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을 고해야 할 시간.
휴학 한 번 없이, 쉼 없이 달려온 대학 생활이었다. 한 학기라도 쉴까 싶기도 했지만, 3개월 동안의 방학은 여자가 지루함을 느낄 만큼 길었다. 유럽여행을 한 달 넘게 다녀온 후 한 달간 인턴을 마치고, 어학학원에 다니고 놀만큼 놀아도 방학이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방학이 끝날 때쯤에는 휴학에 대한 생각이 사라지곤 했다. 그렇게 몇 번의 학기, 몇 번의 방학을 보내고 나니 어느새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두게 되었다.
한 학기만 더 다니면 졸업인 여자는 길고 긴 여름 방학이었지만 마냥 마음 편하게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보낼 수 없었다. 마지막 학기..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여자에게 부담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졸업 후 자신의 모습이 막연하게만 그려질 뿐, 아무리 고민하고 발버둥 쳐도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아 괴로웠다. 졸업 후에는 어딘가에 취직하게 되지 않을까 정도의 생각까지만 닿아 있었다. 휴학하지 않고 달려왔기에 졸업과 동시에 취업이 되지 않아도, 일 년 정도는 여유 있게 취업을 준비할 생각이었다. 평소에 성격이 급하지만, 이럴 때 보면 느긋한 편이 아닐까 싶은 여자였다.
지난해 여름방학에 우연한 기회로 무역회사에서 인턴을 했었는데, 그곳에서의 기억이 좋았었기에 그쪽으로 방향을 생각하고 있던 여자는 우선 여름방학 동안 국제무역사 자격시험 준비를 해보기로 했다. 삼성동에서 종로까지 학원을 다녀야 했지만, 한번 하기로 마음먹으면 최대한 빨리 해내야 직성이 풀릴 만큼 성격이 급한 여자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도 못하고, 뜨거운 더위 속에서도 더운 줄 모르고 학원에 다녔다.
학원에서 긴 시간 강의를 듣고 난 후에는 독서실에 다녔다. 수능 이후로는 독서실에 갈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몇 년 만에 다시 독서실에 가게 되었다. 여자는 학원, 집, 독서실에만 다니며 자격시험 합격에만 집중했다. 오로지 공부에만 집중하는 편이 나았다. 남자친구에게 권태로움을 느끼고 있는 것에 죄책감이 들어 괴로웠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으로 남자친구 얼굴을 보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공부 핑계를 대고 만남을 미룰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수시로 하던 남자친구와의 통화는 이제 아침에 한 번, 자기 전에 한 번 하루에 단 두 번이었다. 1년 동안 한 번도 싸우지 않을 만큼 안정감 있던 여자의 연애는 그렇게 끝을 향하고 있었다.
"여보세요."
남자친구의 전화였다.
"집에 갔어?"
"응 조금 전에."
"언제 볼 수 있어?"
"글쎄.."
언제 볼 수 있냐는 남자친구의 질문에 덜컥 부담감이 올려왔다. 진로 문제만으로도 마음이 터져버릴 지경으로 부담감이 꽉꽉 들어차고 있는데, 남자친구의 존재까지 부담이 되어 들어오니 미쳐버릴 것 같았다. 헤어지자는 말을 해서 남자친구에게 상처 주는 것보다는 소원해진 마음을 참아보기로 했던 여자는 마음을 바꿨다.
"내일 보자."
"그래. 오랜만에 보겠다. 신난다."
단호해진 여자의 목소리를 느끼지 못한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체 한 건지 남자는 마냥 신난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당장 내일이면 남자친구와 이별하게 될 여자였다. 남자친구가 부담스럽게 느껴질 만큼 남자 친구에 대한 마음이 작아졌지만, 1년 넘게 만나온 남자친구와의 이별 앞에서 마음 편할리 없었다. 여자는 주방으로 달려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다행히 냉장고 깊숙한 곳에 맥주 한 캔이 보였다. 안주도 없이 맥주캔을 따 단숨에 들이켰다. 무더웠던 여름, 냉장고 깊숙한 곳에서 오랜 시간 숙성되고 있던 맥주 한 캔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만큼 시원하게 느껴졌다.
