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이라는 제목이 인상적이었다. 영화에서 기생충은 무얼 의미하는 것일까? 처음에 나는 이 영화가 기이한 생명체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줄 알았다. <괴물>에서 한강변에 출현한 ‘괴물’과 맞서 싸우고, <에일리언>에서 외계생명체와 맞서 싸우듯이 말이다. 그러나 나중에 지인의 말을 통해서야, 기생충은 부잣집에 얹혀사는 가난한 가족을 은유한 것임을 알았다.
박사장네 기생하기 위해 모의하는 가족
영화를 보다보면, 제목에서 기생충이라고 명명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가 명확해진다. 기택(송강호 분)네 가족은 너무 빈곤해 반지하방에서 하루하루를 겨우 연명한다. 그러던 중, 아들 기우는 우연한 기회로 IT기업 CEO인 박사장(이선균 분) 딸의 과외를 맡게 된다. 물론 기우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고 과외를 할 실력도 되지 않지만 정체를 속이고 과외선생 노릇을 한다. 사기극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모든 가족이 합심한 결과 부잣집에 완벽하게 빌붙게 된다. 일단 미술 선생님을 시작으로 하여, 운전기사, 가사도우미 자리를 기택네 가족 모두가 꿰찬 것이다. 결국 기생충은 기택네 가족이고, 숙주는 박사장네 가족이다. 그런데, 기생충은 기택네 가족만이 아니었다. 기택네 가족은 이미 다른 남자가 숨겨진 지하실에서 기생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이야기는 기생충간의 싸움으로 흐른다. 그 싸움의 결과는 처참했는데, 누구랄 것 없이 많은 사람이 죽고, 기택은 그 집 지하실로 도망쳐 숨어버리는 것으로 결말이 난다.
박사장 부인을 속이기 위해서 모의하는 기우 남매
1.구조
기택이 숨어버린 지하실을 매우 인상 깊었다. 그곳은 영화의 많은 부분을 설명해줄 수 있는 중요한 공간이다. 그러한 지하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 보자.
지하실은 매우 구불구불한 구조로 되어있고, 카메라는 이 구불구불한 미로를 따라간다. 숙주의 몸이 박사장네 집이라면, 기생충이 사는 지하실은 몸의 내장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불구불하고, 절대 몸 밖으로 드러나지 않으며, 주요한 기능을 담당한다. (지하실에 있는 사람들도 집안에서 가장 중요하고, 실질적인 일들을 하지만 결국에는 지하에 살며 바깥으로 나오지 않는다.) 가끔씩 문제가 생기면 몸에 신호를 보내기도 한다.(지하실의 인물들도 문제가 생기면 연결된 전등을 통해 나름의 신호를 보낸다.) 이렇게 본다면, 이 이야기는 결국 내장(지하실)에서 기생충들끼리 피터지게 싸우니까, 내장도 터지고, 숙주(박사장 가족 또는 집)마저 폭발해버리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나중에는 박사장마저 죽어버리니..)
2. 속성
또한 지하실은 시간관념이라는 게 없는 공간이다. 그곳에는 햇빛도 달빛도 들어오지 않으니,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시간이 얼마나 경과했는지 도무지 알 수 있는 길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어두컴컴한 지하실은 시간관념이 없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공간이 아닐까. 물론, 지하실에 이미 거주하고 있던 다른 '인간 기생충'이 '오늘은 4년 6개월 17일째 되는 날이야'라며 시간을 세기는 한다. 그렇지만, 그는 매일 퇴근하는 박사장의 계단 밟는 소리를 듣고 날을 세는 것이다. 이는 지하실 내부에 있는 것만으로는 자체적으로 시간을 잴 수 없으며(시계도 없다), 시간도 외부에 의존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설사 시간을 안다 할지라도 대체 지하실에만 틀어박혀 있는 사람에게 그것이 무슨 필요가 있으며,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기택 네 가족이야말로 시간관념 없는 사람들의 전형이다. 극 중반쯤 기택(송강호 분)은 아들 기우(최우식 분)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들아, 가장 완벽한 계획은 무계획이다. 왜냐하면 계획을 세우면, 절대 계획대로 되지 않는 법이니까.”
계획이 없으니,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미래를 생각하지 않으니, 꿈도 없다. 꿈이 없으니, 발전하려하지 않는다. 발전 또는 진보는 과거에 비추어보았을 때 나아졌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발전하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은 과거를 되돌아보려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시간을 잊었기에 이성이 마비되고, 직감과 본능에만 충실한 삶을 살게 된다. 지하실 또는 독방에 너무 오랫동안 박혀있으면 사람이 이상해진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영화 속 다른 ‘인간 기생충’도 극중 내내 광기 어린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생각은 나만 한 것이 아니었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도 지하실의 속성을 정확히 간파했었다. 그의 소설 <지하생활자의 수기>는 말 그대로 지하에서 살며, 바깥과의 접촉을 최대한으로 피하는 주인공의 독백으로만 이루어져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도 워낙 오랫동안 지하에서 살다보니까, 시간에 무감각해진다. 이 소설에는 시간을 알려주는 단어도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지하가 시간이 부재하는 공간임을 잘 드러내주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소설의 화자인 지하생활자는 이성이라고 하는 것을 극도로 혐오한다는 점에서, 지하가 ‘비-이성’과 잘 어울리는 장소로 예전부터 인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계단
지하실과 지상의 집을 잇는 계단도 영화의 중요한 상징이다.(봉준호는 이 부분을 김기영의 <하녀>에서 많이 따왔다고 한다.) 계단을 뛰어오르는 '인간 기생충'들은 하류층들의 상승하고 싶은 욕망을 잘 보여준다. 계단은 사람을 죽이고 뛰어내려가는 기택을 지하실로 이어주는 통로이기도 한다. 이때의 계단은 욕망의 좌절과 소시민의 추락을 암시하는 장치이다. 영화 <설국열차>는 영화적 힘의 방향이 수평적이었다. <설국열차>의 주인공은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다음 객차로 넘어가야 한다. 이와 반대로 영화 <기생충>은 수직적으로 나아간다. 등장인물들은 올라가거나 내려간다. 특히 기택네 가족은 유독 '하강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 상류층에서 하류층으로 추락하며, 반지하방에 떨어지는 빗물도 하강하며, 도망치는 기택의 모습을 포착하는 카메라의 시선도 하강한다.
