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상훈 Jan 26. 2024

어른

1년에 책 한 권 읽기 힘든 요즘 중년이다. 언제 이렇게 머리칼이 희끗한 중년이 되었을까 싶다. 중년이면 지혜도 충만하고 주변을 헤아려야 하는데 무엇 하나 나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 확실하게도 은퇴의 시간은 눈앞에 다가와 있는데 앞으로의 호구지책도 뚜렷한 대응방안도 아무 생각이 없다. 그저 마음은 어린 어느 시절에 머물러 있다. 연습된 것이 많지 않은 아주 소심한 어른이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지 않아도 사람으로서 사회에 선한 영향력은 못되더라도 많은 이들이 지향하는 사회가 이루어지도록 함께 해야 하는데 말이다.     

우리는 하버드 대학을 확실하게는 몰라도 그 대학이 얼마나 영향력이 있고 그곳에 근무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영예인지 각종 매체를 통해 주입된 지식을 가지고 있다. 당연히 그곳에 근무하는 이들도 나 어디 대학 교수요 하면 방송국이고 기업체이고 정치집단이고 간에 받들어 모시는 풍조 역시 있다. 그러한 가운데 그 대학의 교수직함을 가진 이가 시골 마을의 어느 동네에 머물면서 처음으로 사회적 직함을 불가피하게 떼어놓고(어차피 시골 노인들은 알지 못함으로) 그냥 지구에 사는 같은 인간으로서의 대접을 받으면서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자기를 진정하게 돌아봤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보통은 어느 외국의 유명 대학교 교수라고 하면 모든 게 생략되고 물어보지도 않는데 어느 시골 마을에선 예외가 된 것이다. 동네 어르신은 밥벌이는 무엇으로 하느냐 , 아이들은 몇이나 두었느냐, 그런 공부는 어디에 쓰는 것이냐 하면서 보통의 이웃집 자식에게 하는 질문을 했단다. 보통 지식사회에서 자신에게 질문하는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처음에는 자기를 하버드대 거대조직과  동등하게 대접해 주지 않고 그냥 그 노인들이 사는 사회의 일원처럼 취급하는 것이 처음에는 마땅하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로 인해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이 정말 인간으로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일깨웠다는 내용이다.     

민법에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이를 보호할 이들을 지정하고 있는데 보통 검사, 지방자치단체장 등이 많이 등장한다.

이들이 사회 지도층으로 이름 값을 하며 사회적 책무를 다할 것으로 판단한 듯 한데 실제와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한편으론 이들 직업을 갖은 이들만 이성적이고 바른 판단을 할 것이며, 사회적 통합잘 수행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심각한 편견이다.

정말 우리가 근대화 과정을 겪을 때조차 그 기대는  맞지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사회적으로는 그렇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교육되어지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버드대학 인지도 보다도 더 말이다. 아쉬운 것은 어디에나 아무렇지 않게 등장하는 해당 직업군을 마땅히 제재할 수단도 없다. 합리적인 이성을 소유했다는 증거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데 말이다.

요즘 들어서는 이들이 과욕을 부리고 오만방자한 행태로 사회적 물의를 빚을 때도 많다. 그럼에도 법적 제재는 일반인보다도 못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도 있는데 오히려 이들 직업군들은 법이 정한 기대와는 다르게 음침한 곳에서 사회적 일탈행위를 하고 초법적 일들을 꾸미기도 한다.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해 소요된 비용을 사회에서 받아 내기라도 하려는 듯 누구나 여건만 되면 일탈행위를 벌이려 한다.

이들도 그저 하나의 직업군일 뿐이다. 직업군이 미술계나 음악계 혹은 산업계 보다 더 합리적이고 균형적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직업군 별 선한 영향력이 어느 곳이 더 합리성을 갖고 있느냐를 비교하려고 쓴 것은 물론 아니다.     

나는 가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회 지도층을 표현하면 갖다는 붙이는 말 “ 방귀 꽤나 뀐다는 집안” 이런 표현에 괜히 관심이 간다.

목구멍에 기름칠하다는 표현도 경제적으로 먹고살만한 여유가 있는 집안을 표현하는 것들이다.

직업과 경제적인 것들이 인간을 잘 대변해 주지는 못한다. 작금에 와서 더 그렇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덕망이 있는 사람이 인격적으로도 훌륭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산다. 그런데 요즘 보면 참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어렵다. 특히 국회의원이나 검사들을 보면 참 우리가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들여 키워낸 인재들이 오히려 더 한심한 짓거리를 하는구나 처참한 생각마저 든다.     


할머님에 비유할 수가 없다.

작가의 이전글 강바람에 실려오는 눈발에 대한 기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