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이작가 Jan 06. 2022

싸이월드 일촌명: 예전 그녀(3)

오늘 헤어졌어요.

"공부하러 빨리 가야 하지?"

"아니, 오늘은 좀 더 있다가 가려고."

"그럼 나야 좋지. 어디 가서 시원한 맥주 한잔 할까?"

"좋아. 맥주 마시자."


애정을 담아 바라보는 남자친구에게 헤어지자는 말이, 헤어질 때까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마침 남자친구가 맥주를 마시러 가자고 했다. 술기운에 기대어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언제부터인가 다정함이 없어진 눈빛에 초조했지만, 애써 모르는 체하고 있던 남자는 오랜만에 만난 여자친구에게 술기운을 빌어 고백할 생각이었다. 여전히 많이 좋아하고 있다고, 그러니 다시 자신에게 마음을 열어달라고.


해가 지고 하늘에는 어둠이 깔렸지만, 거리는 여전히 빛을 내고 있었다. 건물도 많고 유동인구도 많은  종로 거리는 해가 진 후에도 한낮과 다를 바가 없이 활기가 넘쳤다. 동상이몽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의 마음이 답답하고 괴로운 줄도 모르고 말이다. 우동집을 나와 몇 걸음 안 걸었는데, 호프집이 보였다. 시원한 맥주로 하루 동안의 시름, 더위를 날리려는 사람이 많았다. 자리가 없을까 걱정하며 호프집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스럽게도 구석에 작은 테이블이 하나 비어 있었다. 마주 보고 앉은 두 사람이 서로의 눈을 바라봤다.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두 사람이었다. 


여자는 어떻게 말해야 남자친구가 덜 아플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었다. 남자는 어떻게 말해야 여자친구가 예전처럼 마음을 열어줄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몇 분간 이어진 무겁고 답답한 공기 속 정적이 싫었던 남자가 괜히 씨익 웃었다. 여자는 남자친구의 미소에 미소로 답해줄 수가 없어 재빨리 손을 들었다.


"여기 주문이요. 안주는 뭐 먹을까?"

"아무거나. 너 먹고 싶은 걸로."

"여기 생맥주 500 두 잔이랑, 먹태 하나 주세요."


맥주가 나왔다. 종업원이 테이블에 맥주잔을 내려놓자마자, 남자는 맥주잔을 손에 움켜쥐어 입에 갖다 대었다. 답답하고 서운하고 서럽기까지 한 마음을 맥주잔에 화풀이라도 하는 것처럼 거칠게 움켜쥐고 목구멍으로 어떻게 넘어가는지도 모르게 꿀꺽꿀꺽 맥주를 삼켰다. 여자도 시원한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딱 이 한잔을 비우고 난 후에, 말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꿀꺽꿀걱 쉬지 않고 맥주를 목으로 넘겼다. 비어버린 맥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먼저 한 잔을 다 마신 남자는 여자친구가 다 마실 때까지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있잖아."


여자는 이제는 망설이지 않고 말하겠노라 생각했다. 그런 여자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걸까, 남자가 여자의 말을 끊었다.


"아니, 내가 먼저 말할게."

"그래."

"요새 우리가 서로 많이 바빴잖아. 자주 만나지도 못하고. 그래서 우리 관계가 조금 소원해진 것 같아. 권태기인 걸까 하는 생각도 해봤어. 나는 너에 대한 마음이 처음 그대로야. 아니, 점점 더 좋아하게 되었어. 너는 지금 권태기라고 느끼는 것 같아. 언제부터인가 통화하는 거나 만나는 거를 즐거워하지 않고 억지로 하고 있는 것 같았어. 만나다 보면, 권태기가 찾아오기도 하잖아. 그렇지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 나누고, 서로 노력하다 보면 그 시기를 이겨내고 더 돈독해지는 커플도 많더라고. 그러니까 우리 노력해보자. 네가 권태로운 마음을 잊고, 다시 나에게 마음 열어주기를 재촉하지는 않을게. 내가 더 더 잘할게. 오래 걸리더라도 기다릴게. "


숨도 쉬지 않고 참았던 말을 쏟아낸 남자였다. 오랜 시간 생각하고 고민하여 말문을 열었던 남자는 그렇게 속사포 랩을 하듯 마음속 이야기들을 뱉어냈다. 말을 마친 남자의 눈에는 얼핏 눈물이 보였다. 눈물이 나오려 했지만, 그 눈물 또한 여자가 부담스럽게 느낄까 봐, 그래서 자신을 떠나갈 까 봐 꾸역꾸역 참고 있었다. 


