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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빛 Jul 28. 2021

엄마들은 무고하지 않다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을 읽고

엄마들은 무고하지 않다

ㅡ<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을 읽고


이 소설은 게임을 잘 못해서 왕따를 당하는 어린 아들과 그 아들에게 ‘게임 과외’를 붙여주려다가 자신이 게임을 배우게 되는 ‘당신’에 관한 이야기이다. 자식을 애지중지하며 키우는 이 엄마는 아들이 왕따를 당하는 것을 자신의 탓이라고 여기며 책임을 느낀다. 사실 그녀의 양육방식은 아들을 한 명의 자립적인 개인으로 키우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솔직히 당신은 가끔 당신 아이가 되고 싶다”는 말에서 잘 드러나는 것처럼 아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아들의 성공을 통해 자신의 어두운 과거가 보상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당신’은 아들이 성공하는 것만이 자신의 존재이유라고 여긴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이 경쟁에서 승리하고, 사회의 계급구조에서 높은 서열을 차지하는 것에만 큰 관심을 둔다. 이는 성공만이 최우선적이라고 생각하며 경쟁을 부추겨온 한국 사회의 성장 중심주의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사실 이러한 욕망을 ‘당신’만의 유별난 것으로 치부하기 어렵다. 예전부터 교육은 계급 재생산을 위한 투자수단으로 여겨졌고, 성적으로 분업된 재생산 노동의 일부로 편입되면서 엄마들의 몫으로 여겨졌다. 몇 년 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스카이 캐슬’에서도 잘 그려지고 있듯이, 아이를 경쟁에서 승리시키는 것이 엄마들의 승리로 여겨지는 문화가 아직도 여성들에게는 존재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이 소설에서 게임은 단순히 PC게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흔히 우리가 플레이어가 돼서 컴퓨터를 통해 참여하는 PC게임을 의미하는 것과 동시에, 아들을 자신의 캐릭터 또는 아바타로 삼아 엄마들이 벌이는 현실 게임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 게임의 목적은 아이가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고 이 게임에는 승리하기 위한 몇 가지 조건들이 있다. 소통능력, 가정환경, 키, 성적, 인기, 이성 친구를 사귄 횟수 등으로 이루어지는 이 조건들은 아이 엄마가 아이를 학급의 다른 친구들과 비교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당신 아이는 특별하다. 과장도 농담도 아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두루 재능을 보이고 여느 아이들보다 끈기도 있다. 다만 소통능력이 조금 떨어지는 편인데, 당신 나름대 로 내린 진단에 따르면 그건 아이의 탓이 아니라 다른 아이들과 수준을 맞추기 어려 워서 그런 것이다.


경헌이라는 아이는 여러 분야에서 당신 아이와 엎치락뒤치락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가정환경은 당신 아이만 못하지만 그렇다고 눈에 띄게 처지는 편은 아니고, 키 하나 는 5학년 중에 최고로 크다. 성적은 과목마다 당신 아이보다 하나씩 덜 맞거나 더 맞 거나 했고, 5학년이 된 지 얼마 안 돼 여자 친구를 세 명이나 사귄 인기인이다.



‘당신’은 이러한 게임의 룰에 철저히 순응하고, 이 게임의 부조리함에 대해 아무런 비판의식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이 게임은 ‘성장 중심주의’뿐만 아니라 ‘남성중심주의’라는 룰에 의해 지배되는데, 다음과 같은 K대생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



남자애가 게임 못하면 아무래도 또래 집단에서 발언권이 약해지죠. 남자애들은 서열 이 중요한 거 아시죠? (...)요새 대한민국 십대 이십대 남자들은 다 페이커를 숭배한 단 말이에요. 왜냐, 단순해요. 게임을 잘하니까. 그게 다예요. 연봉 높지, 여자애들한 테도 인기 많지.



‘서열’과 ‘여자’를 얻기 위한 퀘스트. 집단 내의 서열로 ‘성공’여부를 판별하는 남성의 생애 서사. 그렇게 상위 랭크에 오른 남자애들은 ‘보상’의 일환으로서 여성을 바라본다. 이때 여성은 남성에게 주어지는 보상물 따위로 대상화된다. K대생은 당신을 성추행함으로써 직접 보여주기까지 한다.



