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주름살이 가득할 나의 아저씨에게
줄지어 늘어선 논 위로 황금빛 벼가 무거운 고개를 떨구고, 그 위를 잠자리 떼가 미끄러지듯 지나갔다. 밤낮없이 경운기가 탈탈거렸고, 트랙터도 웅장함을 드러냈다. 논으로는 쌀, 밭으로는 잡곡들을 분주하게 거둬들이던 가을이었다.
이제는 할머니보다 한 뼘쯤 커버린 키, 투니버스 만화영화보다 드라마 '반올림'이 더 흥미롭던 때. 마침 그날은 놀토라 카세트에 테이프를 밀어 넣었다. 'Sweet Dream' 노래가 흘러나오자, 장나라의 표정을 떠올리며 얼굴을 움직였다. 노래에 맞춰 흔들던 몸은 논 가장자리에 박힌 허수아비 같았다.
"옥시기 다 쪄지거든 들고 논으로 오그라."
마룻바닥을 쿵쿵대는 나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집을 나섰다.
나도 카세트를 끄고 부엌으로 향했다. 찜통을 열자 노란 윤기가 흐르는 옥수수가 열댓 개, 포슬거리는 감자까지 한가득 쪄져 있었다. 이런 거 말고 그저 피자한판, 햄버거 한입이 먹고 싶었다. 비닐봉지를 꺼내려고 찬장을 열자 고구마, 옥수수, 감자가 한편을 가득 메울 정도로 쌓여있었다. 늘 똑같은 지겨운 삼총사였다.
"여기가 전광봉 할아버님 댁 맞습니까?"
찬장안쪽을 째려보고 있는데 밖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집에 찾아오는 사람은 아랫집 금옥이 이모뿐이었는데, 이번엔 처음 듣는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왠지 모를 긴장감에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정리하고, 마당 쪽으로 고개만 빼꼼 내밀었다. 초록색에 검은색 낙서가 뒤엉킨 옷을 입은 아저씨들이 우뚝 서있었다. 분명 '전광봉'은 우리 할아버지 이름인데… 할아버지를 잡아가려는 건가 싶어 발끝이 오싹해졌다.
“할아버지 논에 갔는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아저씨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논으로 가야겠습니다.” 그러더니 단호한 걸음걸이로 사라졌다.
나 때문에 할아버지가 위험해진 것 같아 심장이 쿵쿵거렸다. 비닐봉지에 담긴 옥수수와 감자도 팔에서 덜컹거렸다. 다급한 마음에 봉지만 움켜쥔 채 논길을 향해 내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경운기 너머로 할아버지의 모자가 보였다.
"할아버지!"
결국 비닐봉지에서 감자 한 알이 떨어져 도랑 속으로 쑥 빠졌다. 할아버지도 그렇게 사라져 버릴까 봐 등 뒤가 서늘해졌다. 이제 보니 아저씨들은 할머니 주위도 에워싸고 있었다.
"옥시기랑 감자 좀 쪘는데 잡숴요."
할머니가 내 얼굴은 보지도 않고 비닐봉지를 뺏어 아저씨들에게 건넸다. 나는 흠칫하며 할머니 팔을 꽉 붙잡았다. "감사합니다. 오늘 열심히 돕겠습니다." 아저씨들이 옥수수를 받아 들며 웃었다. 무서웠던 아저씨들이 웃는 걸 보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어안이 벙벙했다.
"저 양반들 추수해 주러 온겨." 할머니가 내 표정을 보더니 걱정 말라는 듯 말했다. 그제야 숨이 제대로 쉬어졌다. 헐레벌떡 뛰던 발끝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 사이 논에서는 본격적인 벼 수확이 한창이었다. 아저씨들은 다리를 걷어붙이고, 허리까지 올라온 벼를 호미로 우지끈 베어냈다. 할아버지는 선장처럼 이앙기를 몰았다. 나도 포대를 들고 뛰어다녔다. 그렇게 정신없던 와중에도 눈동자가 향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상상 속으로만 그리던 아빠를 닮은, 키가 큰 군인아저씨였다. 흙 묻은 어깨에 햇빛이 비칠 때마다 더욱 든든해 보였다. 쭈뼛거리며 아저씨 주위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 옆에서 볏단을 둥글게 쌓아 올려 나만의 집을 만들었다. 힐끔거리다 눈이 마주쳤을 때 "제가 만든 거예요." 하고 웅얼거렸다. 아저씨는 볏단을 만지작거리며 "잘 만들었다." 하고 미소 지었다. 그때부터 나는 아저씨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아저씨. 메뚜기 잡아주세요!"
“메뚜기 안 무서워?”
“괜찮아요. 한두 마리쯤은 잡을 수 있어요.”
