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후에.
여자는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학원에서 수업이 있는 날에는 일어나자마자 준비를 마치고 학원에 갔고, 그렇지 않은 날 아침에는 더워지기 전에 서둘러 근처 공원에 갔다.
새벽 기상을 해보겠다고, 매일 아침 알람을 5시부터 30분 간격으로 설정해 놓았지만, 어쩜 매일 실패했다. 7시 반에 울린 알람에 겨우 눈을 떴다. 이럴 거면 도대체 알람은 왜 매일 5시부터 맞춰 놓는 건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새벽에 일어나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한 여름 아침은 8시만 되어도 무더웠기에 세수도 하지 않고 썬크림만 대충 두드려 바르고 집을 나섰다.
나름 부지런하게 몸을 움직여 8시가 되기 전에 집을 나섰지만, 곧장 집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까 고민될 만큼 뜨거웠다. 머리로는 집으로 돌아가는 생각을 했지만, 몸은 공원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강하게 자신을 비추는 햇살이 버거웠다. 버거운 햇살이 마음속에 답답하게 뭉친 응어리를 녹이는 것 같았다. 응어리의 융해를 거부해보려 했지만, 강렬한 태양의 기운을 이길 방법은 없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답답하고 힘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많이 힘들었나 보다. 눈물이 나는데 멈출 수가 없었다. 발걸음이 어느새 공원에 닿았다. 공원을 걷는 내내 여자는 울고 있었다. 왜 자꾸 눈물이 나는 건지 생각하고 있었다.
'뭐가 이렇게 힘들었던 걸까, 뭐가 이렇게 답답했을까.'
대입에 성공하고 나면, 더 이상의 고민은 없을 줄 알았다. 대학에 입학하면, 대학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열릴 줄 알았다. 마지막 학기를 앞둔 그때까지 뚜렷한 길을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 자신이 걸어가게 될 길이 명확히 보이지 않아 불안했던 것 같다. 계획을 세워야 하고, 그 계획대로 돼야 안심이 되는 여자는, 어떤 계획을 세워야 할지조차 모르겠는 그 상황이 힘들었던 것 같다.
남자 친구와 이별하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벌써 이주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지난 이주 동안 여자는 이별했다는 걸 실감하지 못했다. 학원, 독서실, 집 내지는 공원, 독서실, 집.. 매일 똑같은 일상을 보내며 자격시험만 생각했다. 여자는 스스로 깨닫지 못했지만, 외면하고 싶은 것은 외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 남자친구와의 이별했다는 사실을 이주 동안 외면하고 있었다.
여자가 원해서 한 이별이었지만, 1년간 만난 남자친구와의 이별 후에 아프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맞다, 불확실한 진로문제도 힘들었지만, 여자는 이별 후유증 때문에 힘들었던 것이다. 여자는 이별 후유증으로 힘들다는 걸 깨닫고 나서 더 이상은 이별 후에 몰아치는 아픔이나 추억을 외면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야 제대로 이별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별이라는 건 한 순간에 이뤄지는 건 아닌가 보다. 이별의 순간을 보낸 후에도 한동안 이렇게 아파해야 하는 걸 보면 말이다. 두 사람이 스치는 인연을 잡아 서로가 서로의 마음에 닿고 연인이 되기까지, 만남이라는 것이 쉽지 않지만, 그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이 이별이 아닐까.
문득 남자친구가 보고 싶었다. 그의 빈자리가 새삼스레 느껴졌다. 남자친구에 대한 미련이 남은 건 아니었다. 이별을 번복하고 다시 만나고 싶은 건 아니었다. 지난 1년간 가장 가까웠던 존재의 부재를 실감하는 중이었다. 첫 만남 순간에서부터 시작해서 첫 키스를 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남자친구와 사귀기로 한 후에, 남자친구는 만날 때마다 친구들과 함께 나왔다. 사귄 지 한 달이 넘어가던 어느 날에도 여자는 남자친구와 친구들을 함께 만나고 있었다. 압구정 어느 술집에서 과일 소주를 마시던 중이었다. 새콤달콤한 과일 소주 맛에 여자는 취하는 줄도 모르고 홀짝홀짝 소주잔을 비웠다. 몇 잔을 마셨는지 기억하지 못할 만큼 꽤 여러 잔을 마신 후에, 여자가 옆에 앉아 있던 남자 친구에게 말했다.
"너는 나랑 왜 만나? 친구들이랑 만나는데 나를 끼우는 거야? 나를 좋아하기는 해?"
남자친구는 자신을 좋아하냐 묻는 여자친구의 질문에 알 수 없는 눈빛을 보냈다. 아무 대답이 없던 남자가, 볼이 상기된 채 눈이 풀린 여자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췄다. 몇 초간 이어진 입맞춤에 주위에 앉았던 친구들이 당황한 듯 정적이 흘렀지만, 곧 모르는 체하고 자기들끼리 대화를 이어갔다.
웅성웅성.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었지만, 여자와 남자는 둘만의 세상에 있었다.
"뭐야?"
평소 수줍은 눈빛으로 바라보던 남자친구가 저돌적으로 입술을 맞췄다. 당황스러웠지만, 그 당황스러움이 갑작스러운 입맞춤 때문인지, 그동안 못 느끼던 두근거림 때문인지 도무지 모르겠는 여자가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물었다.
"이게 대답이 됐을까?"
"무슨 소리야."
"너 좋아하냐고 물었잖아. 좋아하지. 좋아하니까 너랑 만나지."
"그럼 왜 사귀고 나서 매번 친구들을 데리고 나오는 거야? 나랑 둘이서 만나는 게 싫어?"
"네가 아직은 나를 좀 불편해하는 거 같아서. 둘이 만나면 어색해할까 봐. 여럿이 만나서 재밌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내가 편해질 것 같아서 그랬어."
여자는 생각을 멈췄다. 어느새 눈물은 멈춰 있었다. 남자친구와 함께한 순간을 추억하니 당장 느꼈던 이별 후 통증이 나아진 것 같았다. 여자는 이별 후유증은, 상대에 대한 생각을 덮어버리고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에 대한 생각이나 함께 한 시간을 추억하며 극복해 나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집으로 돌아온 여자는 목이 마른 줄도 모르고, 화장실로 곧장 들어가 샤워부터 했다. 땀으로, 눈물로, 지난 추억으로 젖은 몸을 씻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시원한 물로 샤워를 마치고 나온 여자는 어딘가 응어리진 채 답답했던 마음이 한결 편해진 것 같았다.
간단히 밥을 먹고 서둘러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다. 평소 한 시간이면 충분했던 산책 시간인데, 그날은 오전을 다 소비해 버렸기 때문이다. 독서실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여자는 그렇게 이별 후에 아픈 마음을, 이별 후유증을 이겨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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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가 이어집니다.
어제 부스터 샷 맞고 컨디션이 안 좋아서 분량이 살짝 짧아요.
읽어주시고 공감해주시고,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