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은 진보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영화일까? ‘디즈니’라고 썼는데, ‘문화제국주의’라고 읽히던 때가 있었다. <라이언킹>, <타잔>, <라푼젤>, <인어공주> 등이 지금도 눈 시퍼렇게 뜬 채 살아있는 증거다. 해당 작품들에서 제 3세계는 백인들의 시각에서 ‘보여지는’ 대상이 되며 여성은 사랑을 위해, 즉 남성을 위하여 자신의 삶과 주체성을 상실한다.
디즈니 영화들의 최근 리메이크들은 이러한 비판을 극복하려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사람들은 <알라딘>을 대표적인 예로 꼽는다. 원작과 달리 주체성을 획득한 자스민(나오미 스콧 분)의 변화가 가장 두드러진다. 원작에서 자스민의 저항이 섹스어필을 통한 미인계였다면 <알라딘>은 ‘나’를 주어로 한 일인칭의 노래이자 다짐이었다. 권력자 자파(마르완 켄지 분)의 시선을 끌기 위해 입을 다문 채 키스해야 했던 자스민이 입을 열자 그 안에는 자유와 저항이 담겼다.
자스민의 변화는 고정된 제도권에 질문을 던졌다. ‘여자는 술탄이 될 수 없다’는 법 앞에서 자스민은 침묵하지 않는다. 자스민이 부른 노래인 ‘Speechless'는 차별의 역사를 자료가 아니라 당사자의 진술과 표정으로 전달한다. 노래에는 “돌에 새겨진 모든 규칙, 모든 말이 몇세기 동안 바뀌지 않았다.”는 현실 고발이 나오며, “이제 이야기는 끝났어”라는 의지가 등장한다. 자스민은 끝내 아그라바 최초의 여성 술탄이 된다. (https://brunch.co.kr/@goodwriting/94)
이러한 근거들을 토대로 <알라딘>은 이전 디즈니 영화와는 궤를 달리 하며 진보를 성취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정말 그럴까? <알라딘>을 통해 디즈니는 이전에 쏟아졌던 “보수우익캠페인”라든가 “문화제국주의”라는 비판을 극복할 수 있을까?
제도권 안이 아닌 제도권 밖에서 목소를 내는 것과 같이 보여지는 자스민은 버지니아 울프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어느 가을에 케임브리지 대학을 다녀온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그녀는 케임브리지에 갔을 때 트리니티 칼리지 도서관을 둘러보기로 했다. 밀턴의 <리키다스>와 새커리의 <헨리 에스먼드 이야기> 원고를 살펴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서관에 발을 들여놓으려 하자 “은처럼 빛나는 친절하고 겸손한 신사”가 나타나 낮은 목소리로 칼리지의 펠로와 동행하거나 소개장을 가져오지 않으면 여자는 도서관에 들어올 수 없다“고 말했다. 울프는 우울한 목소리로 여성의 열등한 지위를 밑받침하고 있는 크고 당당한 기둥 하나, 즉 여자들이 평등한 권리에서부터 고등교육까지 박탈당하고 있다는 사실과 맞선다.
많은 여자들이 이런 사건을 겪으면서 상처를 받았겠지만 정치적으로 대응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자기 자신이나 자연이나 신을 탓할 뿐 다른 방도를 모색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사실 역사적으로 여자가 남자와 똑같은 교육의 권리를 누린 적은 없지 않은가. 영국의 가장 유명한 의사들과 의회의 정치가들 역시 여자의 정신이 생물학적으로 남자보다 열등하며, 그것은 두개골의 크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따라서 어떤 여자가 자신을 도서관에 들여보내지 않은 신사의 동기를 의심할 권리가 있겠는가?더군다나 그 신사가 정중하게 미소를 띠고 사과를 하면서 이야기를 했는데.
그러나 울프는 쉽게 입을 다물지 않았다. 그녀는 전형적인 정치적 전략을 구사하여, “도서관에 입장이 허용되지 않는다니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을까?”하고 묻는 대신 “나를 들여보내지 않다니 도서관 문지기에게 무슨 문제가 있을까?”하고 물었다. 관념이나 제도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할 때는 고통의 책임을 아무에게도 묻지 못하거나 고통을 겪은 당사자에게 묻게 된다. 그러나 정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아니라 관념이 문제일지도 모른다고 상상하게 된다. 수치감에 싸여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을까?(여자라는 것일까?)”하고 묻는 대신 “나를 비난하다니 다른 사람들이 틀렸거나, 부당하거나, 비논리적인 것이 아닐까?”하고 묻게 된다. 이것은 자신의 무죄에 대한 확신에서 나오는 질문이 아니라, 자연주의적인 관점이 이야기하는 것과는 달리 제도, 관념, 법은 어리석고 편파적이라는 인식에서 나오는 질문이다.
