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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해석-메타포는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될 수 있다.

'수석'을 통해 본 영화 기생충

by 이슬빛

어느 날 위대한 왕 앞에 장님들과 코끼리 한 마리가 모여 있었다. 왕은 장님들에게 코끼리를 만져보고 그게 무엇인지 설명해보라고 했다. 누구는 코끼리의 다리를 만지고 코끼리는 거대한 기둥 같다고 했으며, 누구는 코끼리의 상아를 만지고 코끼리는 딱딱한 돌과 같다고 말했으며, 누구는 코끼리의 코를 만지며 코끼리는 강한 근육덩어리라고 했다. 이게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진리이다. 모두 틀린 것 없지만 온전한 실체를 보지 못한다. 온전한 실체라는 것이 과연 실재하는가에 대해서도 의문을 던지는 사람이 많다. 그들에 따르면, 인간은 각기 다른 경험과 지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같은 사물을 보더라도 일치된 상을 얻지 못한다.


메타포도 이와 비슷하다. 사물은 어떤 방향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비춰질 수 있는 것이고, 메타포도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설명과 해석으로만 어떤 현상 전체를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맥락에 따라 사물의 의미도 달라지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마다 다 다른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상징도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관점과 해석을 용인할 수는 없다. 우리는 소통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좀 더 호소력 있고 보편적인 해석을 지향해야 한다. 보편적인 해석에는 개연성 있고 정교한 언어로 설명이 뒤따라야 한다.


요새 극장가를 달구고 있는 기생충에도 다양한 메타포(상징)들이 나온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수석’이다. ‘수석’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대해 다양한 의견들이 있다. 나는 그 중에서 가장 개연성 있다고 생각하는 해석 2가지를 소개하고, 이를 통해 영화 <기생충>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싶다.

영화에 수석과 관련해서 중요한 장면이 몇 가지가 있다.

1. 기우가 비가 찬 반 지하에서 수석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장면

2. 대피소에서 수석을 끌어안고 생각하는 장면

3. 지하에 사는 문광 남편을 죽이기 위해 수석을 갖고 내려가는 장면

4. 수석을 자연으로 돌려놓는 장면


첫 번째 해석은 수석을 ‘부유함’, ‘기택네에는 어울리지 않는 어색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수석은 그 속성부터가 무겁고, 소지하기가 어렵고 불편한 물건이다. 또한 수석은 부유한 집의 전유물이다. 기택네 집에 있을 물건이 아니다. ‘부유함’을 상징하는 수석을 억지로 소유하려하는 순간, 그것이 ‘기이한 방식의 삶’이라는 결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수석은 기택네가 ‘기이한 방식의 삶’을 버리기 전까지 계속해서 기택네를 따라다닌다. 아니면 수석을 버리지 않고 갖고 있는 것이 기택네가 자신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부유함’에 계속해서 집착하고 그래서 ‘기이한 방식의 삶’을 선택하게 되는 동기가 반영된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1-기우가 비가 찬 반 지하에서 수석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장면은 ‘부유함’에 집착하는 자신에 대한 회의감의 표출이라고 볼 수 있다. 아니면, ‘부유함’에는 걸맞지 않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일 수도 있다.

이는 기우가 대피소에서 수석을 끌어안으며 생각하는 2번 장면으로 이어진다. 그는 부유함을 상징하는 수석이 자신의 집에 들어온 이후로, 자신과 걸맞지 않는 삶에 집착하기 시작했다고 느낄 것이고, 수석을 저주할 것이다. 그리고 재앙을 불러온 이 수석을 제 자리에 갖다 놓으면, 재앙도 끝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3에서 수석은 무겁고, 소지하기가 불편하기 때문에 굴러 떨어진다. 결국 이것은 파국을 부른다. 부잣집에 어울리는 수석의 존재처럼 ‘부유함’에 집착하는 것도 파국을 불렀다.


결국 이렇게 본다면 수석을 소유하려 하고, 계속해서 끌어안는 행위는 부유함에 대한 과도한 욕망이 투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자신들에게 맞지 않는 너무 과도한 욕망이 기이한 삶의 방식을 불렀다. 이렇게 과도한 욕망을 품게 된 건 기택네가 자신들의 계층을 수긍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렇게 과도한 욕망을 품는 건 사회가 부추긴 것이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영화에서는 취객이 그들의 반지하 집 앞에서 노상방뇨를 하는데, 이러한 상황을 매번 겪으면 그 누구라도 ‘부유함’에 집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잘못된 방식으로밖에 그것을 실현할 수 밖에 없더라도. 여기에서 관객이 기택네에 공감하고, 동정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파국을 겪고나서야 기우는 ‘부유함’을 과도하게 욕망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기우가 수석을 제자리에 갖다놓는 것은 과도한 욕망을 버리고, 자신의 계층을 수긍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두 번째 해석은 수석을 ‘요행’과 ‘운’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제목의 기생충이 '기택네'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기택네 가족이 기생충의 주요한 속성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 중 하나는 숙주에 기생해서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순전히 운에 기대는 삶이다. 기생충은 운이 따라서 숙주에 들어가면 살고, 운이 안따라서 숙주에 들어가지 못하면 죽는다. 피 빨 대상을 찾지 못한 운 나쁜 모기는 죽을 수 밖에 없다. 기택네 가족이 살아가는 방식도 순전히 운에 기댈 수 밖에 없는 삶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있는게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재물운을 가져다 준다'는 수석을 집에 들인건 앞으로 이들도 운에 상당 부분 의존해서 살아갈 것이라는 걸 암시하는 대단히 상징적인 행위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수석은 운에 매달리고 싶어 하는 기택네의 소망을 드러내는 도구이다. 사회가 점점 예측할 수 없게 될 때 사람들은 운이나 미신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우리의 어려워진 사회현실을 잘 투영한다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서는 자연재해로 인해 집이 침수되기도 하고, 경제변동으로 인해 직업을 잃고 하층민으로 몰락하기도 한다.(기택은 원래는 사업을 했으나 망해서 하층민이 된 것). 우리가 성취한 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리는 경험을 한다면,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운"이나 "요행"에 매달리고 싶어 할 것이다.


