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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윤 Apr 27. 2023

밤마다 찾아오는 작은 죽음 앞에서

아, 나는 내가 들어갈 무덤만큼만 자라면 되겠구나


밤마다 찾아오는 작은 죽음 앞에서

1년 넘게 불면증을 앓고 있다. 아무리 강한 수면제를 먹어도 잠이 오지 않는다. 지금도 새벽 4시에 깨어 이 글을 쓰고 있다. 문장이 엮이고 이어지다 보면 어느새 창밖으로 해가 떠올 테고 새 지저귀는 소리를 듣겠지. 내가 밤의 작은 죽음 속에서 표류하고 있어도 세상은 언제나처럼 아침을 부른다.


나는 출판사에서 일하는 N년차 편집자다. 며칠 전 내가 만든 새 책이 나왔다. 한 권 한 권 책을 만들 때마다 이제는 ‘만든다’는 느낌보다는 ‘쳐낸다’는 느낌이 더 많이 든다. 일에서 이렇게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뭐 어때. 다들 이렇게 쳐내면서 살아가는 거지, 싶기도 하고. 모르겠다. 그간 책 만들기에 너무 큰 사명을 부여해왔나. 얼마 전 부장님이 농담 삼아 건넨 “나무에게 미안하지 않아요?”라는 말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이다.


상처받으면 상처받은 만큼만 아파하면 되는데, 나는 그게 제일 어렵다. 바늘에 찔리면 바늘에 찔린 만큼만 아파하면 되는데, 독이 퍼지는 바늘도 아닌데. 나는 여전히 손톱 밑의 작은 가시에도 뚝뚝 운다. 그래. 나무에 미안하고 장미에 미안하고 한갓 구름에 속죄하며 산다.


나중에 내가 들어갈 무덤만큼만 생각하면 된다. 꼭 그만큼만 자라면 된다. 내 생의 무게는 무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밤의 작은 죽음 앞에서 뒷걸음질 치는 건 왜일까? 모든 사람에겐 회복되어야 할 권리가 있다. 밤의 작은 죽음 덕분에 우리는 어제를 뒤로하고 또다시 상처 없는 마음으로 내일을 산다.


열일곱 살 때도 꼭 이랬다. 아침만 되면 울었다. 밤에 잠을 자지 못해 울었다. 살아 있는 게 분해서, 억울하고 서러워서, 이토록 죽고 싶은데 죽지 않아 분해서 울었다. 밤의 작은 죽음은 곧 회복의 시간이다. 단순히 육체가 쉬는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부활하는 시간이다. 어제와의 시간이 끊기면서 내일 다시 살아갈 힘을 준다. 삶이 연속되는 것이 싫다. 죄투성이로 살아가는 게 싫다. 매일 다시 태어나고 싶다. 아무런 죄도 없고 순전한 속죄양처럼.


회사에서 동료로 같이 일하는 편집자 겸 작가의 새 소설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우린 지옥을 물려받았어.” 나는 매일 내게 잠들지 못하는 밤을 물려준다. 이것 또한 작은 지옥이리라. 불면은 작은 지옥, 오직 한 사람에게만 허락된 일인용 지옥.


잠 못 드는 이에게 매일 오는 아침은 잔인하다. 때로는 영원히 밤만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가도, 때로는 아예 잠들지 못하니까 밤도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어제의 상처를 계속 안고 구질구질한 마음으로 아침을 맞이한다.


잠을 못 자서 유일하게 좋은 점은 새벽 시간 아무도 없는 고요한 곳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다는 점이다. 이때는 담뱃불이 필터를 태우는, 타들어 가는 가장 작은 소리까지 들린다. 새벽에 찾아오는 가장 작은 불씨. 그것만이 나의 위안이다.


20대 초반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담배를 피우면서 불꽃 끝에 손가락을 대보고 싶었다고. 사람의 물렁한 살을 가진 주제에, 불꽃이 너무 예뻐서 한번 닿아보고 싶었다고. 여전히 그런 마음으로 산다. 여전히 그런 마음으로 행동한다. 결국엔 닿고 만다. 불꽃을 안는 심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해왔다.


홍진경이 그랬다. 행복이란 무엇이냐고. 밤에 자려고 배게 위에 머리를 누였을 때 아무 걸리는 것 없는 게 행복이라고. 그렇다면 나는 좀 퍽 불행한 인간이다. 밤의 작은 죽음 앞에서 나는 죽지못해 사는 불면증 환자니까.


아침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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