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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Aug 07. 2023

<단순한 열정> 누군가에게 미쳐 살아보는 강렬한 경험

자기고백과 사랑의 적나라한 진술, 아니 에르노 <단순한 열정> 독서노트

노벨문학상 수상자 아니 에르노의 자기고백적 작품 '단순한 열정'을 읽었다.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누군가 놀라울 정도로 솔직한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 사람들은 도덕적 판단은 잠시 내려놓고 짐짓 경건한 마음으로 경청하기 시작한다. 그렇게까지 솔직해질 수 있는 그 사람의 '내려놓음'에 흥미를 넘어 묘한 고마움마저 느끼게 된다. 자기고백을 하는 이는 흡사 옷을 벗어던진 사람이고, 무장 해제한 사람에게 비판의 총구를 들이대는 이는 잘 없다. 일단 들어나 보는 거다.


솔직히 나도 사람인지라 '불륜에 이렇게나 무감각하다고?', '그 남자는 이 사람을 이용만 하는 것 같은데...' 같은 참견이 불쑥불쑥 들었다. 하지만 그런 현실적인 관점으로 읽어버리면 이 책에 대한 감상이 납작해질 것 같았다. 시시비비 가리기는 잠시 접어두고 작가의 경험에 잠자코 몰입하니 추상적인 감정과 생각을 명확하게 캐치해내고 그걸 글로써 있는 그대로 옮기는 작가의 기량이 더 잘 보였다. (프랑스 사람이 쓴 글을 볼 때마다 느낀다. 프랑스는 분명 N의 나라일 거라고... 정말 추상적 관념적 사변적인데 그래서 재미있다.) 당혹스러울 만큼 솔직한 자기고백이 계속되는데, 읽는 사람은 어느새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보게 된다.


한편으로 이성이 마비될 정도로 한 사람에게 푹 빠져 있을 때의 붕 떠 있는 일상 묘사도 공감을 자아냈다. 모든 시간이 그 사람 위주로 돌아가고, 그 사람이 없을 때에도 혹시 몰라 항상 마주칠 준비를 하고, 현실적인 일에는 마음이 붕 떠 집중하지 못하고, 아침부터 밤까지 몽상 속에 살고, 그 사람이 하는 말에서 사랑의 단서로 들리는 것들은 어떻게든 기억해두려 하고, 혼자 떠난 여행지에서도 같이 걷는 상상을 하고, 그 사람이 혹시라도 할 질문에 미리 멋진 대답을 준비해두고, 그 사람이 별 생각 없이 두고 간 흔적은 어떻게든 보존해둔다. 역시 어떤 현실은 소설보다 더 소설 같다.


작가는 책에서 내내, 이 모든 것을(막연한 기다림에서부터 애정, 집착이나 일차원적 욕구까지) '열정'이라고 부른다. 참 모호한 표현인데, 어떻게 보면 그보다 더 잘 어울리는 말은 없을 것 같다. 글 속 시점에서 중년이었던 작가의 나이를 생각해보면 그런 에너지가 신기하다고 해야 할까, 대단하게 느껴진다.


비단 사랑만이 아니라 한동안 어떤 열정에 빠져 지내면 시간은 기묘하게 빨리 흘러서, 나중에 보면 그 기간은 마치 통째로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그런 열정을 마지막으로 느껴본 게 언제였던가? 언제부턴가 '무언가에 미쳐서 앞뒤 안 가리는' 건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다. 좀 미쳐보려 하면 이성이 앞선다. 요즘은 시간이 너무 정직하게 흘러 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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