을 나섰다. 독서실 건물에서 나오자마자 큰길에 횡단보도가 있다. 팔짱을 낀 채 발을 동동 거리며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렸다. 몸이 살짝 떨리는 것 같았다. 반팔에 반바지 차림이었던 여자가 가만히 선 채로는 오랜만에 느낀 추위가 몸을 떨게 만들었다. 무덥고 아팠던 만큼 길고 힘겨웠던 여름이 떠나가고 있었다.


"으, 춥다. 이제 가을인 건가?"


그날따라 신호가 길게 느껴졌던 여자는 줄곧 바닥을 향하고 있던 시선을 길 건너편으로 올렸다. 아파트 담벼락 아래로 길게 이어진 가로등이 저마다 열심히 빛을 내고 있었다. 문득, 그날이 떠올랐다. 가로등 불빛 아래 그려진 둘의 그림자마저도 설렜던 그날.  끝나지 않고 밤새 걸을 만큼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가로등 아래 그 길 아래 여자와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힘든 시작을 해보려 했지만 결국에는 제대로 된 시작조차 해보지 못하고 끝이 나 버렸던 그 남자 생각이 났다. 독서실에 오고 갈 때면 지나는 길 앞에서, 뜬금없이 왜 그날 밤에 그 남자 생각이 난 건지.. 초여름 헤어진 남자 친구 생각이 아닌 예전 그 남자 생각이 난 것이 어이없기도 하고 전 남자 친구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싸이월드..!'


예전 그 남자에게 짧은 비밀 답글을 남기고 싸이월드를 로그아웃 해 버리고 나서는 그 이후로 싸이월드에 로그인하지 않은 지 두 달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보행자 신호로 바뀌자마자 여자는 냅다 뛰었다. 늦은 밤 인적이 드문 길이 무서워서라는 핑계를 스스로 대고 있었지만, 사실 여자는 마음이 급했다. 빨리 싸이월드에 접속해서 남자로부터 답이 왔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띠띠띠띠띠, 삐삐 삐삐."


당연한 듯 단번에 누르고 들어가는 게이트맨 번호를 자꾸만 틀리고 있었다. 마음이 어지간히 급했나 보다. 불현듯 떠오른 예전 그 남자와의 인연이 그날 짧은 자신의 답글로 끝나버릴까 봐 초조했다.

게이트맨 소리에 잠에서 깬 여자의 엄마가 문을 열었다.


"왔어?"

"응. 엄마 깨워서 미안해요. 잘 자요 엄마!"

"그래. 고생했어. 너도 잘 자."


평소 같았으면, 잠에서 깬 엄마와 수다를 이어갔겠지만, 당장 한 시가 급한 여자는 엄마에게 짧은 인사를 마치고는 곧장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컴퓨터 앞에 앉았다.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콩닥거리는 것 같기고, 두근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의 심장박동이 느껴질 만큼 설레는 것이 오랜만이었다. 로딩이 끝나고 인터넷 창이 열렸다. 딸각. 마우스를 클릭해 싸이월드 창으로 갔다. 


"후..."


여자는 설레면서도 긴장되는 마음에 한숨이 터져 나왔다. 답이 없어도 실망하지 말자며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있었다. 


몇 달만에 접속한 자신의 미니홈피 방명록에는 여러 개의 글이 남겨져 있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기 전, 졸업 후의 진로 고민을 본격적으로 하기 전까지는 매일 싸이월드에 접속해 미니홈피를 꾸려가던 여자가, 여름내 소식이 뜸하자 안부를 묻는 글이 많았다. 여러 개의 글 중에, 비밀글이 두  개 보였다. 하나는 여자가 답글을 남겼던 그날 바로 작성된 글, 다른 하나는 몇 분 전에 작성된 글이었다. 예전 그 남자의 글이었다. 



오랜만이네. 여름 방학은 잘 보내고 있어? 싸이월드 접속할 때마다 네 홈피에 들어와 봤는데  여름 내내 소식이 없길래. 궁금하다. 네가.


여자는 남자가 몇 분 전에 그러니까 자신이 가로등을 보며 그 남자를 떠올렸던 그 시각에 글을 남겼다는 사실에 놀라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남자가 여자에게 텔레파시라도 보낸 걸까 하는 생각을 했다. 첫 만남에 서로에게 강하게 이끌렸던 만큼, 서로가 마음이 통하는 사이라서 이렇게 극적으로 타이밍이 맞은 걸까. 여자는 당장 손을 움직여 글을 남기기 시작했다.


오랜만이에요. 오빠. 지난번에는 제가 이래저래 마음이 복잡했어요. 여름 잘 지내셨죠?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자격시험 준비하느라 조금 바쁘지만, 잘 지내고 있어요. 


사실은 만나던 남자친구와 이별했고, 그 이별로 인해 정신이 없었고, 이별 후유증을 이겨내던 요즘이었으며 불현듯 오늘 남자 생각이 났었는데, 그래서 싸이월드에 접속했던 건데 딱 그때 남자가 글을 남겨서 놀랍고 반가웠다고 주저리주저리 적고 싶었지만, 우선은 자신의 근황이나 마음을 감추기로 했다. 지난날 남자를 향해 용기 냈던 결과로 결국에는 상처받았었기에 그 순간의 망설임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여자는 비밀 답글을 남기고서, 이번에는 로그아웃하지 않았다. 밀렸던 답글을 달며, 오랜만에 일촌의 미니홈피를 방문하고 있었다. 밀린 싸이월드 활동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을 남자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가 글을 남긴 지 오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떼, 쪽지가 왔다. 남자였다. 


