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논픽션> 리뷰
영화 논픽션은 책과 관련해 두 가지 쟁점을 다루고 있습니다. 첫 번째 쟁점은 ‘디지털 시대의 책(콘텐츠)의 향방’이고 두 번째 쟁점은 ‘픽션과 팩션을 가르는 경계는 무엇인가?’입니다. 두 쟁점을 각기 다른 두 중심인물인 알랭과 레오나르의 이야기를 통해 풀어내고 있으며, 쟁점에 따라 제목의 의미가 다르게 와닿게 됩니다.
1. “심술 부리지 마. 그게 현실이야.”
첫 번째 쟁점을 다룰 때, ‘논픽션’은 제목이 무색하지 않게 허구가 아닌 실제 이야기입니다. ‘책’의 현실을 명확하게 꼬집고 있는 영화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인터넷 덕분에 더 많이 글을 쓰고, 말할 자유가 생겼습니다. 계속 번성하는 블로그를 보면 글을 덜 읽는다고 할 수도 없죠. 인터넷이 종이책을 대체하고 있습니다. 아니면 블로그를 읽고나서야 책을 사는 것이 당연해질만큼, 인터넷이 책의 판매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말합니다. 미래의 사람들은 종이책보다 리더기로 더 많은 글을 읽게 될 것이라고. 아직은 종이책에 대한 수요가 있어서 시장이 살아있기는 하지만 곧 변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유통업자, 서점, 인쇄소 등 중간상들은 사라지고 편집자와 작가만 남을 것입니다. 출판사도 사라지고 웹사이트가 그 자리를 메꿀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문학상도 온라인으로 투표하고, 수상도 메일로 할 것이고, 부상으로 아마존 프라임 회원권을 줄 것입니다.
실제로 아마존에서는 저자와 독자를 직접 연결하는 셀프-퍼블리싱 플랫폼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원하기만 하면 누구의 글이든 다 책으로 만들어서, 플랫폼을 통해 독자에게 공급해주는 이 방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아마존이 아직은 한국시장에 개입하지는 않았는데,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출판사의 상당수가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하는 전문가도 있습니다.
결국 영화에서 우스갯소리로 하는 이야기들은 미래의 일이 아닌,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실의 일입니다. 영화에서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죠. “심술 부리지마. 그게 현실이야.”
책이 처한 현실을 이 영화는 알랭, 로르, 셀레나의 연애이야기에 빗대어 하고 있습니다. 주인공 알랭은 성공한 편집자입니다. 그는 영세한 출판사인 베르퇴이를 인수해서 다시 발전궤도에 올려놓습니다. 많은 편집자가 알랭의 출간 목록을 부러워하죠. 사람들은 입을 모아서 그가 시류를 읽는 재능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이런 알랭에게는 20년을 함께 해온 부인 셀레나가 있습니다. 셀레나와 알랭의 부부생활은 이전과 같지 않고 시들해져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알랭은 새롭게 등장한 로르에게 끌리고 비밀연애를 합니다.
셀레나는 책을 대변하는 인물인 동시에, 책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셀레나는 책을 매우 존중합니다. 생각하는 법에는 책이 도움이 된다고 여기고, 디지털 콘텐츠를 경시합니다. 태블릿으로 글 읽는 것조차 꺼리고, 글은 마땅히 종이에 쓰여져야 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인터넷에 쓰인 글들은 그녀의 눈에 아무말 대잔치에 지나지 않을 뿐이죠. 당연히 전자 책 또한 종이 책보다 수준이 떨어질 것이라고 여기죠.
이렇게 책을 대변하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존재 자체가 알랭에게는 종이책과 같습니다. 오랜 시간을 함께 했으며, 그의 정체성의 한 부분을 이루며, 결혼이라는 기존의 관습에 의해 맺어진 관계입니다. 많은 추억도 공유하고 있죠. 함께 해왔던 책을 전자책으로 대체할 때 죄책감을 느끼듯이, 알랭은 셀레나에게도 죄책감을 느낍니다.
