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르네상스 시기의 작품들. 여기에 토이스토리 추가최근 디즈니의 <미녀와 야수>, <알라딘>, <라이온킹>, <토이스토리4>가 개봉했다. <토이스토리>를 제외한 세 작품은 모두 기존 원작 애니메이션을 실사화한 작품으로 흥행에 성공을 거둬 디즈니에게 적지 않은 수익을 안겨다주었다. <미녀와 야수>는 우리나라에서만 500만 관객을 동원하였고, 세계적으로 10억 달러의 수익을 얻었다. <알라딘>은 국내에서 1000만 관객 이상을 동원했다. <토이스토리4>는 개봉 3주차 만에 디즈니에게 6억불을 가져다주었다. 기간만 놓고 본다면,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흥행 수익을 남긴 것이다. <라이온 킹>은 아직 개봉 중이지만, 비슷하게 흥행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뮬란> 또한 2020년에 개봉을 앞두고 있다. 주목할 것은 언급한 작품 모두가 “디즈니 르네상스”라고 불리던 디즈니의 최전성기 작품들이라는 것이다.
만화 왕국이던 디즈니는 왜 자신들의 만화를 실사화 하는데 힘을 쏟는 것일까? 명작을 재해석하여 또 다른 감동을 줄 수도 있지만, 명작의 가치나 명성을 훼손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말이다. 예전 명작을 보고 자라났던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서 이제는 영화를 원한다는 이유, 기술이 좋아져서 더 좋은 질로 원작을 재현해낼 수 있다는 이유, 돈이 된다는 이유는 명백하다 못해 식상하게 느껴진다. 하필 이 시기에 연속적으로 개봉한다는 것은 어떤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알라딘>에서 묘사되는 세계는 이슬람 문화의 껍데기를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실상은 미국 그 자체이다. 왕궁을 둘러싸고 있는 높디높은 성벽 밖 이방인이 공주의 남편이 된다는 설정의 <알라딘>에는 계층과 인종을 뛰어넘어 누구나 꿈을 실현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이 투영되어 있다. 영화가 설정한 공간은 봉건적인 정치체제를 갖고 있는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어떠한 압제나 억압이 없어 하층민인 ‘알라딘’도 자신의 사랑을 실현할 수 있는 꿈의 동산이다. 자스민이 술탄으로 등극하는 것이라든가, <Prince Ali> OST와 함께 왕자가 화려하게 등장하는 장면은 다양한 삶의 양식이 공존하는 다문화주의의 이상향처럼 보이지 않는가? ‘알라딘’은 이슬람 국가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다양한 인종(흑인, 백인, 중동인)과 동물(호랑이, 앵무새)이 평화를 공존하며 살아가는 미국식 이상의 공식을 그대로 따른다. 공주한테 길들여진 수컷 호랑이 ‘라자’는 이국적인 것마저 ‘전시용의 가치’만 남기고 문화상품으로 소비하는 미국인의 행태를 보여 준다. 신비롭고 밀교적인 지혜-그노시즘(그노시즘은 특히 뱀을 신비화한다)을 활용하여 암투를 벌이는 모사꾼 자파만이 이슬람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최면을 이용하여 기존의 술탄을 제거하려고 시도하려고 하거나 알라딘을 급습해서 램프를 탈취하는 모습은 그노시즘에 기반했던 시아파의 앗사신 그대로이다.
그러나 정작 이슬람적인 요소를 담고 있는 자파는 그가 주장하는 종교적 신념에 기반 한 이웃국가와의 투쟁(영화에서 '자파'는 가치관이 다른 이웃나라랑 전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수니-시아파 분쟁을 떠올리게 한다.)이 아니라 범국가적인 관용과 평화를 강조하는 기존 술탄세력에게 패배한다. 그리고 자파가 축출됨으로서 왕국은 평화를 되찾고 번영하게 된다는 해피엔딩은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뒤섞인 미국이라는 나라의 승리를 부각시키고 분열과 갈등은 은폐, 봉합한다.