늦은 시간까지 공부하다 집에 돌아오면, 남자친구와 형식적인 통화를 마치고 씻고 나면 바로 잠들어 버리곤 했다. 시원하게 들이켠 맥주 덕분인지 여자는 그날따라 피곤하지 않은 것 같았다. 오랜만에 컴퓨터 앞에 앉았다. 싸이월드에 로그인했다. 일주일 전쯤, 예전 그 남자가 보낸 일촌 수락을 한 후 처음으로 싸이월드에 접속했다. 남자가 비밀글을 방명록에 남겨 놓은 것을 며칠 만에 보았다.
잘 지냈지? 군대 가기 전 날에 메일 보냈었는데.. 답이 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막상 오지 않으니 서운하더라.
여자는 또 한 번 가슴이 철렁했다. 두근거림인 것 같기도 했지만, 당장은 그 감정에 대해 고민해 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마음이 복잡하고 힘들었지만, 그래서 남자의 글을 무시하고 싶기도 했지만 답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짧게 답을 보냈다.
오빠도 잘 지냈죠? 반가워요.
남자로부터 답이 올까 봐, 그의 답을 기다리게 될까 봐, 그와 대화를 하게 될까 봐 재빨리 싸이월드를 로그아웃 해 버렸다.
남자친구가 학원이 있는 종로 쪽으로 와주기로 했다. 미안하게..
언제나 강의실 맨 앞자리에 앉아 수업에 집중하던 여자는 그날만큼은 수업에 집중할 수 없었다. 집중하지 못한 만큼 지루하게 느껴졌던 길고 긴 강의가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건물 1층으로 내려왔다. 건물 안까지 들어와서 여자를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여자를 보자마자 달려왔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던지 말던지 그런 건 상관없이 여자를 꼭 껴안았다. 여자를 한 달 가까이 만나지 못했던 남자는 반가움에, 왠지 하룻밤 사이에 더 커져버린 애틋함에 그녀를 보자마자 안아버린 것이다.
여자는 평소 같았으면 사람들 많은 데서 주책이라며 등짝을 한 대 때렸겠지만, 그냥 안겨 있었다.
한동안 차가움이 느껴졌던 여자친구가 가만히 자신에게 안겨있는 모습에 남자는 안심이 되는 것 같다가, 이내 불안해져 버렸다. 속마음을 감춘 두 사람은 학원 건물을 빠져나와 길을 걸었다. 길을 걷는 동안 손을 잡고 있었다. 손만 꼭 잡은 채, 말이 없는 두 사람이었다.
"나 배고파."
"그래. 몇 시간 동안 수업 듣느라 힘들었겠다. 빨리 뭐 좀 먹으러 가자."
"여기서 지하철 역 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맛있는 우동집 있어. 거기 갈까?"
"그래 좋아."
가만히 있어도 땀이 날만큼 더운 여름날이었지만, 우동을 먹자는 여자친구의 말에 고민 없이 좋다는 말을 할 만큼 남자는 처음 만났을 때 그 마음 그대로 여자친구를 좋아하고 있었다.
날이 더워서 그런지 우동집 안에는 시원하게 에어컨이 가동되고 있었지만, 사람이 없었다.
"뭐 먹을래?"
"나는 유부 우동."
"여기 유부 우동 두 그릇 주세요."
남자는 평소보다는 차분한 모습이었지만, 평소처럼 여자 친구에게 적당한 유머를 구사하며 적당히 수다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여자도 남자친구가 던지는 유머에 웃어 주면서,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대화했다. 각자 우동을 한 그릇 씩 비울 동안 차갑고 어색했던 둘 사이의 공기가 편해진 것 같았다.
우동집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하늘이 붉게 노을 지고 있었다. 여자는 평소 같았으면 진작 독서실에 도착해 한창 공부에 집중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곧 거리에 어둠이 깔리겠지만, 여자는 당장은 집으로, 독서실로 갈 수 없었다. 남자 친구에게 말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헤어지자는 그 말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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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