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타인의 취향>: 취향에 대한 고찰
1. 취미(취향)는 공유될 수 있는가?
‘공유’라는 단어는 어떻게 정의되며 어떤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까?
공유는 ‘두 사람 이상이 한 물건을 공동으로 소유함’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취향에 있어 공유란 ‘두 명 이상의 사람들이 똑같은 취향을 가지고 있는 것’ 혹은 ‘취향이 일치되어 가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완벽하게 똑같은 하나의 취향을 가지게 되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공유’의 의미가 위에 언급된 내용으로 해석된다면 필자는 취향의 공유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할 것이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경험과 생활방식, 배경지식 등을 가진다. 이러한 요소들은 그 사람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이는 하나의 개성이 된다. 이렇게 고유한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완벽하게 똑같은 취향을 가지게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두 명 이상의 사람이 100% 일치하는 취향을 가지고 있다면 분명 그들 중 한 명은 자신의 취향을 잠시 묻어둔 채 타인의 취향에 자신을 맞추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취향은 타인과 나눌 수 없는 것일까? 이 질문에 있어 필자는 “NO”라고 대답할 것이다. 완벽하게 일치하는(공유되는) 취향은 없지만 어느 정도 공감하고 교감하게 되는 취향의 영역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취향의 공감 그리고 교감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필자는 두 명 이상의 사람이 서로의 취향을 나누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소통과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타인의 취향> 속 주인공 카스텔라의 부인 앙젤리끄는 타인의 취향을 인정하지 않고 수용하지 못하는 인테리어 디자이너이다. 이 때문에 이혼한 카스텔라의 여동생 베아트리스의 집 인테리어를 도우며 사사건건 베아트리스와 갈등을 겪는다. 그러던 중 앙젤리끄가 자신의 그림을 치워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 카스텔라가 앙젤리끄에게 집에 자신의 취향인 물건이 없다며 화를 내고 집을 나가버린다. 이 지점에서 일방적이기는 하지만 취향에 대한 소통이 이루어진다. 이 소통으로 인해 앙젤리끄는 자신이 주변 사람들에게 취향을 강요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후 베아트리스의 집에 찾아간 앙젤리끄는 그간 자신이 무시하고 얕잡아봤던 베아트리스의 취향으로 꾸며진 집을 보며 “이것도 좋네요”라는 말을 건넨다. 앙젤리끄는 소통-이해-공감 또는 교감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베아트리스의 취향을 나누며 공감하고 교감하게 되었다. 또한 영화 속에서 주인공 카스텔라는 조카가 출연하는 연극의 주인공이자 자신의 영어 선생님인 클라라에게 좋아하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는 그녀의 취향을 공감하고 그녀와 교감하며 취향을 나누기 위해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연극과 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취향이었던 콧수염을 밀어버리는 등의 행동을 한다. 주인공 카스텔라는 감정이라는 요소가 원인이 되어 자신의 취향을 변화시키고 클라라의 취향을 수용하여 그녀와 취향을 교감하고 함께 나눈다. 영화 속에서 반대의 경우도 찾아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카스텔라가 자신의 부인인 앙젤리끄에게 집에 자신의 취향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화내는 장면이 그 예이다. 부인 앙젤리끄를 좋아할 때는 공감하고 교감하던 그녀의 취향이 클라라를 좋아하기 시작하면서 공감하지 못하는 취향으로 변하게 된다. 이렇게 앙젤리끄에 대한 감정 변화에 따라 그녀와 함께 나누던 취향도 변화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례들을 보면 소통과 이해, 그리고 감정은 취향을 나누는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영화 속 사례가 아니더라도 좋아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는 연인과 취향을 나누다가 좋아하는 감정이 사그라들면서 연인의 취향을 점점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다른 취향을 수용하지 못해 헤어지는 결과를 또 하나의 예로 들 수 있다.
때문에 필자는 취향이란 소통과 감정에 의해 타인의 취향을 이해, 수용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해 어떠한 변화를 가져온다고 생각한다. 이 과정의 결과(변화)가 취향의 공감, 교감인 것이다. 근본적으로 취향이 변화하고 일치하게 되는 취향의 공유는 불가하지만, 개인의 취향을 유지하면서 타인의 취향을 존중하고 함께 나누는 것이 현시대에 사람들이 추구해야 하는 방향이 아닐까 싶다.
2. 취미(취향)는 향상될 수 있는가?
한 사람이 일생 동안 접하는 정보의 양은 얼마나 될까? 향유하게 되는 예술작품의 수는? 습득하게 되는 지식의 양과 깊이는? 물론 국가마다 지역마다 개인마다 편차는 다를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예술, 지식, 정보의 양은 상상 이상으로 방대하고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그 모든 것들을 마주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극히 일부만 마주하고 습득하고 향유하며 살아간다.
필자는 이러한 개념과 연관하여 취향의 향상을 바라보고자 했다. 취향이라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많은 사람들은 도덕적 관점을 제외한 옳고 그름, 호 불호, 실력과 수준의 높낮이 등의 가치판단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필자 또한 이 의견에 동의하는 바다. 때문에 필자는 취향의 향상에 대해 견문의 개념을 가지고 와서 이야기하려 한다. 사람은 견문, 즉 보고 들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국한되어 무언가를 향유할 수 있다. 취향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는 식견이 넓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이해하고 아는 만큼 즐긴다는 말이 있다. 취향 또한 아는 만큼 선택하고 향유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질 것이다. 아는 것이 많아짐으로써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그 속에서 자신에게 더욱 필요한 것, 잘 맞는 최적의 것을 선택하게 된다. 필자는 이를 타인이 봤을 때 취향이 향상되었다고 받아들이는 것이라 생각한다. 반대로 빠르게 돌아가는 현대사회에는 계속해서 새로운 지식과 정보, 예술 등 어떠한 결과물들이 창출되는데, 이 새로운 생산물들을 이해하고 향유하지 못하고 자신의 취향에 반영하지 못한다면 타인은 이를 취향이 후퇴했다고 볼 것이다. 영화 <타인의 취향>에도 이러한 내용이 잘 녹아있다.