(자스민은 '여성은 술탄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법 밖에서 의문을 제기하고, 법을 해체한 급진적인 변화를 부른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자스민도 최고 권력자의 딸이자 궁전이라는 틀 안에 사는 기득권이었다는 점에서 과연 시스템 밖의 사람이었는가 하는 의문을 들게 한다. 결국에는 그 법도 온전히 스스로가 쟁취한 게 아니라 영화 막바지에서 왕의 결정으로, 마음대로 선언한 결과로 바뀌지 않는가?
사실 좀도둑이었던 알라딘이나 자파(자신의 출신, 계층 때문에 항상 열등감을 느끼는 두사람)처럼 계층간의 갈등과 분열의 조짐이 보이는 지점에서 디즈니는 그것을 은폐하고 봉합함으로서 항상 기존질서를 옹호하려는 것이다. 권력욕이 없는 알라딘은 분수에 맞는 삶을 선택함으로서 기존질서에 통합되었고, 야망과 전복(종교적 신념이 다른 이웃국가와의 투쟁을 주장)을 꿈꾼 자파는 악인으로 그려지며 축출되어서, 결국에 미국의 질서는 아무런 변동이 없는 것이다. '공직에 나설 수 없다'고 주장되었던 이반카 트럼프가 현재 대통령 보좌관직을 수행하는 것이 정말 시스템 밖에서 사유한 결과라고 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다인종 사회가 가진 분열의 요소를 판타지로서 봉합하려는 시도는 <토이스토리>에서도 이어진다. 출신지도, 생긴 것도, 생각하는 것도 다 다른 장난감들의 세계는 다인종사회의 미국이다. 장난감들은 서로의 차이로 인해 갈등을 겪지만 이 갈등은 하나 된 장난감 세계를 만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뿐이며, 차이들은 장난감 주인에 대한 충성 아래 하나로 포섭된다.
우디가 사랑에 빠져 섬기던 주인을 떠난다는 스토리의 <토이스토리4>는 우디가 자신의 삶을 찾는 "주체적인 선택"을 통해 "자유"를 쟁취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디즈니의 주체가 정말 주체일까? 구조 속의 산물은 아닐까? 장난감들이 스스로 선택한 것처럼 보이는 행동들, 스스로가 규정한 것처럼 보이는 정체성도 장난감이 속한 사회의 관념으로 인해 '결정된 것' 아닐까? 주체라는 관념은 허상 아닌가? 이전 작품들을 보면 항상 그렇게 느끼게 된다.
우디와 버즈는 너무나 다르고 서로를 미워하지만, 더 큰 적과 맞서 싸울 때에는 하나로 뭉친다. 이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각기 다른 미국인들에게 소속감을 부여하는 과정과 비슷한 것이다. 장난감들이 주인에 대한 소속감을 통해 스스로를 ‘주체’로서 재구성하는 과정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각기 다른 개개인에게 미국인이라는 소속감을 부여하고, '일등국가의 시민'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주체로서 재구성해내는 과정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앤디'라는 주인을 지키기 위해 뭉칠 때는 자기네 장난감 세계가 최고인 것처럼, 자국의 통합을 위해서는 미국은 계속해서 적을 필요로 할 수 밖에 없다. 영화 내내 새로 바뀐 어린 주인의 안위를 걱정하며, 모든 선택과 행동(포키를 구출하는 것부터 보핍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까지)이 주인의 안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우디의 모습은 <토이스토리4>도 예전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거 아닐까? 분명 결말부에서 주인을 떠나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역할을 대신할만한 장난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우디가 떠나는 때는 자신의 역할을 대신해줄 허수아비(포키)를 세우고 나서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허수아비를 세우는 것은 이데올로기를 표상하는 주인에게 계속해서 봉사하고 추종한다는 모종의 타협으로 인한 자기만족을 충족시키기 위함이 아닌가? 수동적이고 간접적으로나마 주인에게 복무하고 있다는 마음이 들때에만 떠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디의 행동을 진정으로 자유롭고 주체적인 선택이라고 볼 수 있을까? 아마 우디는 주인이 필요로 할 때라면 언제든지 다시 돌아올 것이다. 주인으로 표상되는 이데올로기가 "호명"하는 순간 우디가 주체처럼 가장된 객체였다는 사실이 폭로될 것이다.
