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 있던 것이 사라지는 시간에

파나마 스페셜 게이샤 까르나발

by 만델링

식품은 시간이 경과할수록 맛과 향이 변하고 섭취할 수 없을 정도로 상하기도 한다. 원두도 그렇다. 향미가 변하는 산패가 진행된다. 산패를 늦추기 위해서는 볶은 후 일주일 미만의 원두를 구해하면 좋다. 구매 후 2주 내에 소비하면 알맞다. 커피를 내리다 원두 봉지에 찍힌 로스팅 날짜를 봤다. 오늘이 5일째 되는 날이다. 향미가 상승해 봉지 밖으로 나온다. 피를 내리기 위해 준비물을 챙긴다. 황동으로 된 드립포터, 열경화성 유리 서버, 구멍 3개 도자기 드리퍼, 종이 필터다. 개인적으로 종이 필터를 선호한다. 커피 기름을 걸러줘 맛이 깔끔하고 한 번 쓰고 버리면 되는 편리성 때문이다. 반면에 융드립 같은 진하고 부드러운 풍미는 덜하다. 래도 핸드드립으로 맛있게 추출할 수 있다. 나선형으로 물을 따른다. 추출 중 드립포트의 물을 끊지 않는다. 좀 더 부드러운 느낌의 커피가 된다. 디오 틀어놓고 커피를 마시면 친구랑 같이 마시는 기분이 된다. 식탁에 오도카니 앉았어도 이야기하는 마음이다. 터놓고 말할 곳이 필요한 내게 내 말을 듣고 공감하는 대상이 된다. 그늘진 마음에 봄이 오는 느낌이다. 시끄럽고 들끓는 마음도 어느새 차분해진다. 푸르던 것들이 서서히 스러져가는 풍경을 보며 산책 기분이 된다. 촘촘히 싹을 틔우는 것들을 보는가 했는데 벌써 저무는 것들을 보는 시간이 되었다. 수수하고 소박한 시간에 들었다. 마냥 푸를 것 같던 녹색 이파리가 수굿해졌다. 선명하고 도도한 꽃들 대신 청초하고 여릿한 꽃들이 무리 지어 피었다. 짧게 피고 금방 질 것을 알기에 자주 봐야지 하는 마음이다.


소심함과 강박증, 선택 결정장애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독서를 한다. 독서를 하면 뇌의 여러 부분이 발달해 더 효율적인 경로로 정보를 처리한다. 기억력, 사고력 등 좌뇌의 전두엽 부위들이 빠른 속도로 상호작용하여 뇌의 여러 부분이 같이 진화한다는 연구가 있다. 이런 전문적이고 종합적인 좋은 점을 빼더라도 내게 독서는 머리를 비우는 시간이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다. 명조체, 줄 간격, 글씨 크기, 띄어쓰기, 오타, 지갑 속에 차례대로 정리된 돈, 머리카락 떨어진 바닥, 식탁 의자 밀어 넣기, 변기에 묻은 물 등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특히 소설을 읽을 때는 몰입하여 일상을 깡그리 잊을 수 있다. 책 속의 주인공이 된다. 의점 알바생이었다가 꽃집 주인이 되기도 한다. 읽다가 지치면 그냥 엄마가 된다. 그때 내 글을 쓴다. 써도 늘지 않는 글을 쓰고 고치기를 반복한다.


오늘의 커피는 파나마 게이샤 까르나발. 20g을 받았다. 전자저울로 재서 받으니 콩알을 헤아릴 만큼 적다. 한 번에 마시자니 아깝고 두 번에 나누어 내리자니 연하디 연할 것 같다. 5g만 더 있으면 두 번 마실 텐데 생각하니 감질만 난다. 파나마 게이샤는 재스민향이 강하다. 어릴 적 엄마의 동동구루모통에서 나던 매끈하며 알그리한 향이다. 몰래 열어서 톡톡 거리다 큰 숨에 가루가 훅 날려서 반이나 없어진 분. 엄마에게는 참 귀한 것이었던 그 추억의 향이다. 가볍고 산뜻하고 투명한 맛이다. 잔꽃이 가득하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아가씨가 수줍어하는 풍경이 그려지는 커피다. 나는 향이 풍부하고 뚜렷한 윤곽과 주장을 가진 커피를 좋아한다. 그래서 파마나 게이샤는 연약하고 비싸기만 한 커피라는 생각이 든다. 취향이 고급지지 않은 탓인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좀처럼 누려보지 못한 여유, 편안함, 위안이 되는 평화로움의 커피다. 걱정의 무게, 근심의 무게가 사라져 가볍고 나붓한 커피다. 몇 달만에 보는 그리운 얼굴과 다정한 말들에 기대어 날 세우지 않고 살아도 된다는 메세지가 들리는 커피다. 모두의 마음이 안녕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