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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빛 Dec 26. 2019

영화 <시동>-고전 중의 고전

벌새-기생충-시동

 <시동>은 코믹한 영화이지만 그렇게 밝지만은 않다.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무색하지 않게, 삭막한 사회의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어찌 보면 최근에 개봉하는 영화들의 경향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벌새>가 가진 것 없고 나약한 소녀의 이야기를 다뤘다면, <시동>은 처지가 비슷한 소년의 이야기이다. 영화의 주인공 택일이 그렇다. 택일(박정민 분)은 학교를 자퇴했지만, 검정고시를 볼 생각도 없는 문제아이다. 택일이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오토바이를 타는 것뿐이라서 중국집 배달부 일을 해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삶을 산다.       

 주목할 만한 것은 택일에게는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택일은 어머니 홀로 자식을 돌보는 편모 가정의 외동아들로 등장한다. 택일을 제어해줄 어떠한 가부장적 권위도 존재하지 않고, 부재하는 아버지의 자리를 전직 건달인 거석(마동석 분)이 메꾼다. 요컨대, 택일에게 있어 유사-아버지이자 아버지의 역할을 해주는 존재는 건달인 것이다. 이를 통해 이 영화가 사회적으로 지위가 낮은 사람들, 사회의 피라미드 맨 밑에 위치하여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사는 방식을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생충>이 약자끼리 연대하지 못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기생하고 폭력을 가하는 삶을 그려내었다면, <시동>에도 그러한 모습들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택일과 친구이자 같은 약자의 처지에 놓여있는 상필은 사채업의 길에 빠지면서 자신보다 더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돈을 강탈할 수밖에 없는 삶을 택하게 된다.     


그렇지만 영화는 현실을 한층 더 밝고 코믹하게 그려낸다. <벌새>의 주인공 은희나 <기생충>의 기우나 <시동>의 주인공 택일이나 모두 무거운 현실에 짓눌려, 그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들이 가혹한 현실에 대응하는 방법은 각자가 다 다르며, 그에 따라 영화의 서사도 달라진다. <시동>이라는 영화의 제목도 현실의 고단함과 무거운 짐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승화시킨다는 의미를 우리에게 강하게 전달한다. 영화의 주인공 택일처럼 거침없이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고 떠나버리면 된다는 것이다.     


 영화상에서 계속해서 등장하며, 택일이 계속해서 언급하는 무인도는 이러한 맥락의 연장선상일 것이다. 택일은 자신의 방문에 낙원의 이미지를 물씬 풍기는 무인도 사진을 붙여놓고 항상 그곳으로 떠나고 싶다고 말한다. 마치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하듯이. 택일에게 있어 방문 밖 사회는 너무나 가혹하다. 고등학교마저 자퇴한 그는 어떠한 제도적인 보호막도 갖추고 있지 않은데(심지어 그는 싸움도 잘 못한다.), 방문 밖 어른들의 세계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너무나 냉혹하고 두려운 세계이다. 영화상에서는 코믹하게 처리되지만, 그가 항상 무인도-현실에서 벗어난 유토피아-의 꿈을 꾸는 때는 현실에서 패했을 때 -거석에게 맞고 기절했을 때, 어머니의 가게가 빼앗겼을 때-라는 점도 주목해볼만 하다. 어쩌면 이는 <기생충>의 마지막 장면에서 기우가 갖는 판타지와도 비슷한 것이리라.      


 그렇다면 상필은 어떤가. 상필(정해인 분)의 처지 또한 택일과 비슷하다. 상필은 홀로 눈먼 할머니를 모시고 사는데, 자신의 처지와 계층에서 항상 벗어나고 싶어한다. 할머니는 상필을 항상 ‘호랑이’라고 부른다. 상필은 할머니에게 자기 손자도 못알아보는 거냐며 묻고 따지지만, 그 별명이 싫지만은 않은 눈치이다. 할머니가 왜 상필을 ‘호랑이’라고 부르는지는 영화가 끝날 때가 되어서야 알 수 있다. 그 까닭은 ‘호랑이’가 정글의 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회계층의 맨 밑바닥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 상필을 정글의 왕 또는 호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택일이 무인도로 떠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상필 가정을 지탱해주는 판타지이자 보상심리라고 할 수 있다.       


 이러이러한 것들은 영화상의 특징들이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판타지로 범벅할만큼 이겨내기 힘든 가혹한 현실을 영화는 웃음으로 승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조선 말기 사회가 갈 때까지 갈만큼 갔을 때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들을 풍자하고 웃음으로 승화시켰던 한국의 고전소설들과 비슷하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장끼전을 예로 들어보자. 장끼전은 콩알 하나를 욕심내다가 덫에 걸려 죽는 무능한 가장 장끼를 그리고 있다. 그러나 장끼전의 핵심은 무능한 장끼가 아니라, 공동체가 최소한의 복지 혜택마저 제공하지 않는 사회에서 모든 가족이 가장에 의지해야만 하는 현실이다. 당시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가장의 말이 곧 법이 될 정도로, 가정의 모든 권력이 가장에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장의 역할과 책임이 그만큼 더 막중했다. 그러한 현실에서 무책임하고 무능한 가장의 죽음은 가족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는 비극을 의미했다.     


 사실 장끼전은 웃음과 해학으로 포장되어있지만 그 당시 사회를 교묘하게 풍자한 것이다. 조선 후기에 농업 생산력이 가속화되면서 토지 소유의 집중은 가속화되었다. 이는 극심한 빈부격차를 불러 일으켰고 토지를 잃은 유랑민들이 속출했다. 콩 하나에 집착하여 결국에는 목숨까지 잃는 장끼의 모습에 먹고 사는 일이 시급한 문제로 다가왔던 유랑민들의 삶이 겹쳐지는 것이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유랑민마냥 떠도는 가출청소년의 코믹한 이야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이들을 양산하고 재생산하는, 서사 뒤에 숨겨진 사회구조적 문제들을 봐야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런 의미에서 힘든 현실을 해학적으로 그려낸 <시동>은 조선의 고전소설과 구조와 형식이 겹치는 고전 중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삶을 너무 무겁고 진지하게만 대해왔던 것일 수도 있다. 이제는 좀 웃자. 현실을 웃음으로 극복하고 승화시켰다는 작품 평이 너무 교과서적인 것일 수 있지만, 웃지 않을 때,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소멸되었을 때 삶은 정말로 무겁게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이제는 힘든 현실에 맞서 긍정적인 춤을 춰야 할 때이다. 택일이 유사-아버지 거석의 도움 없이 혼자만의 힘으로 역경을 극복하고 한층 더 성장한 어른에 가까워지듯이, 이러한 서사는 우리에게 힘을 준다.    


우리도, 시동을 걸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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