로르는 전자책을 대변하는 인물인 동시에, 전자책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로르는 책의 전자화에 대해 다들 중요성은 알지만, 두렵게 느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그녀는 베르퇴이의 디지털 사업 담당자입니다. 출판계는 전자화를 악마의 출현이라고 보지만, 그러한 상황을 이해하고 감수하려고 합니다. 출판계는 변화해야 한다고 그녀는 생각합니다. 다가올 쟁점을 얘기하면 자신이 불길한 예언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하면서도, 꿋꿋하게 소신을 굽히지 않습니다.
문자메시지와 트윗을 모아 책으로 출간한 원고를 말라르메의 즉흥시에 버금가는 작업이라고 말하며, 문자도 글쓰기의 한 형식이라고 말합니다. 그녀에게 트윗은 하이쿠이며, 앱으로 못읽을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이러한 시류를 거부하는 것은 낡은 패턴이라고 못을 박습니다.
이렇게 전자책을 대변하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존재 자체가 알랭에게는 전자책과 같습니다. 로르 당제르빌은 여러 면에서 셀레나와 다릅니다. 젊음을 잃은 셀레나와 다르게 “경영전문대를 나온 수재에 섹시한 육식녀 스타일”이라고 소개됩니다. 일에 지친 셀레나와 다르게 정력적으로, 열정적으로 자신의 사업을 추진해나가죠. 그녀는 모든 권위와 관습을 부정하는 존재입니다. 양성애자로서, 성적 지향도 공동체의 관념에서 다소 벗어나 있습니다. 알랭은 젊고, 새롭고, 섹시하고 전복적인 전자책에 끌리게 됩니다. 전자책이란 단어 대신에 로르를 집어넣어도 문제 될게 없습니다.
영화는 알랭이 전자책과 종이책 사이에서 주저하고, 로르와 셀레나 사이에서 주저하는 것을 그립니다. 알랭은 새로움과 익숙함 사이에서 주저하는 인물이죠. 그렇지만 결국에는 셀레나를 선택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변화가 아니라고 정체성의 유지라고. 세월을 거쳐온 개념을 우리는 보관해야 한다고. 관습과 형식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권위를 부여하는 게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이런 알랭의 모습을 통해, 영화는 아직은 종이책의 손을 들어줘야 할 때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저 개인적으로는 알랭의 모습에 감정이입하면서 영화를 보았습니다. 출판사 사장의 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책의 중요성에 설득당하며 자랐지만, 동시에 IT 최강국에서 태어나 인터넷의 발전과 스마트폰의 출현을 두 눈으로 목도한 세대입니다. 방 책장에 책들이 빽빽이 쌓여있지만, 브런치로 글을 읽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지고 있음을 체감합니다. 과거에 연애를 했을 때는 소중하지만 익숙한 관계와 설렘을 주는 새로운 관계 사이에서 주저했던 경험이 있어서 더욱 남 얘기 같지 않았습니다.
2. “나는 팩션을 쓰지. 아니 소설을 쓰지.”
두 번째 쟁점을 다룰 때, 영화의 제목은 모든 소설은 ‘논픽션’일 수밖에 없다며,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나누는 카테고리의 무상함을 보여줍니다. 영화를 보고나면, ‘너가 읽는 그 소설이 순도 100%의 허구일까?’라는 듯해 비꼬는 듯한 느낌까지 받죠.
한 인간이 타인들과 맺는 관계는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것입니다. 개개인의 주관에 따라서 동일인물을 봐도 다 다르게 느끼는 거죠.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에서, 논픽션이나 픽션이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가장 현실과 맞닿아 있는 정치의 영역에서도 실제 일어난 일보다 개인적인 신념이나 감정이 여론형성에 더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진실과 사실이 중요하지 않게 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며, 우리는 각자의 선입관이 정해진 허구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죠. 디지털의 발달이 비밀을 없애고 사회를 투명하게 만들어 모든 것이 명백한 사실이 되었지만, 오히려 사실들이 범람하게 됨으로서 사실은 이전의 가치를 잃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실과 허구의 구분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작가인 레오나르 또한 허구와 실제의 경계가 명확한 것이 아니라고 되풀이해서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 경계를 나누는 것이 큰 의미가 있는 것인가? 라고 우리에게 되묻습니다. 이런 그는 모든 것이 불분명한 혼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합니다. 이전에 썼던 소설들도 다 자전적입니다. 소설의 화자 이름은 레오나르이고, 소설가입니다. 소설의 화자가 사는 아파트와 사는 동네도 작가 본인이 사는 곳과 같습니다. 작가를 아는 사람은 작가가 자신의 사생활을 얘기하고 있음이 명백합니다.
