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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훈 Apr 02. 2024

20대의 어느 한 구석

2층임에도 실내에선 쾌쾌한 곰팡이 냄새가 났다. 오프집 주방안쪽의 환풍기가 고장 나 있었는지 쾌쾌한 청소도구로 바닥을 닦았는지 그 집은 늘 그랬다. 그럼에도 우린 매일 그 호프집을 들락거렸다. 20대를 넘긴 시점이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열심히 술을 마시고 술을 다 마시면 아래층으로 이동해 노래방에 들러 노래도 한 자락씩 했다. 호프집을 간 친구들은 늘 일정했으나 간혹 다른 이도 끼어들기도 했다. 노래방은 결혼을 하지 않은 이들만 있을 때 가는 것이 룰 아닌 룰이다.

     

미자 언니가 운영하는 그 술집엔 동네의 늙수그레한 양반들이 자주 들락거렸고 주인인 미자언니는 그 양반들을 다룬다는 느낌이 들었다. 묘한 장삿속 같기도 했다.

그 술집은 1층에서 계단으로 올라 우측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서면 플로어 위에 둥근 테이블이 서너 개가 있다. 그리고 창문과 안쪽 벽으로 각각 2개와 3개의 사각테이블이 있고 안쪽 벽에 붙어 있는 테이블은 바닥과 단차가 좀 있었다. 우리는 그 사각테이블에 주로 앉았는데 외부의 시선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안주는 보통 골뱅이 소면이나 치킨을 시켰는데 다음 순번으로는 땅콩과 노가리였다. 보통 그렇게 마시면 대략 2천 씨씨를 마신 정도가 되었는데 그즈음에 자리에 일어서려고 하면 주인장인 미자언니가 새로운 마른안주를 한 접시 내놓는다. 그러면 다시 술자리가 시작되고 1천 씨씨 가량을 추가로 마셨다.

손님이 없는 날은 미자 언니까지 합세해 인생사를 논하기도 했는데 참 생활력이 보였던 같다.    


 

90년 대 반 30대였던 나는 불투명한 미래에 대해 많이 우울해했다. 급여도 만족스럽지 못했고, 회사는 항상 내분에 휩싸여 갈등이 최고조를 향했다가 내려앉았다를 반복했다. 구사대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업무에 대한 간섭과 조합탈퇴에 대한 압력이 구체화됐다. 조합간부와 사측 임원 간의 술자리도 잦았고 설득이 따르지 않으면 낮이라도 먼 곳으로 이동해 서로의 양보를 구하기에 바빴다.

아침에는 매일 매일 회사 앞 대로변에 모여 구호를 외치고 하루를 시작했고 조합원들은 매일매일 돌아가며 투쟁사를 낭독하고 투쟁심을 끌어올렸다. 20대 초반의 어린 여직원들도 머리에 띠를 두르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저녁이면 휴일이나 낮동안 준비한 대자보를 썼다. 대자보의 내용은 사측의 변화에 따라 시시각각 다른 내용으로 변하기도 했다. 요즘같이 인쇄출력물이 아니고 일일이 매직으로 써 내려가야 했다. 그런 다음 타이핑한 A4용지로 같은 내용을 복사해 일반직원들과 회사의 위험 상황을 공유했다.

대자보가 붙은 날은 대표회장실에 부서장이 불려 가고 한 바탕의 회오리바람이 일었다. 일반 조합원들은 부서장에게 불려가. 시달림을 당했고, 간부급 조합원들은 사측과 얼굴을 붉히며 고성을 나누었다. 당연히 사용자 측의 관대함은 찾기 어려웠다. 그들도 자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은 싸움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에 말이다. 매일 노여움과 협박으로 점철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화기 울림도 쉼이 없었다. 조합 간부들은 서로 서로가 신체적 위협으로부터 안전한가를 퇴근이후에도 매일매일 확인해 주어야 했다. 정말 인간으로서의 한계점에 달한 듯 했다. 정신적인 붕괴상태라고나 할까  겁도 나고 신분의 위협에 대한 불안감으로 소화불량이 왔다. 소소한 것을 빌미로 직원들끼리의 육체적 충돌도 자주 발생했다.


 무너진 자존감과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겹쳐 몸은 천근만근인 듯했다. 술을 못마시는 편이었지만 그런 날은 서로를 다독이며 연탄불에 양념한 돼지고기 등 다양한 구울 거리를 올려 소주잔을 나누었다.

방안에 누워 발가락이 몇 개인지 센다는 조합원들의 이야기가 들리기도 한 때가 이때였다. 내가 그만두면 누가 먹여 살릴 것인가는 정말 미래가 불안한 30대 가장의 답답함의 표시였다. 그러함에도 대자보 내용을 어떻게 할 것인지, 분열된 회사의 수습방향은 어떻게 할 것인지 대표자를 다시 들여야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멈추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조합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던 때였고 그와 더불어 임금체불이 참 많았다. 같은 성당에 다녔던 어떤 분은 단체행동 중에 주변 동기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일정분의 보조금을 받고 회사를 그만두고 경기도 마석에 가서 친척이 하는 가구공장에서 일하겠노라 말하기도 했다. 같은 성당의 또 다른 한분도 여의도 직장을 때려치우고 정육점 사업에 나섰다.      

시원한 생맥주를 하는 날은 그나마 좀 마음이 편한 금요일 저녁이다. 그런데 오히려 이런 날에 더 많은 양의 술을 마신 듯했다. 그때는 토요일도 출근을 했었는데 과하게 취하여 숙취가 여전한 그날 오후 퇴근길에서는 전철역 휴지통에 토사물을 게워 놓기도 했다.     

나의 경우에는 결혼도 안 한 상태여서 거의 삶을 포기했다고나 할까 특별히 관심을 둘만한 곳을 가지지 못했다. 술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는 아니었지만 퇴근하고 특별히 할 것도 마땅치 않고 술에서 깨어나면 불안에 시달리던 그런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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