나는 어깨를 쭉 펴고 말했다. 아저씨는 큭 하고 웃더니 풀밭 속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나도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아저씨 손바닥에서 초록빛 메뚜기가 바둥거렸고, 나는 얼른 페트병을 들고 와 건넸다. 페트병 속에 메뚜기가 부딪히면서 '툭툭'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더 잘 듣기 위해, 아저씨 옆구리를 슬며시 파고들었다.
"메뚜기 이름 뚜비 어때요?“
"뚜비 좋네. 가족도 만들어줄까?"
아저씨가 웃으며 다시 풀밭을 헤치고 들어갔다. 곧이어 페트병 속에 뚜비, 뚜비엄마, 뚜비아빠가 옹기종기 모였다. 가슴속이 뜨끈해졌다. 그 순간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나였다.
마지막 볏단을 트랙터에 싣고 모두 경운기에 올랐다. 아저씨와 나는 올챙이를 잡아야 해서 걸어서 논길을 내려가기로 했다. 하늘은 점점 붉게 물들고 있었고, 논두렁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저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아저씨. 우리 집으로 가는 거죠?”
“그러면 좋겠지만, 아저씨는 군대로 다시 가야 돼.”
“그럼 또 와요?”
“글쎄, 여기로 또 오게 될까 모르겠네…”
도랑길을 내딛던 두 발이 툭 멈췄다. 저녁 빛 들판 위로 울려 퍼지던 내 노랫소리도 끊겼다. 나와 눈높이를 맞춘 아저씨는 “공부 열심히 해.”라는 말을 남기고, 다른 아저씨들과 함께 멀어졌다. 나는 멀어지는 등을 붙잡듯 한참을 바라봤다.
그 후로 내 일과에는, 아저씨를 기다리는 일이 추가되었다.
혹시 오는 소리를 못 들을까 봐 카세트는 늘 작게 틀었다. 해가 질 때까지 마당에 쭈그리고 앉아있거나, 함께 걷던 논을 기웃거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날들이 이어졌고, 어쩔 수 없이 넓은 마당은 항상 나 혼자 채워야 했다.
바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느껴질 때쯤, 할머니가 장롱에서 겨울이불을 꺼냈다. 그리고 곧 주먹만 한 눈이 펑펑 쏟아졌다. 할아버지가 새벽 내내 아궁이에 불을 때느라 온 집안이 장작냄새로 진동을 했다. 나는 눈이 오는 날이면 아름이와 함께 비료포대를 챙겼다. 이제 내 발은 썰매를 탈 수 있는 뒷산으로 향했고, 아저씨는 기억 속에서 흐릿해져 갔다.
그렇게 썰매 타는 재미에 빠져 어김없이 비료포대를 챙기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앞으로! 앞으로!" 마당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구령소리와 삽소리에 헐레벌떡 마을회관으로 나섰다. 줄줄이 늘어선 군인아저씨들이 쌓인 눈을 퍼내 길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요동치는 심장으로 익숙한 얼굴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너도 눈 치울래?”
눈 쌓인 길을 가로막고 서있다 보니, 어떤 아저씨가 짜증스럽게 삽을 건넸다. 수업시간에 이름이 불린 것처럼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러면서도 얼굴을 살피는 건 잊지 않았다. 정작 내가 바란 얼굴이 아니라, 괜히 발끝으로 눈을 차버렸다. 아저씨를 만난 그날이 꿈처럼 느껴졌다.
"할머니, 그때 논에 왔던 아저씨 이름 뭐였지?"
"네가 졸졸 따라붙던 그 아재?"
"응."
"글쎄 뭐이나… 모르겠는데."
이름만 알면 선생님한테 물어볼 수 있을 텐데. 아저씨가 몇 번이나 알려줬던 이름이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답답해서 할머니를 보채도 끝내 듣고 싶은 말은 돌아오지 않았다. 유난히 길었던 겨울이었다.
“입대 준비하니?”
며칠째 눈길에 서 있는 나를 보고 키득거리며 놀리는 군인 아저씨도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눈길만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결국 도망치듯 집으로 향했다. 아무리 기다려봐도 그때의 아저씨 목소리는 어디에도 들리지 않았다.
보름쯤 지나자 아름이의 성화에 못 이겨 다시 비료포대를 챙겨 뒷산으로 향했다. 눈은 여전히 쏟아졌고, 옷은 매일 축축해졌다. 그렇게 달력이 넘어가는 동안 아저씨의 모습도 눈더미 속에 겹겹이 묻혔다. 그러다 내려앉은 눈이 녹아내릴 무렵엔, 새 책가방에 적응하느라 아저씨는 조용히 지워졌다.
가끔 산책길에 메뚜기를 보는 날이면 그날의 기억이 하루 종일 머릿속에 떠오른다. 아저씨는 이제 주름살이 지긋한 나이가 되어있을 것이다. 어딘가에서 행복과 함께 살아가고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얼굴도 이름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지만, 그래도 나에게 줬던 온기만큼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그날 정말 감사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오래도록 따스함을 남겨주신, 그 시절 ‘뇌종부대’ 군인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