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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우에게 <12가지 인생의 법칙>을?

<기생충> 결말(한국사회의 현실)을 바라보는 세가지 다른 관점

by 이슬빛

<기생충>은 한국사회의 현상을 다룬 영화이다. 기생충을 보고 난 관객들이 “불편하다”는 느낌을 많이 토로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기생충>이 암울한 현실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포착해서 그런 것이다. <기생충>이 한낱 상상 속의 이야기라면, 애초에 장르도 코미디니까 그냥 웃어넘겨 버리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이것은 무엇을 상징하는 거고, 결말 부분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갑론을박을 벌였다. 영화에 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을 지적한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먹고 사는 문제와 관련된 것 아닐까. 먹고 사는 문제와 관련되는 순간,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도 그냥 웃고 넘어갈 수 없게 된다. 이 점에서 봉준호는 어그로를 끄는 데 확실하게 성공했다.


그리고 사실 몇몇 논쟁들은 주목해서 봐야할 필요가 있다. 앞서도 말했듯이 <기생충>은 현상을 다룬 영화이기 때문에 이 현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사회를 바라보고 해법을 제시하는 관점이 갈리기 때문이다. 특히 <기생충> 결말을 바라보는 데에 세 가지 관점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을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말의 내용은 이렇다. 극의 마지막 부분에서 기우는 부자가 되겠다는 계획을 세우며 아버지를 구출해내겠다고 다짐을 한다. 그가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 내용이 내레이션으로 흘러나온다. “아버지, 저는 꿈이 생겼습니다. 계획도 생겼습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제 계획입니다. 돈을 많이 벌면 (아버지가 갇혀 있는) 그 집을 사겠습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그 지하실에서 그냥 나오면 됩니다. 그러면 엄마와 제가 반겨드리겠습니다. 그때 우리 다시 만나요.”


세 가지 다른 관점은 이렇다.


1. 희망은 있다. - 기우가 부자가 되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은 이전과는 확실히 달라진 삶의 태도이다. 기택은 “완벽한 계획은 무계획이다.”라고 말해서 그렇게 대책 없이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아마도 기우의 삶은 예전보다는 조금은 나아질 것이다.


왜냐하면, 계획이라는 것은 결국 성공하지 못할지언정 세우는 것만으로도 삶을 조금 더 진보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결국 삶은 매일 쌓이는 ‘가난의 이자’에 잠식당할 뿐이고, 반대로 계획을 세우면 매일 원리금 상환을 통해 가난을 해소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 아직 희망은 있다.

사실 이러한 관점은 요새 유행하고 있는 조던 피터슨 식의 “세상을 탓하기 전에 네 방부터 정리하라.”라는 원칙과 상통한다.


"우리 개개인의 삶이 조금씩 나아지면 이 세상도 살기 좋은 곳으로 변할 것이다."

이것은 당장 보면 최악의 꼰대 발언처럼 들리지만 요점은 매우 설득력 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보상에 이끌리는 존재이다. 따라서 자신이 직접 성취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과업을 수행하고 그런 자신에게 작은 보상을 행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는 작은 성취감들이 자존감을 높이고 궁극적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강한 힘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서구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유교적인 자기도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금언도 피터슨식 '강한 개인주의'와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기생충은 현상을 다루고 있고, 12가지 인생의 법칙은 해법을 다룬 것이니 논리의 흐름 상으로 보면 자연스러운 연결이다. 결국 희망을 강조하는 관점은 개인의 변화를 촉구한다. 기우도 변할 수 있으니, 너네도 오늘부터 다짐하고 마음을 다잡아보라는 것이다. 안그래도 영화 자체만으로도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 좀 있는데, 그것을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경향이 이러한 관점에 반대하는 사람들(앞으로 보게 될 2의 관점)을 더욱 불편하게 한다.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도 짜증날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이러한 불편함을 받아들이면서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12가지 인생의 법칙>처럼 사회구조적인 이유로 생긴 어려움을 강한 개인주의와 "개인"의 변화를 통해서 해결하려고 하는 관점이 상당히 자연스러운 귀결이기 때문이다. 피터슨 식으로 말하자면, 사회구조적인 이유로 생긴 어려움은 "혼돈"(개인을 넘어서는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지 않는가)이며, 12가지 인생법칙은 "혼돈의 해독제"인 셈이다.(<12가지 인생의 법칙>의 부제는 혼돈의 해독제이다)더 이상 '사회를 변화시키자'며 짱돌을 던지는 사람은 없으며, 체게바라처럼 혁명을 일으키는 영웅주의나 집합적 행동의 효능을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경쟁이 만연한 지금 사회를 살아가는 청년들은 (필요하다면 중대한 희생을 감수하면서 선을 위해 싸우는) 그런 종류의 도덕적 영웅의 가능성을 믿지 않는다. 일부에서는 오히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도 망설이지 않는다. 일베나 워마드가 대표적이다.

선을 넘기를 원하지 않는 강한 개인주의

그러니, ‘세상을 바꿔라’라고 외치는 좌파 영웅보다는 ‘너의 방을 치우고 스스로를 칭찬하라’라고 말하는 조언자가 더 끌리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한 평론가는 이렇게 말했다. “한 마디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좌파 영웅주의가 몰락하고 세상에 휘둘리지 않는 개인이 되는 법을 조언하는 조언자가 득세한 것이다. 가치관도 변하고 롤모델도 변한 것.”


