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변덕쟁이, 몸은...
변덕쟁이.
버스에서 내렸을 땐 비가 제법 세차게 내렸는데 병원 도착하는 몇 분 사이에 비가 멎었다. 그리고는 태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평화롭게 천천히 등장하는 해는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등장해 세상에 햇빛을 날카로운 삼지창처럼 내리꽂았다. 뜨거웠다. 나는 물도 마실 겸 땀도 식힐 겸 병원에 들어가지 않고 병원 앞 정자에 앉았다. 날카로운 햇빛이 뜨거워, 아직 빗방울이 맺혀 있는 양산을 펴고 무릎 가리개로 썼다. 무릎도 가리고 양산도 말리고, 일석이조니까. 그렇게 나의 행동에 감탄하다가 병원에 들어가니, 들어가자마자 비가 쏟아졌다. 변덕쟁이다.
날씨만 변덕쟁이라고 할 수 없다.
‘최강야구’ 프로그램을 재밌게 본다. 야구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는데도 이 프로그램을 보며 점점 야구의 매력에 빠진다. 고등학생, 대학생 선수들보다 이들이 승리하기를 응원한다. 마흔이 넘고도 야구가 하고 싶어 계속하는 몬스터즈 선수들은 나에게 “너도 하고 싶은 걸 찾아서 해. 그건 나이랑 상관없이 계속할 수 있고, 계속 즐거워.”라고 말하는 듯하다. 나의 사십 대도 그리고 그 뒤에도 즐거움을 느끼며 무언가를 하고 싶다. 재미를 느끼며 사는 것, 그것이 지금 나의 목표다. 안타도 나오지 않는 적막한 상황 속에서, 기다리다 보면 하나는 터진다며 계속 방망이를 휘두르는 것도 멋있다. 나의 인생도 기다리다 보면 안타가 터지지 않겠나. 투수들도 멋있다. 상대에게 볼넷을 주면 투수의 마음이 흔들린다. 그런 마음을 잘 잡아 다음에 스트라이크를 던지는 투수를 볼 때면, 박수를 보내게 된다. 흔들리는 마음을 잡는다는 게 말이 쉽지, 제대로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을 아주 짧은 시간에 해내다니! 박수를 칠 수밖에 없다. 난 손에 힘이 들어가면 손을 떤다. ‘힘 빼자, 힘 빼자’ 속으로 외친다. 그러면 어느 날은 몸이 그 말을 들어주기도 하고, 어느 날은 무시하고 계속 떤다. 똑같이 힘을 뺀다고 동작을 취했는데 말이다. 힘주는 게 어려운 줄 알았는데 힘 빼는 게 더 어렵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니 순식간에 힘을 빼고 공을 던지는 투수들이 대단하게 보인다. 나도 투수들처럼 열심히 ‘힘 빼자’를 외치면 어느 날 몸이 말을 들어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게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버스를 타고선 마음에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이렇게 생각했다’는 말의 의미는 한 문장으로 말할 수 있다. ‘나의 인생도 기다리다 보면 안타가 터지지 않겠나.’ 미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기다리는 것이 힘들 뿐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려 했는데... 버스 탄 게 시작이었을까, 전날부터 무기력했던 마음이 지금까지 이어진 걸까. 버스를 탔는데 타자마자 버스가 출발해, 한 손으로는 버스 기둥을 잡고 다른 손은 이유 없이 긴장해 흔들리기 시작했다. 다리도 무거워지면서 질질 끌었다. 버스가 출발한 상태라 천천히 뒤로 이동하려고 잠시 노약자석 앞 손잡이에 매달려 있으니, 어르신께서 빈자리를 가리키며 저기 앉으라고 말씀하셨다. 감사하다. 내 몸이 불편하니 어서 앉으라는 말이니까. 그러나 그와 동시에 속상했다. 난 언제까지 아픈 사람이란 게 사람들 눈에 보일까. 수술한 지 1년이다. 수술 전에도 마비가 심했으니, 사람들의 눈빛을 본 건 1년이 넘었다. 익숙해질 만도 한데 익숙해지지 않는다. 괜히 부끄럽고 민망했던 지난날들이었는데, 오늘은 속상했다.
사람은 변한다. 그런데 그게 꼭 좋지 않은 일일까? 시간이 흘러도 늘 같은 모습인 게 반드시 좋은가? 그렇지 않다. 좋게 달라지면 변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 그런 변화는 ‘발전’이라 하고 더 못해지면 ‘퇴행’이라 한다. 발전인지 퇴행인지 판별하는 객관적 기준이 있는가? 없다. 한 사람의 변화를 두고 발전인지 퇴행인지 다투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유시민,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사람은 변한다. 힘 빼자, 되뇌며 힘을 빼고 스트라이크를 던지는 투수는 재빨리도 변한다. 나도 변하고 싶다. 버스 탈 때 넘어질 걱정 없이, 긴장 안 하고 승차하고 싶다. 이렇게 마음만 변덕쟁이가 되고 몸은 변하지 않는 내가, 오늘은 속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