우디의 "허수아비", 포키서사적인 특징을 논했으니, 이제 캐릭터의 설정에 주목해보자. 우디는 50년대에 만들어진 카우보이 인형이다. 낡은 옷을 입고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촌스러운 소리상자를 달고 있는 이 인형은 우리에게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카우보이는 서부 개척시대 법과 규율이 정비되기 이전, 공동체의 질서와 정의를 자체적으로 확립해야하는 당시 상황의 상징이다. 공동체에 대한 충성과 헌신을 자신의 본분으로 하는 카우보이를 디즈니가 이 시점에서 부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당시 마구 확장해가는 아메리칸 드림이나 팍스 아메리카나의 화려함을 회고적으로 부활시키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미국의 팍스 아메리카나는 <라이온 킹>에서 사자 왕 ‘심바’를 통해서 집약된다. 심바는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패자로 등극해 세계의 질서를 되찾는다. 영화에서 기존 질서의 수호자이자 심바의 아버지였던 무파사는 말한다. “세계는 미묘한 균형을 통해서 유지되고 있다. 왕의 역할은 이 균형을 지키는 것이다.” 무파사의 정신을 계승하여 질서를 개편한 심바는 기존의 강자였던 영국을 계승한 미국이 빼앗긴 패권을 되찾음으로서 냉전시대를 극복한 것을 상징한다. ‘팍스 히스패니아’-‘팍스 브리태니카’-‘팍스 아메리카나’로 이어지는 팍스의 신화이다.
사자라는 친숙한 동물을 캐릭터로 설정한 것은 특정문화를 보편문화로 둔갑시키려는 의도이며 미국의 팍스 아메리카의식을 보편의식으로 둔갑시키려는 의도의 연장선이다. 실제로 라이온킹은 냉전이 막을 내린 직후 개봉을 했기에, 디즈니 영화의 주 관객인 백인 중산층들이 승리를 자축하는 것에 호소하는 영화가 아니냐는 비판이 있었다.
언급한 디즈니메이션들은 “디즈니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디즈니 최전성기의 영화들이다. 이 시기는 또한 미국의 국력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디즈니가 ‘르네상스’를 맞이한 이면에는 이러한 배경이 숨겨져있다. 미국이 성공을 거두었기에, 보수적인 이데올로기와 미국식 가치를 담고 있는 디즈니의 영화들도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항상 행복한 결말로 끝냄으로서 미국이라는 국가적 지형을 해피엔딩의 인생으로 개념화하는 디즈니 영화들이 정말 그럴듯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은 아메리칸 드림이나 팍스 아메리카나 같은 미국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부추겼으며, 사람들은 그러한 환상을 담고 있는 디즈니 영화를 찾게 되었다. 그리고 디즈니 영화는 이러한 환상을 더 부추겼다. 이렇게 디즈니와 미국 사이에 악어와 악어새 같은 관계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렇다면 왜 디즈니는 지금 시점에서 “디즈니 르네상스”를 부활시키려 하며, 왜 그것이 미국 안팎으로 호응을 얻고 있는 것일까?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 바로 지금의 미국 사람들이 과거를 회상하고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디즈니 르네상스”에 해당하는 1990년대는 독일이 공식적으로 통일되고 이듬 해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의 연쇄적인 붕괴가 시작되면서 말 그대로, 미국이 세계 유일 초강대국 위치에 등극했던 시기이다. 동시에 빌 클린턴 정부가 들어서면서 경제적으로 상당한 호황을 누린 시기이도 하다. 1920년대 2차대전 직후의 미국과도 비교 되지만, 이때를 더 화려하게 보는 경향이 있다. 이런 노스텔지어는 히어로들이 승리의 열쇠를 과거에서 찾는 <어벤져스:엔드게임>에서도 드러나는 최근 미국 영화의 경향이다.
둘째, 지금의 미국만큼 디즈니의 보수주의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하는 때가 없기 때문이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Let's Make America Great Again)을 사용한 도널드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뽑으며 시민의식과 문화, 정책까지 과거로 돌려보내려 하는 미국인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선전영화가 있을까? 게다가 애국주의, 포퓰리즘을 적극 활용하여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트럼프 정부의 미국에게 디즈니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일 것이다.
셋째, 실제로 미국은 예전의 모습을 조금씩 되찾고 있는 까닭에 미국 밖에서도 먹힐 수 있다. 트럼프는 대규모 세금 감면과 점진적인 재정확장을 통해 미국 경기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지금 미국은 예전의 경제 불황을 어느 정도 극복했다고 볼 수 있는 수준이다.