남자친구가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했을지, 여자는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이렇게 진심으로 자신을 붙잡고 있는 남자친구에게 마음이 가지 않는 자신이 밉기도 했다. 미안함에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밀어내고 떨쳐버리고 있던 많은 감정들이 몰려와 눈물로 쏟아지고 있었다. 한참 동안 여자는 울기만 했다. 울음을 그치고 답하려 했지만, 이 울음은 그날 밤 잠들기 전까지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여자가 입을 열었다. 여전히 울음을 그치지 못한 채였다.


"미안해."


우느라 겨우 내뱉은 한마디였다. 남자는 가슴이 미어진다는 느낌을 처음 느꼈다. 오늘 여자친구를 만나러 오면서, 아니 어제 만나자는 여자친구의 말을 들으면서, 아니 어쩌면 그보다 한참 전에 이미 남자는 이별을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만날 때마다 설렜지만, 그러면서 안정감까지 느껴졌던 둘의 연애가 끝을 향해 가고 있음을 이미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이 만남의 결졍권은 자신이 아닌 여자친구에게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더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약자라고 하지 않았던가, 남자는 자신이 절대적인 약자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미안해... 오히려 여자친구가 말로 내뱉어주니, 마음이 후련한 것 같기도 했다. 이제 더 이상 여자친구의 마음을 불안해하며, 이별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이별을 예상했기에, 자신이 약자였기에 남자는 여자친구의 한 마디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 알겠다는 그 말이 나오지 않아 그렇게 무거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말이 없는 두 사람이었다. 어느새 테이블에는 주문했던 먹태 안주가 올려져 있었다. 한 여름 해가 진 후, 에어컨 빵빵하게 돌아가는 시원한 호프집 안에서 사람들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두 사람이 앉은 구석 작은 테이블만 빼고 말이다. 두 사람이 앉은 테이블이 잘 보이지 않는 구석이라 다행이었다. 남자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앞에서 울고 있는 여자친구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옆으로 가서 눈물을 닦아 주고 싶었다. 손을 꼭 잡아 주고 싶었다. 안아주고 싶었다. 


흐느껴 울던 여자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미안해. 내가 마음의 크기가 작은가 봐. 너처럼 멋진 남자를 담지 못하다니.. 네 잘못은 하나도 없어. 내가 모자라서.. 정말 미안해. 그리고 고마웠어. 넌 정말 멋진 사람이야. 이건 진심이야."

"아니야. 내가 미안해. 그동안 고마웠어. 행복해야 해."

"응. 행복할게. 그런데 네가 나보다 더 많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남자는 이만하면 나름 괜찮은 이별이 아닐까 생각했다.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는 연애의 끝이라면, 오래도록 아름다운 기억으로 가슴에 남지 않을까..

여자는 이렇게 일방적인 마음으로 이별을 전하게 되어 미안했다. 부족한 자신 때문에 남자에게 아픈 기억으로 남자를 힘들게 할 것 같아 속상했다. 


"내가 먼저 일어날게."

"지금 너 너무 많이 울어서 내가 걱정돼. 내가 데려다줄게. 그것만 하게 해 줘. 부탁이야."


여자는 마지막까지 자신을 걱정하는 남자친구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알겠어. 고마워."




