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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이데올리기의 재생산, <라이온킹>실사

기존 서사를 체택함으로서 나아진 게 없었다.

by 이슬빛

내 나이 또래의 20대 청년이라면 귀여운 어린 사자가 어려움을 이겨내고 악당을 물리쳐 공동체의 질서와 평화를 가져온다는 디즈니판 성장소설 ‘라이온 킹’을 기억할 것이다. 아련한 추억마저 불러일으키는 애니메이션이 디즈니에서 실사판으로 리메이크됐다. 심바(남성)의 역할보다 날라(여성)의 역할이 부각되었다는 점만 빼면 기존영화의 스토리와 구성을 충실히 재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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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문화에 의해 꾸준하게 학습된 결과로, 기존의 성역에 너무나 익숙하다. 이 문화를 이루는 것은 상상력이다. 남성성과 여성성을 규정하는 법과 규범, 권리와 의무는 대부분 생물학적 실체보다 인간의 상상력을 더 많이 반영하고 있다. 남자는 단지 XY염색체와 고환 같은 특정한 생물학적 속성을 지닌 사피엔스를 일컫는 것만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가 속한 사회가 상상하는 인간의 질서에서 특정한 자리에 맞는 존재를 일컫는다. 그가 속한 문화의 신화들은 그에게 특정한 사내다운 역할(예컨대 정치 참여), 권리(예컨대 투표권), 의무를 부과한다. 여자도 마찬가지다. 여자란 두 개의 X염색체와 하나의 자궁, 많은 에스트로겐 호르몬을 지닌 사피엔스를 말하는 게 아니라 어떤 상상의 인간질서에 속하는 여성 구성원을 말한다. 그녀가 속한 사회의 신화들은 그녀에게 독특한 여성다운 역할(아기를 키운다), 권리(폭력으로부터 보호), 의무(남편에게 복종)를 부과한다.


이런 신화를 퍼뜨려오는 데에 일조한 것이 바로 디즈니메이션이다. 한때 디즈니메이션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를 퍼뜨리는 데에 일조했다. 디즈니의 예전 영화들을 보면 여성캐릭터의 수동적 역할이나, 순종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라이온 킹>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과거의 ‘라이온 킹’에서 여성 캐릭터로 대표되는 암사자들은 프라이드 랜드의 지배자가 수사자임을 당연시 받아들인다. 프라이드 랜드에 위기가 닥치더라도 암사자들은 본인의 힘으로 위기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장면들은 사회 속 여성의 모습을 남성을 위한 보조자의 역할 혹은 순종적 대상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영화의 OST는 이런 가부장제 문화를 못 박는 역할을 한다. OST ‘자연의 섭리’는 “이것이 삶의 순환, 우리가 각자의 자리를 찾을 때까지, 삶의 순환”란 내용을 담고 있다. 성과 계급 역할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야한다는 뉘앙스를 암시하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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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러한 영화를 보면서 자라난 아이들은 커가면서 하나의 프로젝트를 수행한다. ‘남자 되기’, ‘여자 되기’라는 복잡하고 요구사항이 많은 프로젝트. 남성적 특질이나 여성적 특질은 대부분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회도 남성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남자로 쳐주지 않고 여성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여자로 쳐주지도 않는다. 게다가 이런 자격은 한번 얻었다고 해서 계속 안주할 수 있는 월계관도 아니다. 남성은 자신의 남성성을 요람에서 무덤까지 평생 끊임없는 의례와 퍼포먼스를 통해서 증명해야 한다. 역사를 통틀어 남성들은 오로지 남들에게서 “그는 진짜 남자야”란 말을 듣기 위해서 기꺼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거나 심지어 목숨을 바쳐왔다. 여성의 일도 끝나는 법이 없다. 여성은 평생 스스로와 타인들에게 자신이 충분히 여성적이라는 사실을 확신시켜야 한다. 그 첫 단계가 유아기에 <라이온 킹>과 같은 애니메이션을 보며 등장하는 캐릭터를 롤 모델로 삼고, 거기에 자신을 맞추어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남자다운’ 속성과 ‘여자다운’ 속성의 내용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현대 아테네와 고대 아테네에서 여성에게 기대하는 속성은 행동과 욕망, 의상, 심지어 자세까지 큰 차이가 있다. 현대의 여성은 과거와는 다르게 판사가 될 수 있고, 공직에 취임 가능하고,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갖는 등 매우 주체적으로 변했다. 디즈니도 바뀌기 시작했다. 시대가 변했기에 그에 따른 비판을 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픽사가 제작한 <슈렉>과도 같은 혁신적인 캐릭터가 호응을 얻는 것과 정치적 올바름을 강조하는 미국 내 정치환경 변화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래서 최근의 리메이크작들은 주체적인 여성상을 강조하며, 남성과 비슷하게 또는 더 많이 활약하는 모습을 영화에서 보인다. <라이온킹> 리메이크작도 이 공식에 충실히 따른다.