자스민도 버지니아 울프와 똑같은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스민의 처한 환경과 상황이 버지니아 울프와 같지 않다는 것이다. 자스민도 정치를 한 것이기는 하나, 시스템 밖에서의 정치적 저항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것이 디즈니가 가진 한계를 보여준다. 자스민도 최고 권력자의 딸이자 궁전이라는 틀 안에 사는 기득권이었다는 점에서 과연 버지니아 울프처럼 시스템 밖의 사람이었는가 하는 의문을 들게 한다. 결국에는 그 법도 온전히 스스로가 쟁취한 게 아니라 영화 막바지에서 전통적인 기존 질서의 최고권력자(영화 배경 아그바다의 왕이자 자스민의 아버지)의 결정으로, 마음대로 선언한 결과로 바뀌지 않는가? “몇 세기동안 바뀌지 않는 법”에 저항하겠다고 했던 자스민의 다짐이 허망해지는 대목이다. 이는 마치 '공직에 나설 수 없다'고 주장되었던 이반카 트럼프가 아버지 도널드 트럼프와 학벌에 힘입어 현재 대통령 보좌관직을 수행하고 있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침묵하지 말라”고 외치는 <알라딘>의 자스민 공주뿐만 아니라 최근 개봉하는 디즈니 영화 전체(<라이온킹>의 ‘랄라’, <토이스토리4>의 보 핍)가 이런 흐름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는 시대에서 나아간 것이 아니라, 단지 시대를 반영한 것에 불과할 뿐이다. 미셸 오바마나 힐러리 클린턴에서 보여지듯이 미국에서는 (인사이더로서의 일정한 조건만 충족시킨다면) 여성이 높은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형식적인 평등에 지나지 않으며, 미국이 ‘이렇게 평등한 나라이다’라는 구호를 선전하기 위한 용도로 활용되지 않는가? <왕좌의 게임 시즌 8>에서 여성뿐만 아니라 이민자, 아웃사이더, 하층민들을 정치세력화하여 기존 기득권 질서의 전복을 통해 진정한 혁명을 꿈꿨던 대너리스 여왕이 갑자기 광인이 되었듯이 급진적인 변화를 두려워 하는 이데올로기가 <알라딘>에도 반영되어 있다고 본다. "모든 이들이 계급과 인종에 관계없이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싸웠던 급진적인 여왕 대너리스는 제거되었다. 모든 것이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왕좌의 게임 시즌8>의 대너리스
사실 <알라딘>에서 묘사되는 세계는 이슬람 문화의 껍데기를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실상은 미국 그 자체이다. 왕궁을 둘러싸고 있는 높디높은 성벽 밖 이방인이 공주의 남편이 된다는 설정의 <알라딘>에는 계층과 인종을 뛰어넘어 누구나 꿈을 실현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이 투영되어 있다. 영화가 설정한 공간은 봉건적인 정치체제를 갖고 있는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어떠한 압제나 억압이 없어 하층민인 ‘알라딘’도 자신의 사랑을 실현할 수 있는 꿈의 동산이다. 자스민이 술탄으로 등극하는 것이라든가, <Prince Ali> OST와 함께 왕자가 화려하게 등장하는 장면은 다양한 삶의 양식이 공존하는 다문화주의의 이상향처럼 보이지 않는가? ‘알라딘’은 이슬람 국가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다양한 인종(흑인, 백인, 중동인)과 동물(호랑이, 앵무새)이 평화를 공존하며 살아가는 미국식 이상의 공식을 그대로 따른다. 공주한테 길들여진 수컷 호랑이 ‘라자’는 이국적인 것마저 ‘전시용의 가치’만 남기고 문화상품으로 소비하는 미국인의 행태를 보여 준다.