그렇다면 1-기우가 침수 된 반 지하에서 수석을 물끄러미 바라본 것은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사람들이 운에 매달리게 되는 상황이 올 때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듯이, 기우도 복잡한 생각을 가졌을 것이다. 가장 첫 번째로는 “운”이나 “요행”에라도 매달리고 싶은 절박함 때문에 수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는 기우가 씁쓸한 표정을 지은 것으로 보아,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이런 것에까지 의존해야 하나?’ 라는 아이러니함을 느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아니면 자신의 상황이 수석처럼 불가해하고, 초자연적인 힘이 작용되는 신비스러운 것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다. '아니 이 수석은 재복을 가져다준다는데, 왜 상황은 계속 반대로 가지? 더 이상 악화될 것도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는데, 더 악화되는 이 상황은 뭐지?'

수석은 운에 매달리고 싶어하는 소망을 드러내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결과는 그 반대로 전개되면서 영화의 '블랙코미디 면모'를 강조한다. 블랙코미디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나 사건을 통해 웃음을 유발하는 코미디의 하위 장르이다. 냉소적이며 음울하고 때로는 공포스러운 유머 감각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재물 운과 합격 운을 가져다준다”는 수석이 집안에 들어온 뒤, 이들에게 행운이 찾아온다. 기택도 "아, 이게 정말 행운을 불러 오는구나"라는 식으로 말하는 대사가 있었다. 그러나 과연 그게 행운이라고 볼 수 있는걸까? 결과는 정반대였다. 반 지하집은 정말 가진 것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볼품없는 것이고, 기택네 스스로도 외면하고 싶었던 것인데 그것마저 잃어버리고, 최악이라는 상황에서 더 최악으로 떨어지니까 아이러니람과 암울함을 동시에 느꼈을 것이다. 정리하면, 수석에는 (특히 하층민들에게는) 모든 것을 운과 요행에 맡길 수밖에 없는 '예측불가능하고 불안정한 사회'가 투영되어있다.


블랙코미디는 비극의 요소에서 웃음을 끌어내는 장르이다. 블랙코미디는 다른 말로 희비극이라고 하는데, 희비극은 그 용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희극과 비극이 혼합되어 있는 형태이다. 이 영화를 블랙코미디라고 본다면, 이 영화의 비극적인 요소는 무엇일까?나는 수석을 해석하는 두 다른 관점이 이미 비극의 요소를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비극을 비극답게 만드는 것, 비극을 구성하는 주된 요소믄 두가지가 있다. 바로 하마르티아와 페리페테이아이다. 비극의 주인공은 윤리적 수준에서 특별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평범한 인간이어야 한다. 기우가 특히 그렇다.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 좋은 자질과 더불어 어떤 약점, 예를 들어 지나친 자만심이나 욕심 격한 기질이나 충동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인물은 동기가 악해서가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어로 하마르티아, 즉 판단의 잘못이라고 부른 것, 또는 일시적인 맹목, 또는 현실적이거나 감정적인 과실 때문에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다. 욕심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고, 기택네는 그것이 극대화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 뿐이다. 페리페테이아는 운의 역전을 의미한다. 페리페테이아를 통해서 우리는 의도와 결과 사이의 비틀린 관계를 만난다. 수석은 재물운을 가져다 준다면서 집에 들였더니 결과는 정반대였다. 그래서 문광 남편을 죽일 때도 운을 바라고 수석을 지하실로 갖고 내려갔지만, 돌은 기우의 손에서 벗어나고 결국에는 기우의 머리를 짓이기게 된다.


첫 번째 관점은 비극의 원인이 “과도한 욕망”이라는 개인의 결점, 그러나 누구나 있을 수 있는 결점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는 점에서 하마르티아를 강조한다. 두 번째 관점은 비극의 원인을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운(또는 불운)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페리페테이아를 강조한다.


두 관점이 어떻게 다르건 간에, 둘 다 비극의 교훈으로 인도한다는 점은 같다. 하마르티아 때문이건 페리페테이아 때문이건, 주인공은 자신이 귀중하게 여기던 것을 모두 잃고 거의 언제나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내놓아야 한다. 비극작품은 재앙(불운의 결과)을 피하는 우리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지 말라고 가르치며, 동시에 재앙을 만난 사람들에게 공감을 느끼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극장을 나설 때, 우리에게는 벌어지지 않을 일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고, 쓰러지고 실패한 사람들이 우리와는 그렇게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걸 느끼고, 결국에는 그들을 우월한 태도로 대할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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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이 영화를 블랙코미디라고 본다면, 결말부를 희망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관점에 조금은 힘을 실어주지 않나 싶다. 희비극은 인간 존재가 비극성에 대해 절망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결말부를 희망적으로 그리는 특징이 있다. 새로운 희망을 암시한다는 점이 과도기적 시대를 살아가던 당대 관중들의 호응을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석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것으로 나타나는) 기우의 태도 변화가 그가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지는 못할지라도, 조금은 과거와는 다른 미래를 살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하는 여지를 남긴다는 것이다.


#덧붙임2-물론 집을 사서 아버지를 구출하겠다는 계획이 판타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이 영화가 블랙코미디이긴 하지만, 희극적인 요소보다 비극적인 요소가 더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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