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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훈 Feb 06. 2024

엄마야! 누나야!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그~음 모래 빛

...

청량한 목소리에서 슬픔이 느껴진다.

이 시를 지은 김소월의 마음도 그 고향과 누이를 그리는 마음이었을까!!

초등학교 3학년 시절이다. 어느 날이던가! 뜬금없이 노래를 부르지는 않았을 터인데, 키가 작은 한 아이가 교탁에 올라 이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의 감정이 지금도 생생하게 전해지는 듯한데 그때 정말 아이의 마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뻐근하다고나 할까 알싸하다고나 할까 그런 묘한 아픔이 명치에서부터 올라왔다. 슬픔이 얼굴을 감싼 그런 기분, 세상에 저런 슬픈 노래도 있구나 그런 생각을 그때 한 것 같다.

내가 지금까지 동요를 들으며 이렇게 명치가 아련한 아픔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저 아이는 이 노래를 어디서 배웠을까? 우리 음악 책에는 나오지 않는 곡인데...

담임선생님이 그 친구의 노래가 끝나자 학급 대표로 장기자랑에 내 보내야겠네. 노래를 참 잘하네 하신다.

남자아이가 불렀지만 참 곱고 청량해 정말 그 슬픔을 무엇으로 표현할 길이 없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는 왼쪽 가슴에 손수건과 이름표를 옷핀으로 붙이는 게 일반적이었다. 요즘에야 손수건을 휴대할 정도로 코를 흘리는 아이들이 없지만 예전에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비염을 앓았는지 손수건은 정답이었다. 거기에 코를 풀기도 하고 해서 깨끗할 날이 별로 없던 시절이다. 남녀를 구분하고 모두들 누런 콧물을 달고 살았다. 다시 생각해 보니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때에도 이 문제는 여전해서 선생님이 너희들은 왜 입을 그렇게 벌리고 있느냐 지적할 정도였다. 아마도 코가 막혀 있으니 숨을 입으로 쉬는 아이들이 많았던 탓이다. 당시에 비염도 그렇고 중이염도 그렇고 질병이 왜 그리 많았는지 모른다. 머리나 엉덩이에 종기가 많이 나는 통에 동네 약국에는 이명래 고약이 항상 비치되어 있었다. 그때 초등학교를 바로 졸업한 누이는 비라도 오는 날이면 다리가 불편한 나를 학교 교실에 까지 업어서 등교를 시켰다.  비가 억수 같이 오는 날이면 굳이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었을 터인데 그 덕분에 초등학교 6년 등 중고등학교까지 12년간을 개근했다. 다 누이의 덕이었지 싶다. 비가 오는 날엔 책가방 보다 보자기에 책을 싸서 어깨에 둘러메고 갔던 기억도 있다. 비가 오면 책가방은 물론 책까지 다 물에 젖기에 말이다.


그때 느꼈던 슬픔도 다 그 이유였을까! 

당시 시골 교회에서는 자주 부흥회를 했다. 동네의 많은 이가 교회를 다녔고 누이를 비롯해 20대 안팎의 젊은 동네 누이들이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 반사일을 했다. 새벽 교회 종소리가 울리면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았던 시골에서 아주머니들이 커다란 플래시를 켜고 밤새 술꾼들로 북적였던 점방을 지나 이슬을 촉촉이 머금은 신작로를 따라 교회로 발걸음을 옮겼었다. 당시 교회 문을 열면 양 옆으로 신발장이 있고 마룻바닥은 기름칠이 잘되어 있었다는 기억이다. 교회전도사의 우렁찬 통성기도와 함께 모두들 방석 위에 양반자세나 무릎을 꿇고 예배를 보았는데 무슨 기도시간인가에는 무릎을 마루에 직찧으며 울부짖기도 했다. 나도 누나의 손을 잡고 가끔 새벽 기도회에 간 횟수가 적지 않다.     

한편,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월사금이라고 불린 육성회비를 매달 꼬박꼬박 부모님으로부터 받아 가져다 내야 했다. 그러면 노란색 봉투에 다달이 담임선생님의 도장이 찍히게 된다.

그 당시 시골에서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월사금 독촉을 받다가 학교를 그만둔 친구들이 반에 한둘은 있었다. 선생이라는 직업도 못할 짓이어서 아마 중학교 때에도 수업료 납입을 독촉할 때의 느낌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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