K대생과 같은 학교출신인 당신의 남편 역시 상위 랭크에 올라있다. 물론 연륜이 있는 남편은 좀 더 노련하게 ‘보상물’을 다룬다는 차이가 있다. “결혼했다고 긴장 푸는 여자들하고 달라서 당신이 좋아” 아이의 체형만큼이나 엄마의 외모도 아이의 교우관계와 평판에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당신’은 ‘자발적으로’ 피부과에 간다. 이렇게 아내에 대한 칭찬과 엄마에 대한 평가는 서로 연결된다. 여성의 신체는 남편의 위신을 높여주거나 자녀의 자신감을 올려주는 장치로 전환되는 것이다. 연령을 막론하고 또래집단에서 ‘발언권’은 이렇게 생성된다. 그러니 “남편이 했던 평가와 아이가 그날 전해준 이야기가 완벽하게 포개진다” (김건형)



김건형은 “‘당신’은 남성 청소년의 주체화가 젠더적 위계화와 엄마인 ‘당신’을 직접 겨누는 여성혐오를 동반한다는 것까지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고 하며 '당신'의 무지와 무구함을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 아이와 아이의 친구 경헌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충분히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제대로 된 주체화를 경험했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그러한 남성문화를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방관하고 그러한 문화를 만드는 데에는 ‘당신’이 더 큰 기여를 했다는 점을 김건형은 간과하고 있다. 즉, 이러한 남성문화를 만든 것에는 엄마들이 무고하지 않으며, 희생자라기보다는 공모자라고 나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남성중심주의로 인한 성차별이 무엇인지 분명히 인지하면서도 그것을 그대로 묵인하거나 회피하거나 되레 동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게임의 아이템트리를 외우듯, 현실 경쟁에서의 승리조건이 무엇인지를 꿰고 있는 ‘당신’이 여성으로 태어난다는 것과 남성으로 태어난다는 것이 어떤 차이와 의미를 지니는지 정말로 몰랐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게임을 가르쳐주는 여자 선생을 처음 보고, “구부정한 어깨와 잡티가 많은 피부와 짙은 눈 밑그늘에 점수를 매”기는 ‘당신’은 여성에게 부여된 젠더규범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여성이 이 사회에서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행여나 이 사람이 내 아이의 첫사랑이 될 일은 없겠다”고 생각하는 ‘당신’은 외모로만 여성을 평가하는 남성중심주의의 선봉에 선다.



김건형은 “아들을 관리하는 것”이 “여성으로서 인권이 침해되었던 야만적인 과거와 단절하려는 투쟁”이라고 보지만, 사실 이는 투쟁이라기보다는 회피에 가깝다. 여성으로서 인권이 침해당했던 과거와 단절하기 위해서 아들에게 자신의 왜곡된 욕망을 투사하는 것은 방어기제의 일종이다. 방어기제를 사용한다는 것은 자신의 잘못된 과거를 제대로 바로잡거나 직시할 용기가 ‘당신’에게는 없다는 말이다.



과거와 단절하고 투쟁을 한다는 것은 그러한 과거를 만들어낸 잘못된 문화나 이데올로기를 고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의미하겠지만,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예로서, K대생이 ‘당신’을 성추행하지만 그녀는 단지 멈추라고만 말한다. 자신의 몸을 방어하는 가장 소극적인 차원의 대응으로서만 끝날 뿐 경찰에 신고하거나 K대생을 처벌함으로써 그의 잘못된 성관념을 바로잡으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K대생이 ‘당신’을 모함하는 거짓 강사 후기를 올렸을 때도 고객센터에 전화하는 것으로 일을 무마시키려 한다.



여성이 남성보다 게임을 못하는 존재라고 단정하는 언어인 ‘혜지’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도 당신은 모욕감을 느끼기보다는 지배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은 기존의 젠더규범을 옹호한다. “‘당신’은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게임을 못하는 건 맞지 않느냐고 생각한다. 실제로 지금 ‘당신’을 가르치는 여자도 K대생보다 낮은 리그에 속해있으니까.”



여성이 단순한 대상으로 전락해버리는 그러한 현실에 ‘당신’이 동조하는 까닭은 게임의 룰을 바꾸는 것보다 눈앞의 승리를 거머쥐는 것이 빠르고 쉽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돼지승’, ‘느그엄마’ 따위의 아이들이 쓰는 혐오발언이다. 이러한 폭력적인 언어는 경쟁에 치우친 문화와 남성중심주의 이데올로기가 혼합되어서 만들어진 괴물이다. 그러한 괴물에 직면하여, 결국 ‘당신’은 가상의 게임에서 어린아이를 상대로 화풀이하다가 눈물을 흘리고 만다.



결국 이 게임에는 승리자가 없었다. 게임에서 승리를 거둬도 그 승리는 차별과 혐오라는 그림자를 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괴물을 낳은 장본인은 다름 아닌 당신이었다. ‘우리의 엄마들이 우리보다 잘하는 게임’이 만들어낸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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