그러니 조금은 나아졌다고 보아야 하는가? 그러나 라이온 킹은 가부장제의 문화를 그대로 투영했을 뿐 아니라 강자중심의 계급주의 또한 강하게 담고 있다. 극의 배경이 되는 프라이드 랜드에선 태어난 시점부터 계급이 정해져 있다. 그리고 이런 상하관계는 뒤바뀌지 않는다. 관객들이 무의식적으로 이런 이데올로기를 습득하게 되는 것은 예고편을 통해 처음 이뤄진다. 바위산과 암벽에 서있는 심바가 중심이 되어 배치되며 그를 우러러 보는 동물들은 아래 혹은 뒤쪽에 배치된다. 이런 구도를 통해서 절대 권력을 지닌 지배자 층과 피지배자 층의 계급적 분리를 정당화 시킨다. 과거에는 이 장면이 포스터에도 담겨 있었다. 각자의 자리를 지킬 것을 요구하는 OST의 가사가 가부장제는 탈피했을지 몰라도, 계급주의에 대해서는 아직 유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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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보면 세 가지로 나뉘는 계층은 미국 사회의 모습을 대변한다. 동물 세계의 주류이자 지배층이라고 할 수 있는 사자 무리는 백인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반면에 사자 무리에 도전하고, 기존 질서를 전복하려고 하는 하이에나 무리는 자연스럽게 미국 사회 내에서 소외된 이민자들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쫓겨난 심바를 보살펴주며 그와 우정을 쌓는 ‘품바’와 ‘티몬’이 사는 세계는 보헤미아 공동체를 상징한다. 왕으로서 자신의 지위를 자각한 심바가 권력을 쫓게 될 것을 걱정하며, “쟤는 인생 망했어.”라고 말하는 이들 보헤미아들은 주류의 가치를 우습게 여긴다. 대신 지위에 대한 집착을 떨쳐버리고 근심, 걱정 없는 “하쿠나 마타타”의 삶을 살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심바가 뒤도 안돌아보고 ‘보헤미아’ 공동체를 떠나는 장면은 승자는 주류의 가치체계 내에서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성과주의’의 고루한 이데올로기를 답습한다. 이러한 점에서, <라이온 킹>은 보수우익캠페인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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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온 킹은 햄릿에서 모티프를 가져왔다. 아버지를 죽이고 왕좌를 빼앗은 삼촌에게 복수한다는 스토리는 일부 사회에서 보이는 신화이다. 사자라는 친숙한 동물을 캐릭터로 설정한 것은 특정문화를 보편문화로 둔갑시키려는 의도이며 미국의 팍스 아메리카의식(=기존의 강자였던 영국을 계승한 미국이 빼앗긴 패권을 되찾음으로서 질서를 회복한다)을 보편의식으로 둔갑시키려는 의도의 연장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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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잉? 비슷하네..ㅋㅋ

여기저기에서 실사화하는 선택이 결과적으로 '득'보다 '실'이 많은 것이었다는 지적이 계속되고 있다. 애니메이션만의 장점(과장된 몸짓과 표현, 화려한 연출)을 버리고 연출의 한계 때문에 극이 뚝뚝 끊어지는 것이며, 어색한 표정 등의 단점까지 취해가면서 리메이크할만큼 재현해야 할 서사였나?


디즈니메이션은 하나의 문화콘텐츠이다. 그러나 디즈니 영화는 기존질서를 부수는 망치와 같은 역할보다는 기존질서를 재생산하고 매력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역할을 해왔다. 문화의 힘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그리고 학습되는 것이기에, 그 속에 담긴 생각과 메시지가 중요하다. 애시 당초 만화스튜디오에 불과했던 디즈니가 하나의 제국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도 문화의 힘이 막강하기 때문이며, 그것을 잘 활용했기 때문이 아닐까? 게다가 영화의 대상이 모든 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며, 앞으로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있어 중요한 시기에 있는 유아라는 사실을 고려했더라면, 디즈니는 리메이크에 대해 좀 더 고민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이제는 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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