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랏말싸미>, 계몽주의적 기획

역사왜곡을 감수하고 <나랏말싸미>가 전하려했던 것

by 이슬빛

애플과 비트코인과 신미스님의 공통점은? 바로 기득권이 지배하는 기존의 시스템 안이 아닌 밖에서 혁신을 이뤄 판도를 바꿨던 주역이라는 것이다.


<1984>의 내용을 각색해서 1984년에 선보인 광고에서 애플은 아이비엠(IBM)을 독재자 빅브러더에, 애플을 혁명가에 빗댔다. 이 반란의 결과로 우리는 똑같은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비트코인의 철학은 중앙집권적인 국가권력의 통제에 저항하는 사이퍼펑크 운동에 뿌리를 뒀다. 암호와 분산화 기술을 이용해 신용기관을 거치지 않고도 신뢰할 수 있는 개인간 금융거래를 실현하려는 아이디어가 담긴 개발자 사토시 나카모토의 9쪽짜리 우아한 소논문은 이미 전설이 되었다. 비트코인의 성공은 무정부주의자들의 역사서에 기록될 최초의 승리로 여길 만하다.

https://youtu.be/3qskw7FSPIQ

신미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살던 당시의 조선은 한문을 사용하는 강력한 지식권력 사회였다. 이 사회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였기에 불교를 억압하였다. 세종은 한글을 창제함으로서 이런 구조를 근본에서부터 흔들고자 하였다. 지배층 독점의 한자 문화권과 대척점에 있는 백성들이 문자를 깨우치고 지식을 공유하도록 ‘문자 혁명’을 꾀한 것이다. 이것은 권력을 고루 나누자는 ‘언어의 민주화’이며 ‘문화의 민주화’이기에 당대 권력층이었던 사대부들은 세종에게 협조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유교국가 조선의 시스템 밖에 있었던 ‘아웃사이더’ 신미의 도움을 빌려 한글을 완성하게 된다.


물론 이것은 사실에 근거한 내용이 아니라 불교계에서 돌고 있는 가설에 기반 한 것이기에, 역사왜곡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가 없다. (이 점에 있어서는 전문가들이 훨씬 더 잘 지적해줄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역사왜곡을 감수함으로서 이 영화가 성취한 몇 가지 효과가 있다. 그것은 양반들과 스님들의 대립구도가 강조됨으로서 서사가 더 극적이게 된 것으로서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혁신은 시스템 안에서가 아니라, 시스템 밖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근본적인 진리를 작금의 우리에게 다시 일깨운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역사 속에서 배제되고 외면 받았던 아웃사이더가 스스로를 혁신을 위한 희생양으로 삼아 과업을 달성하였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듯하다. “불씨”가 만든 한글에 유생들이 따라줄 리 없다는 이유 때문에 자신의 공을 모두 유생들에게 돌린다. (영화에 따르면) 신미는 기록 속에서 지워졌고 자신을 희생했지만, 그 대신 세종의 '문자 혁명'을 달성함으로서 숭고함을 얻었다.

이러한 설정은 야사(또는 가설)을 활용함으로서 가능한 것이다. 마치 다크나이트(배트맨) 또는 체 게바라처럼 곤혹스러운 일은 다 도맡아 하면서 결국 희생을 감수하는 영웅주의적 서사는 세종대왕 혼자서 한글을 만들었다는 기존의 사실을 그대로 따랐으면 가능했을까? 아니라고 본다.


신미는 대의를 위해 스스로를 역사에서 지웠지만, 반대로 애플이나 비트코인은 역사가 된 경우이다. 애플이 IBM에 맞서 혁명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우리는 그 대신 똑같은 전화기를 손에 쥐게 됐다. 더 나은 기술의 승리와 함께 애플이 절박하게 호소했던 메시지는 획일적인 풍경에 묻혔다. 애플은 누구보다 폐쇄적이고 전체주의적 통일성에 집착하는 시장지배자가 되어버렸다. 아이비엠의 ‘생각하라’(Think)를 패러디하여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로 모토를 정한 애플의 기업철학은 ‘애플과 다른 것’은 철저한 불관용으로 응징한다.