영화 속 주인공 카스텔라는 문화에 있어 아는 것 없는 문화 문외한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카스텔라를 보며 수준이 낮다고 평가한다.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소위 지식인, 예술인, 문화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높은 수준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된다. 이들은 그저 문화와 예술에 대한 시야가 좁을 뿐인 카스텔라를 조롱하고 우롱한다.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카스텔라는 좋아하는 클라라와 교감하고 취향을 나누기 위해 예술인들과 어울리고 연극을 감상하고 전시를 감상하며 예술에 대한 자신의 식견을 넓혀간다. 이렇게 넓힌 식견은 클라라에 대한 마음을 접고 난 이후에도 그대로 카스텔라에게 남아 그림을 이해하고 향유하고 이용(본인 소유의 공장을 꾸미는데 그림을 사용) 하기까지 한다. 어떠한 사람들은 이렇게 변한 카스텔라를 보며 예술을 보는 눈과 수준이 높아졌고, 그로 인해 그의 취향 또한 향상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필자는 그저 문화 문외한이었던 카스텔라의 견문이 넓어져 그가 이해하고 향유하는 범위가 넓어졌을 뿐, 이것으로 그의 수준을 재단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취향은 향상되거나 후퇴될 수 있냐는 물음에 반대의 의견을 던지는 바이다. 취향이 변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취향의 수준을 평가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향상과 후퇴의 평가가 유의미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필자를 이렇게 생각한다. 취향이란 보고 듣고 습득한 것 즉, 견문의 좁고 넓음의 변화만 있을 뿐 향상과 후퇴가 존재할 수 없다고.
3. 취미(취향)는 무의미하면서 유의미하다.
필자는 취향이라는 것이 무의미하면서도 굉장히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무의미와 유의미, 이 두 가지는 공존할 수 있는 것일까? 두 개념이 공존할 수 있다면 취향은 어떤 부분에서 무의미하며 어떤 부분에서 유의미한 것일까?
취향이라는 것은 사회문화적인 큰 맥락에서 보면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 있다 생각한다. 굉장히 조심스러운 발언이지만, 사회문화적인 맥락에서 취향을 비교하거나 우열을 가리거나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의미가 없는 행동이다. 과연 그 누가 타인의 취향에, 개인의 취향에 어떠한 잣대를 들이밀며 취향을 판단하고 재단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취향에 우열을 가려 타인을 무시하거나 취향을 주류와 비주류로 분류하여 비주류로 분류된 취향과 취미를 가진 사람들을 사회에서 배제하거나 심하게는 사회에서 매장시키는 일을 해왔다. 이제는 이러한 일을 그만두고 그동안의 이러한 행동들을 반성해야 한다. 의미가 없는 분류와 평가에 옳지 않은 의미를 부여하는 일을 끝맺고 다름과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영화 <타인의 취향>에서도 개인의 취향에 우열을 가려 타인의 취향을 무시하고 그를 수용하지 않으려 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주인공 카스텔라의 아내 앙젤리끄이다. 남편인 카스텔라의 식성과 취향을 존중하지 않으며 케이크, 초콜릿, 술의 섭취를 금지시킨다. 또한 자신이 인테리어 디자이너라는 이유로 카스텔라의 동생 베아트리스의 집을 자신의 마음대로 바꾸려 한다. 베아트리스의 취향은 열등하고 하등 한 것으로 보고 이를 수용하지 않고 자신의 것을 강요한다. 하지만 결국 이 인물은 자신의 강요로 지친 베아트리스, 카스텔라와 갈등을 겪고 그들과의 관계를 망치고 만다. 이렇게 이 영화에서도 개인의 취향에 사회적인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는 행동을 경계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취향에 사회문화적인 가치판단을 하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회 속에서 취향이라는 것을 완전히 배제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당연히 아니다. 필자는 취향이라는 것이 개인에게 있어서는 그 어떠한 것보다 유의미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취향은 개인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소소하게는 당장 먹을 점심 메뉴를 고르는 것에서부터 크게는 앞으로의 인생의 방향을 선택하는 데까지 취향이 굉장히 크게 연관되어 있다. 또한 개인 대 개인으로 사람을 대하는 태도나 사람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도 모두 취향이 반영된다. 때문에 필자는 취향이라는 것이 개인에게 있어서 굉장히 유의미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유의미한 요소에 대해 깊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사회문화적으로 취향에 대한 어떠한 평가나 분류는 무의미하지만 개인의 취향은 그 무엇보다도 유의미하기 때문에 우리는 개인의 취향을 존중해야 한다. 또한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영화 <타인의 취향>에서는 자신과 타인의 취향이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또한 사람은 취향으로 인해 변화하거나 사람이 변함으로 인해 취향 또한 변화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남녀 간의 사랑을 통해서 무겁지 않게 그러나 너무 가볍지 않게 잘 전달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통해 취향이라는 것에 대해 깊은 고찰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 영화를 통해 취향이라는 것은 무의미하면서도 유의미한 것이라는 개인적인 결론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