신비롭고 밀교적인 지혜-그노시즘(그노시즘은 특히 뱀을 신비화한다)을 활용하여 암투를 벌이며, ‘궁전 밖’의 좀도둑의 처지에서 ‘좀도둑은 천박하니 궁전사람들과는 말도 섞어서는 안된다’는 아그바다의 기존질서를 전복하려는 모사꾼 자파만이 이슬람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이는 자파가 기존 질서와는 다른 ‘타자성’을 내포하는 것이며, 타자의 부정성을 함축한다고 보는 근거이다. 최면을 이용하여 기존의 술탄을 제거하려고 시도하려고 하거나 알라딘을 급습해서 램프를 탈취하는 모습은 그노시즘에 기반했던 시아파의 앗사신 그대로이다.
그러나 정작 이슬람적인 요소를 담고 있는 자파는 그가 주장하는 종교적 신념에 기반 한 이웃국가와의 투쟁(영화에서 '자파'는 가치관이 다른 이웃나라랑 전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수니-시아파 분쟁을 떠올리게 한다.)이 아니라 범국가적인 관용과 평화를 강조하는 기존 술탄세력에게 패배한다. 그리고 자파가 축출됨으로서 왕국은 평화를 되찾고 번영하게 된다는 해피엔딩은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뒤섞인 미국이라는 나라의 승리를 부각시키고 분열과 갈등은 은폐, 봉합한다.
또한 좀도둑이었던 알라딘이나 자파(자신의 출신, 계층 때문에 항상 열등감을 느끼는 두사람)처럼 계층간의 갈등과 분열의 조짐이 보이는 지점에서 디즈니는 그것을 은폐하고 봉합함으로서 항상 기존질서를 옹호하려는 것이다. 권력욕이 없는 알라딘은 분수에 맞는 삶을 선택함으로서 기존질서에 통합되었고, 야망과 전복(종교적 신념이 다른 이웃국가와의 투쟁을 주장)을 꿈꾼 자파는 악인으로 그려지며 축출되어서, 결국에 미국의 질서는 아무런 변동이 없는 것이다.
이는 진정한 차이를 두려워하는 현대 사회의 흐름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모든 부정성(타자)의 제거가 오늘날 사회의 특징이다. 마치 알라딘과 자스민의 사랑처럼 소통 또한 매끄러워져서 서로 만족감을 교환하는 행위가 된다. 자파가 보여주는 증오나 적대, 열등감처럼 부정적인 감정에는 어떤 언어도, 어떤 표현도 제공되지 않는다. 타인으로 인한 상처의 모든 형태가 회피된다. 오늘날의 문화는 진정한 타자를 용인하지 않는다. 승자의 관점에서 자파를 악인으로 묘사한 것은 기존 시스템의 완결성을 강조하기 위해 타자를 도구화시키는 전형적인 예를 보여주고 있지는 않는가?
또한 영화의 전반적인 설정을 살펴보자. 이슬람 문화의 탈을 씌운 미국의 모습을 묘사하는 영화는 타자와 차이(이슬람과의 적대)마저 본질적인 타자성(이슬람 문화의 실질적인 내용,특징들)을 제거한 채 껍데기만 남김(이국적인 궁전양식과 코끼리 따위의 그저 보이는 모습만 이슬람)으로서 일자(서양사회)로 포섭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그저 무늬만 타자의 모습을 하고 있을뿐 결국에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서구식 가치를 보편적인 것으로 둔갑시키려는 의도가 있지는 않은가?
사랑을 통해 신분상승을 도모한다는 기존의 ‘신데렐라’와 같이 서구권 문화에서 나타나는 캐릭터를 통해 이야기를 전개한 것 또한 미국식 사고방식을 보편의식으로 둔갑시키려는 의도의 연장선상에 있다. 항상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결말은 기존 가치가 정말 최고인 것 마냥, 미국식 가치가 최선인 것마냥 비판 의식을 희석시키는 것도 이 영화의 한계이다.
그런 점에서 <알라딘>을 질서의 균열을 보여주며, 시스템 밖을 사유하려고 하는 진보적인 영화라고 볼 수 없으며 오히려 보수이데올로기 선전용 영화인것이다.
한줄요약: 어떤 평론가 왈. "오히려 정치적 올바름에 기한 비판을 수용-의식해가면서 계속 보수주의적인 세계관이 갱신되어가는 디즈니의 모습을 보는 것은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