비트코인은 어떤가? 만약 비트코인이 통화로서 광범하게 인정받는 날이 온다면, 그것은 단지 국가의 보증 없이도 작동하는 화폐의 탄생만을 뜻하지 않는다. 전체 통화량의 97퍼센트를 상위 3퍼센트가 보유하고, 특히 개발자 사토시 나카모토 한명이 전체 통화량의 5퍼센트를 보유하는 화폐가 탄생함을 의미한다. 그것은 존재한 적이 없는 수준의 불평등이다. 개인이나 기업은 물론 어떤 국가의 정부도 그런 규모의 화폐독점에 근접해본 적은 없다. 정부의 통제를 피해간 곳의 미래가 겨우 그런 모습이라면, 사람들은 혁신보다는 기존 시스템의 가치를 재평가하게 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신미와 비트코인, 애플은 같으면서도 다른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문득 느꼈다. 신미와 같이 세상에 남아 있는 낡은 질문들을 해소하기 위해 고민하는 혁신가들이 그립다고. 바로 이런 질문들 말이다. 혁신은 불평등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는가? 혁신은 지배 구조를 바꾸는가? 아니면 단지 지배자의 이름이 바뀌면 충분한가?


이런 질문을 던지게 한 이 영화는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영화가 흥행이 잘 되었으면 하고 바랬다. 그러나 얼마나 먹힐 수 있을지 우려되었다. 왜냐하면 사실에 기반 하지 않은 메시지는 그 메시지가 아무리 감동적일지라도 진실성을 의심받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환상만 부추긴다는 ‘선동 질’이라는 비난도 받을 수 있다. 이 영화에 대해 호불호가 극명히 갈린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쉽게 납득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영화가 사실에 기반 하지 않은 서사(역사왜곡)에 쏟아질 비난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 거라고 본다. 그런데도 그런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전달하려고 한 메시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본다.


영화의 흥행이 우려된 두 번째 이유는 세종의 ‘계몽주의적 기획’이 과연 우리 시대에 호소력 있게 다가올 것인가와 관련 있었다. 영화는 세종이 권력과 부와 편의가 소수 세력에 편중된 걸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그린다. 한글을 만듦으로서 지식의 전파와 민주화를 시도한 것이 아직도 유효한가? 아직도 민중이 그런 계몽의 대상인가? 포스트모던. 진리가 부재한 극단적인 상대주의의 시대에 ‘계몽주의’는 분명히 조롱거리이거나 냉소의 대상이다.

오늘 날을 살아가는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지금의 대중은 예전처럼 무지몽매한 사람이 아니며 문명이 발전한 결과에 따라 교육의 수혜를 입어 비판적 이성과 정보를 선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고. 국민들의 힘과 시민의식이 높아졌으며 이는 촛불시위나 금 모으기 운동과 같은 형태로 잘 나타나고 있다고. 계몽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소수의 엘리트들이라고. 이것은 민주주의에 어긋나는 엘리트주의, 귀족주의이며 선민의식에 가득 찬 헛된 생각이라고. 민중은 세상을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이러한 민중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스스로가 누군가를 교정할 자격이 되는지 곱씹어봐야 할 것이라고. 잘못된 선도로 인해 상황이 악화되는 경우는 역사 속에서도 많이 찾아 볼 수 있었으며 또한 계몽하는 척하면서 잘난 척을 하거나 자비를 베푼다는 나르시시즘에 빠진 것은 아닌지 저의를 의심해 봐야 한다고. 근대의 계몽주의는 폭력을 부르기도 했었다고.