기택이 지하실로 하강하듯이, 벌레(충)들도 사람이 나타나면 살고자 하는 본능을 충실하게 따라 지하로 숨어버린다. 이들의 특기는 ‘숨기’나 ‘눈에 띄지 않기’이다. ‘인간 기생충’ 면모를 보이는 기택이 박사장에게 발각될 위기에 처하게 되는 상황이 있다. 그때 그는 꿈틀꿈틀 기어서 도망친다.(물론 그때 그는 걸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어느 정도 상징적인 것도 있다고 본다.) 그에게는 오직 도망치고자하는 욕망만이 두드러져 보였다. 박 사장이 그를 두고 냄새 난다고 뒷담화하는 것을 듣고, 박사장과 그의 부인(조여정 분)이 성관계를 맺는 소리를 다 들어야했지만 그는 수치심을 느끼기보다는 오로지 살고자 하는 본능을 따른다. 인면수심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한 가족의 어엿한 가장이였던 사람이, 사랑하는 남편의 예쁜 아내였던 사람이, 어엿한 딸과 아들들이 왜 기생충이 되어버렸고 왜 결국 지하에서 나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린 걸까?
나는 이 까닭이 왜곡된 인간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타인을 진심으로 대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물질적 욕망을 채울 수단으로만 본다. 영화에서 타인에게 보이는 호의나 친절, 미소 등은 대체로 다 가식과 위선에서 비롯된 것이고 속으로는 딴 마음을 품고 있다. 박 사장은 운전기사가 앞에 없을 때, 냄새가 난다고 혐오감을 표출한다. 아내가 없는 자리에서 아내를 사랑 하냐고 물으면, ‘뭐 그런 셈이죠.’라고 얼버무린다.
기택도 마찬가지이다. 그에게 박 사장은 착취의 대상일 뿐이다. 등장인물들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타인을 대하는 태도를 싹 바꾼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면 언제든지 굽실거리다가도, 자신에게 하등 도움이 안 된다 싶으면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급격한 태세전환을 한다.쫓겨난 가정부 아줌마는 기택네 가족에게 싹싹 빌다기도, 그들의 약점을 알고 자신이 우위를 점하자 기고만장해 한다. 상황에 따라, 태도가 바뀌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누구도 기생충이 될 수 있고, 누구도 숙주가 될 수 있다. 인간적인 가치가 부재한 상황 속에서 ‘만인은 만인을 착취하려 하기 때문이다.’
운전기사 뒷담을 하는 박사장
상황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음을 안다면, 결코 우리 사회와 무관한 영화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기택이 그런 처지로 전락한 까닭에는 연이은 사업 실패 때문이다. 그는 ‘대만 카스테라 장사가 망했다.’는 말도 하는데, 이는 우리 사회에서 자영업자들이 겪는 수난을 암시하는 것이며, 여기에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도 있다.
기생충이라는 강한 제목은 우리 사회의 세태를 풍자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싶다. 요즘 ‘무뇌충, 의전충, 일베충’ 등 충이 들어가는 단어를 숱하게 접하게 된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맘충’이었다. 바야흐로, 벌레의 시대다. 사회적 약자를 비롯해 자신과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벌레(蟲)의 낙인을 찍어 거리낌 없이 조롱하고 비하하는 차별과 혐오의 언어가 사회에 횡행하고 있는 것이다. 언어는 그 사회를 비추는 창이라고 한다면, 한국 사회는 이미 관용을 상실해버린 것이 아닐까.
사람들이 실제 생활에서 기택네 가족을 마주한다면 기생충은 고사하고 더 강한 혐오의 표현도 아무렇지 않게 쏟아내며 그들을 매도하였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우리가 그들을 좀 더 따뜻한 배려의 시선으로 품어주었다면, 기택네 가족이 그렇게 까지되는 일은 없었을 수도 있다. 기택은 자신의 생계나 목숨을 걸어야지만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다. 누구(박사장)는 조금이라도 자존심을 건드리면 선을 넘었느니 어쩌네 하면서 노발대발하지만. 우리가 또 다른 기택(기생충)을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그래도 결말부에서 기우(최우식 분)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는데, 이는 기택과는 다른 모습이다.
"아버지. 저는 꿈이 생겼습니다. 계획도 생겼습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제 계획입니다. 돈을 많이 벌면 (아버지가 갇혀있는) 그 집을 사겠습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그 지하실에서 그냥 나오시면 됩니다. 그러면 엄마와 제가 반겨드리겠습니다. 그때 우리 다시 만나요."
기우는 기생충으로 전락해버린 기택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미래와 계획을 포기해버린 기택과는 다르게, 기우는 미래와 계획을 위해 살기로 결심한다. 이런 기우는 기택의 전철을 밟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지닌 인물이며, 각박한 세상 속에서도 변화를 일으키려는 의지를 가진 개인이다. 돈을 벌려는 목적이 자신의 안위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구출해주려는 것이기에 공존을 모색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비참한 현실만을 계속해서 보여주었던 이 영화의 결말은 어느정도 희망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기우는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을까. 사회와 개인이 동시에 노력해야 할 숙제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