이 영화는 두 번째 쟁점도 연애 이야기에 빗대서 풀어냅니다. 레오나르의 전 부인인 솔랑주는 소설 속에서 베로니크 파스투로로 구현됩니다. 현 부인인 발레리는 소설 속에서 오리안이라는 등장인물과 흡사합니다. 소설 속 제니아는 자신과 불륜관계에 있는 셀레나를 형상화한 인물입니다.
저는 레오나르의 이야기를 보며 어떤 주장이 떠올랐습니다. 창작자가 예술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으면, 예술은 이미 창작자의 손을 떠난 것이고 예술은 창작자와는 별개로 예술 그 자체로만 고려되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를 통해 느낀 건 예술과 작가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아마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작품에는 창작자의 경험과 인생이 어느정도 개입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이런 의문도 피할 수 없습니다. 실제 인생과 예술을 분리할 수 없다면, 판매 될 가치가 있는 인생이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인생이 존재하는 것일까요? 자본주의 사회는 이미지에도 상품 가치를 매깁니다. 예술이 인생에도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면, 예술이 누군가의 실제 삶을 훼손시키는 일도 벌어지지 않을까요?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전부 ‘그렇다’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것을 입 밖에 내려고 하지는 않죠. 이것이 바로 ‘암묵’입니다.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첫 번째 쟁점(전자책vs종이책)과 두 번째 쟁점(논픽션vs픽션)을 엮어주는 것도 이 ‘암묵’이라는 개념입니다.
3. “은폐나 위선은 있다. 그보다는 암묵이 있다. 서로 알지만 말려들고 싶지 않은 것.”
“은폐나 위선이 있다고 생각해?”라고 묻는 레오나르의 질문에 발레리는 “암묵이 있다고 생각해”라고 말합니다.
알랭이 로르와 암묵적인 관계를 맺듯이, 출판은 전자책을 암묵적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임으로서 발전해나갑니다. 레오나르는 셀레나와의 암묵적인 관계를 소설로 써서 발표합니다. 누구나 다 레오나르의 암묵적인 관계를 알지만, 선을 넘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20년 내내 욕망을 유지하는 게 부자연스러운 것임을 영화는 셀레나의 입을 빌려 말하고자 합니다. 셀레나는 강한 직감으로 남편의 불륜을 알고 있습니다. 대화가 최선이라는 친구의 말에, 사실이면 무슨 수가 있냐며 어차피 거짓말할 게 뻔하다고 응수합니다. 부부 사이는 욕망이 전부가 아니라는 암묵적인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는 인물입니다.
글은 상품이 되어버렸고, 디지털 콘텐츠가 책을 압도해버렸고, 종이 책의 시대가 끝나간다는 사실을 우리는 암묵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컴퓨터는 돈 내고 장만하고, 인터넷 비는 매달 내면서, 음반이나 책, 신문을 살 때는 속으로 아까워합니다. 남의 콘텐츠를 파는 인터넷 공급업자들은 범법자들이지만, 다들 암묵적으로 거기에 동참하거나, 용인하는 게 현실입니다. 예술이 예전과 같이 큰 의미를 지니지 않으니까 공짜여도 된다는 생각에서입니다. 글은 물질과 분리되면 죽은 것이라고 주장은 해도 태블릿으로 원고를 읽고 있는 것이 암묵적인 현실입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픽션은 작가 개인의 경험에 기초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암묵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불륜과 같은 규범에서 벗어난 사건들도 소설로 분류된 이상 암묵적인 차원에서 용인해주고 크게 문제제기 하지 않습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나르시시즘과 연관되어 있다고 영화는 말합니다. 자신의 인생을 소설로 쓰는 레오나르도 지독한 나르시스트이고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행위도 나르시시즘에서 기인합니다. 이러한 나르시시즘도 우리는 암묵적으로 용인합니다.