신미 또한 한글 창제 과정에서 글자 수를 자꾸 간소화하려는 세종에게 묻는다. “글은 소리를 담는 그릇이기도 하지만, 소리를 규정하고 제약할 때도 있습니다. 지나치게 간소화하려는 것은 백성을 무지하게 여긴 것이 아닙니까? 표준화를 시킨다는 명목으로 우리의 말소리를 지울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혼까지 지우는 것일 겁니다. 백성을 위한다고 하지만, 폭력을 휘두르게 되는 것 아닙니까?” 누군가를 계도하고 선도한다는 계몽주의적인 기획이 자칫하면 누군가에게는 강요가 되고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난점을 신미는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위험은 내재하지만 계몽주의를 폐기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이성과 계몽의 가치를 폐기해버린 시대(포스트모던)의 난점에 주목하는 것이다. 오늘 날의 사회는 관용과 존중의 가치를 너무 우상화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관용과 존중이라는 명목 하에 모든 갈등을 일으킬만한 요소라든지 상대방에 대한 개입이 터부시된다. 이는 어떠한 가치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극단적인 상대주의에 기인한다. 오히려 그것들이 개인에 대한 방기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삭막한 개인주의를 부른 원인이다. 시스템을 개조하겠다는 영웅주의나 혁명이 과거에 실패했던 것은 맞고 지금의 상황이 그 결과인 것도 맞다. 그러나 어떠한 절대적인 가치관이 부재한 시대는 지나친 혼돈을 부르지 않는가?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가치관의 재정립이 아닐까? '꼰대'라는 소리가 두려워서 다가오는 미래세대의 도덕적/윤리적 욕구를 놓치면 혁신은 실패할 것이다. 물론 그 반대로 핀트를 놓치고 꼰대 소리를 해도 실패할 것이다. 여러 모로 위태로운 사회 속에 살고 있다.

만약 이 영화가 흥행한다면, 오히려 우리가 어떠한 권위도 가치도 부재한 오늘날의 시대에 세종대왕과 같은 인물, 민중을 위했던 영웅을 속으로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은 보여주는 게 아닐까? 아니면 새로운 가치를 정립하는 혁신을 달성한 뒤, 박수칠 때 떠난 신미와도 같은 그런 사람 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종대왕과는 다르게, 영화 속 세종은 시종일관 무력한 모습을 보인다. 이성도 완벽한 것이 아니라 난점이 있다는 것, 소수의 지각있는 사람(세종과 중전, 신미, 더 나아가면 사대부들)도 시대라는 벽 앞에서는 무력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이성을 통한 교육(또는 계몽)의 중요성을 오히려 역설하는 것이 아닐까?


기득권 전체가 반대하며, 민중은 소통이 안 되는 위태로운 사회, 눈은 점점 멀어가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부인마저 죽는 그런 부정성 속에서, 그런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이성에 대한 믿음, 100년 후를 위해 한글을 만들겠다는 역사발전에 대한 믿음이 생겨났다. 고독한 천재 세종이 보여주듯이, 오히려 계몽주의란 사실 현실적 공포와 절망 그리고 무력감을 경유하여 인간의 사유 능력의 극단적 한계를 시험하여 얻어낸 전위적 결과물이 아니었을까?


+)역사왜곡이라는 영화가 범한 과오는 비난받아 마땅하고, 나도 옹호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영화가 사실을 경시하는 태도는 오히려 사실도 구성된 것일뿐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내포한 극단적인 상대주의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 아닐까? 교훈적인 내용을 담으려 하면서도, 사실과 가설도 구분하지 못하는 이 영화는 모순덩어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안타까운 나로서 변을 하자면, 영화에서 세종대왕은 자신이 만든 한글을 ‘언문’이라고 이름 지어준다. 그러면서 아끼는 자식이 더 모질게 잘 크라고 천한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라고 했다. 아끼는 자식일수록 더 독하게 키우고 혼낸다고 한다. 이 영화를 대하는 내 마음이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keyword
이전 09화영화 <롱리브더킹:목포영웅> 리뷰-과칠공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