택시를 잡았다. 택시 안에서는 라디오 소리만 들릴 뿐, 택시 기사님과 남자 그리고 여자는 모두 말이 없었다. 라디오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윤하의 <오늘 헤어졌어요>였다. 하필 오늘 헤어진 두 사람의 귀에 닿은 노래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새하얀 머플러에 얼굴을 묻고

붉어진 눈을 깜빡이며 널 기다렸어

무슨 얘길 하고픈지 그 말

알것도 같은데 모르겠어

머쓱한 눈인사에 목이 메이고

한발 물러선 우리 둘 공간에 눈물 터지고

화가 나서 소리치듯 가란 내 말에

벌써 넌 아주 멀리 달아나 버렸어

오늘 헤어졌어요 우리 헤어졌어요

내 맘 알것 같다면 옆에서 같이 울어줘요

나는 안되나봐요 역시 아닌가봐요

얼마나 더 울어야 제대로 사랑할까요


귓가엔 심장소리 크게 울리고

지운 니 번호 지울수록 더욱 또렷해지고

언제부터 어디부터 멀어진건지

분명히 어제까진 날 사랑했는데

오늘 헤어졌어요 우리 헤어졌어요

내 맘 알것 같다면 옆에서 같이 울어줘요

나는 안되나봐요 역시 아닌가봐요

얼마나 더 울어야 제대로 사랑할까요


참 좋았어 너무 좋아서 더 아프죠

사랑에 또 속은 내가 미워

그냥 나오지 말걸 그냥 아프다 할걸

우리 사랑한 기억 그게 널 붙잡아 줄텐데

너는 내일을 살고 나는 오늘을 살아

아무도 아무것도 날 웃게할수는 없어

(오늘 헤어졌어요 우리 헤어졌어요)

내 맘 알것 같다면 옆에서 같이 울어줘요

나는 안되나봐요 역시 아닌가봐요

얼마나 (더 울어야) 제대로 사랑 할까요


연애를 막 시작했을 때 들어도, 안정적인 연애 중일 때 들어도 슬퍼서 눈물이 차오르던 이 노래가 하필 오늘 헤어진 두 사람이 탄 택시 안에서 흘러나왔다. 호프집에서부터 시작된 여자의 눈물은 노래가 끝날 때쯤에는 폭포수가 되어 하염없이 쏟아졌다. 여자에게 부담을 줄까 겨우 눈물을 참아내고 있던 남자도 울음이 터져버렸다. 눈물바다가 되어 버린 택시 안에서 유일하게 눈물을 흘리지 않고 운전에만 집중하던 한 사람이 말없이 휴지를 건넸다.


눈물에 시야가 가려져 여자의 집에 거의 다 온 줄도 몰랐다. 한참을 달리던 택시가 멈췄다. 


"도착했습니다."


기사님의 말에 남자가 눈물을 닦고 여전히 울고 있는 여자를 부축해 택시에서 내렸다. 마지막 모습이 그녀의 우는 모습이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에 남자가 들고 있던 휴지로 여자의 눈물을 닦았다. 여자에게 그런 남자의 마음이 전해졌는지, 여자는 남자가 건네준 휴지를 눈가에 꾹꾹 눌렀다. 숨을 깊게 내뱉었다. 하도 오래 울어서 길게 내뱉는 숨 속에 쉼표가 몇 번 있었다. 


"울지 마."

"응. 이제 안 울어."

"그래. 이제 들어가. 잘 지내야 해."

"응. 너도 잘 지내야 해."


여자가 뒤돌았다.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남자에게서 멀어져 갔다.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을 그녀의 뒷모습이었다.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마지막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뒤돌아서 걸어갔다. 걸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을 것 같았다. 뒤돌면, 남자친구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자신을 위해 기꺼이 이별해준 남자친구의 굳은 결심을 흔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연애가 끝났다. 지루했던 대학생활 중에 남자친구와 사귀는 동안에는 많이 웃고 즐거웠던 것 같다. 여자는 남자에게 미안했지만, 그보다는 고마운 마음이 더 컸다. 

남자는 여자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발걸음을 옮겼다. 당장은 아프지만, 괜찮은 이별을 했기에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 같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Xo52KCIayoo

윤하의 "오늘 헤어졌어요"


.

.

.

4부에 이어집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싸이월드 일촌명:예전 그녀(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