저는 생각해봅니다. 공동체의 관념을 넘어서는 생각이나 행동은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수용되고, 받아들여지죠. 공적인 영역은 규범의 지배를 받지만, 암묵의 영역은 자연스러운 욕망과 본능을 중요시합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암묵의 영역이 공적인 영역으로 편입되거나 공적인 영역이 암묵의 영역으로 침잠하는 것을 우리는 종종 봅니다. 공적인 영역은 너무나 명백한 것이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집니다. 암묵의 영역을 통해 공적인 영역이 활기를 띄고 숨통이 트인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암묵의 영역을 좀 더 존중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4. 총평
책 이야기를 연애 이야기에 빗댄 설정이 흥미로웠습니다. 특히 책과 디지털의 관계를 외도에 빗댄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공동체의 관습과 전통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 외도이기는 하지만, 다양한 사랑의 한 형태이며, 앞으로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서사가 없고, 등장인물들의 토론의 연속이라 지루할 수도 있습니다. 두 가지 쟁점을 다 다루는 게 아니라, 한 가지 쟁점에 집중하고 그것에 대해 설득력 있는 서사로 풀어나갔으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또한 토론이 너무 많이 나오는 영화의 구성 때문에 관련 분야의 지식이 없는 관객은 정보 과부하로 인해 지칠 것 같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대사는 흘러가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일도 발생할 수 있는 것이고요. 그래서 이 영화는 책과 관련된 일을 하거나 출판계 종사자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영화입니다. 애초에 영화의 목적도 그런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고요.
5.번외-영화의 상징
누가 책 이야기 하는 거 아니랄까봐, 이 영화에 등장하는 작품들의 제목도 영화의 주제와 무관하지 않은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지닙니다. 배우인 셀레나가 출현하는 연속극의 제목은 ‘결탁’입니다. ‘결탁’은 마음을 결합하여 서로 의탁한다는 것을 뜻하는 동시에, 이 영화에서는 셀레나와 알랭의 관계를 상징합니다.
‘결탁’의 역을 맡을지 말지에 대해 말하며 셀레나는 자신을 대신할 사람이 없으며, 인질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합니다. 그때 어린 아들이 등장합니다. ‘무서운 꿈’을 꿔서 엄마와 아빠와 같이 자려고 온 것이죠. 가족의 모든 구성원이 결탁되는 장면입니다. 좋게 보면 아들은 가정을 유지시키는 접착제 역할을 하지만, 알랭과 셀레나를 가정에 예속시키는 굴레와도 같은 역할을 합니다.
셀레나는 ‘결탁’에 대해 설명할 때 ‘결판’이 아닌 ‘결탁’이라고 합니다. ‘결판’은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진 뒤 최종판결을 내려 끝마치는 행위입니다. 알랭과 셀레나의 관계에 빗대어 생각하면 서로의 관계를 청산하는 것이겠죠. 책의 미래로 확장해서 생각하면, 종이책에 종언을 고하고 전자책과 디지털의 시대를 환영하는 것입니다.
레오나르가 쓴 소설은 ‘창설-나직한 작별-마침표’로 이어집니다. ‘창설’은 무엇인가가 만들어졌다는 뜻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영화에서는 종이책의 시작을 상징합니다. 이 책은 꾸준히 팔리는 책이자 스테디셀러입니다. 이는 종이책에 대한 사람들의 향수를 의미합니다. 반면에 나직한 작별은 워스트셀러이고 ‘나무보호에 일조한 책’이라고 소개됩니다. 종이책에 작별을 고한 것에 대한 사람들의 적대감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침표’는 영화의 상황, 실제의 현실과 맞물려 상당히 시사적입니다. 한 세계가 끝나가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죠.
알랭은 로르가 떠나기 전, 로르에게 ‘겨울빛’ 이야기를 합니다. 그 영화는 목사가 신앙심을 잃었지만 텅 빈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내용입니다. 종이책을 불신하는 시대에 살지만, 관습을 지켜야 하는 의무감 또한 가지고 있는 알랭은 목사에 대응됩니다. 때로는 자명한 걸 거부하고 믿음을 지켜야 한다고 알랭은 말합니다.
또한 겨울은 모든 생명이 추위를 피해 동면에 잠기는 계절입니다. 모든 것이 수축하고 자신의 부피를 최소화합니다. 그렇지만 새 생명을 싹 틔울 부활을 꿈꾸며 새로움을 맞이하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미래를 준비하는 과도기적인 시기죠. 책의 미래도 화려한 봄과 같기를 희망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