여기에 더해, 디즈니가 인수한 마블 영화의 성공 등이 디즈니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그래서 디즈니는 이 시점을 예전의 전성기와 같다고 보고, 디즈니 르네상스를 전 세계 곳곳으로 전파하려 하는 것이다.
영화산업은 국가 이데올로기를 산출하며, 수용자들을 부르주아적 사회규범에 빠지도록 유인한다. 영화산업은 CG 따위의 고도로 발달된 과학기술의 뒷받침으로 우리에게 현실의 고통으로부터의 도피처와 오락거리가 되기도 하지만, 결국은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우리를 구속하는 수단인 것이다. 디즈니메이션도 반복되는 이데올로기의 동일성과 재생산의 양식만을 지닌 지배의 심미적 등가물이다. 즉 오락물 등의 내용이 겉보기에는 변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변화 없는 반복의 등가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실사화로 개봉하게 될 <인어공주>논란도 디즈니가 얼마나 형식적인 평등에 집착하며, 진보적인 체 하는지 잘 보여주는 경우이다. 디즈니는 "정치적 올바름"에 따라 인어공주 캐릭터를 흑인으로 변경시켰다. 그들이 캐릭터 변경을 하려 했다면 디즈니 원작의 붉은 머리의 백인 캐릭터를 <주먹왕 랄프> 같은 다른 자신의 작품에서 밀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면 적어도 중대한 캐릭터의 변경이 있을 것이라는 배경, 복선, 힌트를 줬어야 했다. 자그마한 힌트라도 있었으면 그것을 적극적으로 읽어주고 옹호하고 싶은 것이 바로 컨텐츠 소비자들의 마음이다. 실컷 다른 작품에서는 인어공주의 원래 캐릭터를 2차 3차 창작의 형태로 팔아 제끼다가 별안간 아무런 세계관 내지는 작품 내적 맥락 없이 '이제부터 너네들이 알던 인어공주는 흑인이야', 이렇게 말하면 납득할만한 사람은 별로 없다.
지금 더 쇼킹한 것은 안데르센 동화 원작의 인어공주가 흑인이냐 백인이냐 황인이냐 따위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 독과점적 지위에 있는 소수 0.1%의 부자와 기업이 문화 컨텐츠 시장뿐만 아니라 여타 영역에서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냐이다.
이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양심적인 진보주의자들의 역할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왼팔에 PC 옹호 완장을 찬 이들이 대중을 더 급진적인 문제의식으로 견인하기는 커녕 디즈니라는 거대자본의 어젠다에 비굴하게 끌려 다니는 형편 없는 모습이나 보여주고 앉아 있다는 것이다.
사실 그렇다. 인어공주가 별안간 흑인이 된다고 해서 미국 내에서 공권력으로부터 부당한 탄압을 받는 흑인들의 처우가 개선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그런 탄압을 받는 이유는 그들이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지 그 동안 일리아드의 주요 영웅이 흑인으로 표상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데 마치 그런 것처럼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디즈니식 미국적 보수주의의 본질이다. 어떤 비평가는 말했다. "오히려 정치적 올바름에 기한 비판을 수용-의식해가면서 계속 보수주의적인 세계관이 갱신되어가는 디즈니의 모습을 보는 것은 재미있다. "(https://blog.naver.com/paxwonik/221579478217)
문화산업에 의해 대중은 왕으로 대접받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주체가 아닌 객체에 불과하다. 대중매체는 문화산업을 위해 갈고 다듬어졌다. 문화산업은 대중들의 정신을 복제하고 보강하고 강화하기 위해 그들에 대한 관심을 남용하는데, 문화산업 자체가 대중들에게 적응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을지라도 대중들은 여전히 대중문화의 조작자들에 의해 기만되고 이데올로기화되고 있다. 오늘날 영화산업은 문화제국주의의 첨병인 것이다. 디즈니를 보면 알 수 있지 않는가?
<알라딘>-지위를 초월한 사랑 이야기
<토이스토리4>-다르지만, 함께:
보수이데올로기의 재생산, <라이온킹>실사
<알라딘>은 한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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