2. 희망은 없다 (1) 기우가 계획을 세우기는 했지만, 그의 계획이 계획대로 되지 않을 게 뻔해서 안타까웠다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보는 관점이 감독의 의도와 가장 가깝다. 봉준호 감독은 애초에 이 영화를 닫힌 결말로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봉준호 감독의 계산으로, 최우식의 벌이로 박사장 저택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500년이 걸린다. 기우가 이 책을 읽고 “12가지 인생의 법칙”을 삶에서 실천한다고 해도 반지하방에서 나와 박사장의 집을 살 수 있을까? 그것은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결국 우리가 사는 사회는 헬조선 디스토피아이다. 대체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영화가 불편함을 줬다고 토로하는 것 아닐까. 친구들에게 자신이 느꼈던 불편한 감정을 토로함으로써 해소하려는 사람들의 심리는 인터넷에서 모멸을 당한 개인이 어떻게 성공적인 방식으로 이를 만회했는지 “사이다썰”을 풀어내려고 하는 심리와 비슷하다. 이것은 역으로 자신이 얻은 모멸감에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지 전전긍긍하는 심리적 콤플렉스를 드러내는 것이다. 사실 이런 관점을 따라가다 보면, 이민이 답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민을 갈 수 있었다면 벌써 갔을테고 이 영화도 보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시대는 상처받기 쉬운 개인들을 너무 방기하고 있다.


3. 희망은 없다 (2) 남은 것은 혁명(정치적 참여)뿐이다. 이들에게는 체게바라가 영웅이다. “게릴라 무장투쟁에 대한 낭만 같은 것은 딱히 없었지만 그가 불가능한 목표를 위해 스스로 끊임없이 공부하고 수련한 것뿐만 아니라 이를 집합적 행동으로 연결시킨 것이 멋지다고 생각한다. 사실 삼국지나 수호지의 영웅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 동안 나에게 영웅의 모습은 이런 민중주의적 요소를 극대화한 혁명가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자기계발서에 대한 말이 나온 김에 말하자면 나는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도 일종의 자기계발서였다고 생각한다. 그 책의 내용은 별 것 없고 한 마디로 '어떻게 하면 (정치)신문을 잘 만들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 전부이다. 오늘날 레닌이었다면 '어떤 어플을 만들 것인가' 같은 문제로 비슷한 책을 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오쩌둥의 금언들도 바울 서신 못지않은 훈계와 권면들로 가득 차 있다. 체게바라부터 시작해서 이들의 공통적인 메시지는 '너 자신은 충분히 (민중의)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과거 신좌파의 물결 속에서 청년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존 레논이 노래했듯 'Working class hero is something to be'이다.”


https://youtu.be/h_4NWoJcIEY

현상을 바라보는 의견차이는 명백히 존재하는 것이고, 때때로 충돌하기도 한다. 얼마전에 있었던 좌파 이론가 지젝과 우파 조언자 피터슨의 논쟁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지젝의 입장은 (2)와 (3) 사이의 어딘가인 것 같고, 피터슨은 (1)의 관점에서 논쟁을 했다. 지젝의 메시지는 <자본은 강력한 정치권력에 의해 더 규제되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평등주의, 공산주의가 답은 아니다, 난 매우 비관적이다, 대중은 아마도 멍청하다> 등 에 가깝고, 피터슨의 요지는 <자본주의는 수많은 문제가 있지만 우리가 아는 다른 모든 시스템 보다는 문제가 적고 특히 공산주의에 비하면 더욱 그렇다> 라는 것인데, 사실 이 둘이 별로 충돌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맑시스트 대 자본주의자"라는 구도로 시작되었고 포장된 것으로 봐서(실상은 둘이 명확하게 대립한 것이 아니라는 게 일반적인 평이다.) 사람들은 각자의 의견을 이 둘이 대변해주기를 기대했다. 확실한 건 둘은 "자본주의가 문제가 많은 체제"라는 점에서 일치했다는 것이다. 또한 지젝도 3의 입장이 아니라는 점에서, 순수하게 (3)의 관점을 갖고 있는 사람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로르샤흐 테스트라고 아는가? 검사자는 검정 잉크 얼룩의 그림을 보여주며 피검사자에게 무엇이 보이냐고 묻는다.


“음……. 나비가 보여요. 그리고 뭔가 날아가는 것 같네요.”

“더 떠오르는 것은 없나요?”


이런 식이다. 같은 그림을 보아도 사람들마다 대답이 다 다르다. 그냥 잉크얼룩에 지나지 않을뿐인데도 사람들은 그곳에 자신의 생각을 투사해 무언가를 떠올린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보아 왔던 익숙한 방식으로만,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이 있다. <기생충> 결말도 이런 식이다. 사람들은 감독의 의도가 어찌되었건 결말을 각기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며 각기 다른 해석을 이끌어낸다.


<기생충>은 현상을 다룬 영화이다. 현상은 엇갈린 의견들을 만들어냄으로서 또 다른 현상들을 낳는다. 엇갈린 의견들은 또 하나의 파생된 현상이기에 주목할 가치가 있다. 어떤 사람이 사회현상에 대한 갖는 의견이 궁금하다면, 그 사람에게 기생충 결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보라.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는 혈액형 검사도 하는 마당에, 이것이라고 안될 것은 무엇이겠는가.


박가분, <청년에게 좌파 영웅보다 우파 조언자가 더 호소력 있는 이유> 참고,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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