궁금하다. XX야. 자격시험 준비 많이 바쁜 거지? 더운데 고생 많네.
010-1234-5678 이거 내 번호야. 너한테 연락 안 하려고 네 번호는 우리 마지막 통화 마치고 바로 지웠는데.. 후회했어. 그래서 메일도 보내고... 이렇게 싸이월드로나마 너에게 연락을 했어.. 연락 줘. 기다릴게.


예전 그녀 그리고 예전 그 남자, 서로의 일촌명처럼 예전의 인연일 뿐,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남자가 보낸 쪽지를 읽는 동안 여자는 첫날 느꼈던 그 강한 이끌림을 다시 느끼고 있었다. 여자는 과거와 다르게,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남자의 핸드폰 번호를 저장했다. 그리고 고민했다. 바로 연락을 해야 할지, 문자를 보내야 할지, 전화를 걸어야 할지. 잠깐의 고민을 마치고, 여자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망설임은 어렵게 닿은 인연을 놓치게 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통화음이 울리자마자, 통화가 연결됐다. 


"여보세요."


남자였다. 오랜만에, 몇 년 만에 듣는 그의 목소리였다. 




여자와 마지막 통화를 마치고, 여자의 핸드폰 번호를 삭제했다. 여자친구에게 돌아가기로 했으니, 그 결정에 최선을 다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짧은 만남이었던 만큼, 금방 잊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짧았던 만큼 미련이 더 남는 것 같았다. 누구에게도 이 미련을 드러내거나 말할 수 없었지만, 남자는 미련이라는 감정이 이렇게 아플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참고 참다가, 술기운에 여자에게 전화를 걸어보려 했던 적도 있다. 외운 줄 알았던 여자의 핸드폰 번호는 절대 기억나지 않았다. 다시는 나쁜 남자가 되지 말라고 무의식이 기억을 막고 있는 듯했다. 

군대 가기 전 날 밤에도 여자 생각이 났다. 예전에 여자와 통화 중에, 여자의 영어 이름 이니셜을 조합해서 만들었다던 이메일 주소가 떠올랐다. 군대 가기 전 마지막 날이니까, 무의식이 기억의 문을 살짝 열어줬던 모양이다. 


답을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그저 군대 가기 전날까지 자꾸만 생각났던 여자에게 마지막 인사는 하고 싶었다.


안녕. 나 XX야. 잘 지내지? 별 의미는 없고. 그냥 군대 가기 전날이라. 생각나서 보내는 거야. 잘 지내. 안녕


입대 후 전역하기까지 몇 년이 지나도 여자는 답이 없었다. 답을 기대했던 건 아니지만, 왜 아직까지도 여자의 답을 기다리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남자는 매일 메일함을 열어 여자의 답을 기다렸다. 


어느 날에 남자는 군대 가기 전에는 하지 않던 싸이월드를 시작하기로 했다. 미니홈피에 사진 몇 개를 올렸다. 여자의 이름을 검색했다. 이름이 특이해서였을까, 검색하자 바로 미니홈피가 하나 보였다. 미니홈피에 올라온 사진 속 여자는, 남자가 그토록 답을 기다렸던 예전 그녀였다. 헤어스타일이 바뀌었지만, 그녀가 틀림없었다. 막상 대화를 나눠보면 그렇지 않았지만 인상에서는 차가움이 느껴졌던 여자인데, 오랜만에 본 그녀의  얼굴에서는, 뭐랄까 온화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일촌신청을 했다. 일촌명은 뭐로 하면 좋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예전 그녀로 했다. 일주일 만에 일촌신청이 수락되었다. 남자는 방명록으로 가서 비밀글을 남겼다. 그토록 기다렸던 답이 생각보다는 금방 왔지만, 여자의 답에서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지 않다는 것이 느껴졌다. 


남자는 더 이상 답을 보내지 않았다. 습관처럼 기다렸던 여자로부터의 답을 받은 후, 여자에게 직진할 것인지, 멈춰야 할 것인지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다. 

여자와 인연을 이어가고 싶은 걸까, 그저 미련이 그리움이 되어 꼭 한번 만나보고 싶은 걸까.  

이번에 만난다면, 다시는 상처 주지 않아야 했다.


남자가 고민하는 동안, 그래서 글을 남기지 못하는 동안 여자는 싸이월드에 접속하지 않는 것 같았다. 거의 매일 흔적을 남기는 것 같았던 여자의 미니홈피에 두 달 가까이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걱정되고 궁금했다. 보고 싶었다. 당장 여자를 만나고 싶었다. 막연한 그리움이 구체화되었다. 남자는 이제 마음속 답을 찾은 것 같았다. 미련 속 여자가 궁금했다기보다는, 그저 그리웠다기 보다는 이제는 그 미련을 사랑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날 밤, 남자는 여자에게 두 달만에 글을 남겼다. 글을 남기고서 몇 분만에 답이 왔다.  두 달 전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자신과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어 하는 것이 느껴졌다. 용기가 생겼다. 싸이월드 쪽지에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적었다. 왠지 전화가 올 것 같았다. 그래서 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핸드폰을 손에 쥔 지 5분이 조금 넘었을까, 벨이 울렸다. 남자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통화 버튼을 누르면, 여자와 통화하게 될 것임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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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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