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없으면 서러운 게 운동회

가장 시끄럽고도 가장 조용했던 날

by 달구비

만국기 사이로 '탕!’ 총성이 울리자, 친구들이 흙바람을 일으키며 튀어나갔다. 혹시 뒤처지기라도 할까 봐, 나는 눈앞에 보이는 친구 뒤로 바짝 따라붙었다.


“사탕을 찾아라!” 선생님의 들뜬 목소리에, 눈앞을 가로막은 쟁반 속으로 고개를 훽 처박았다. 곧이어 콧구멍 가득 밀가루가 차올랐다. 코가 계속 간질거려, 결국 참지 못하고 선생님을 향해 재채기를 터뜨렸다. 순식간에 선생님 얼굴이 흰 수염 할아버지로 변해있었다.


"백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심호흡을 하면서, 다시 쟁반 속으로 파고들었다. 억지로 입을 끔뻑거리자 곧 신호등 사탕이 혀끝에 닿았다. 텁텁하던 밀가루 맛은 사라지고, 사탕의 달콤함이 입안 가득 번졌다.


눈앞으로 흰 수염 할아버지, 아니 선생님이 세차게 손짓을 했다. 그곳엔 커다란 작대기 끝으로 과자가 매달려 달랑거리고 있었다. 입을 쩍쩍 벌리고 뻐끔거리는데 과자는 나만 피해 갔다. 약이 바짝 올라 달려들었더니, 드디어 앞니 사이로 과자가 걸렸다. 백군 깃발 쪽에서 "와!" 하는 환호성이 터졌다.


나는 친구들을 제치고 앞만 보며 뛰었다. 이윽고 내 손등에는 ‘1’이라는 숫자가 찍혔다. 밀가루와 땀으로 범벅이 된 내 얼굴에 처음으로 뿌듯한 웃음이 번진 순간이었다.


“백군이 이겼다! 청군의 패배다! “


승리의 함성에 휩쓸리기도 전, 벌렁거리는 가슴을 움켜쥐고 결승선을 지나쳐 정문을 향해 달렸다. 혹시라도 땀에 숫자가 지워질까 봐 팔을 번쩍 들었더니 백군 친구들이 우르르 달려 나와 나를 호위했다. 분명 할머니도 두 팔 벌려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잘했다고 다마고치를 2개나 사줄지도 모른다. 나는 숫자가 찍힌 손등을 꼭 잡은 채, 정문 쪽을 바라봤다.


그러나 내 발걸음은 점점 느려지다가 멈추고 말았다. 함성으로 들썩이던 운동장의 열기는 멀리서 나는 소리처럼 희미하게 느껴졌다. 갑자기 손등에 찍힌 숫자가 아무렇게나 끄적거린 낙서 같아 보였다.


정문 앞, 우리 집 빨간 경운기는 끝내 보이지 않았다.


“백군 점수가 100점이나 앞서!”


흥분된 목소리로 다가오는 아름이 손등에 '5'라는 숫자가 선명했다. 그제야 내 손등의 '1'이 조금은 빛나보였다. 그런데 아름이 손끝에 무언가 달랑거리고 있다. 저게 뭐지? 아... 다마고치다.


“너네 할머니 아직도 안 왔나 봐.” 아름이가 어딘지 모르게 얄밉게 말했다. '올 거야.'이라는 말이 혀끝에서 맴돌다 "응."이라는 말로 뱉어졌다.


뽁뽁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댔지만,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마고치는 운동회날만 손에 쥘 수 있어서, 오늘을 놓치면 나만 일 년을 기다릴게 뻔했다. 하지만 이제 다마고치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때 내 손이 더 잡고 싶었던 건 어른의 손이었다. 그냥 아무 어른의 손이 아니라, 내 곁에서 나를 꼭 지켜줄 보호자의 온기를 잡고 싶었다.


"이제 곧 학부모 달리기 한대. 일단 우리 할머니랑 나가. 네 할머니라고 하면 되잖아."

아름이 말에 내 심장이 콩콩 뛰었다. '가족과 함께 하는 거니, 꼭 누구든 모시고 와라' 하는 선생님의 목소리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정말 할머니가 안 오면 어쩌지.’

‘선생님이 날 싫어하면 어떡하지.’

걱정들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꾹꾹 눌러 삼켰다. 나의 멍해진 시선은 저절로 운동장을 향했다.


돗자리마다 가족들이 둘러앉아 수박을 나누어 먹고, 머리를 묶어주는 모습들.

엄마 손을 이끌고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거나, 아빠가 얼음물을 먹여주는 광경들이 내 눈동자에 차곡차곡 담겼다. 기다리지 않아도, 불안해하지 않아도, 언제나 곁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웃음이었다. 그것은 곧 나에겐 닿지 못할 가족의 사랑이었다. 내 주위로만 음소거가 켜진 듯 외톨이가 된 것 같았다.


"알았어. 우리 할머니는 안 오려나 봐."

눈으로는 자꾸만 할머니를 찾으면서, 입으로는 정말 내뱉고 싶지 않았던 말이 흘러나왔다.


“하낫 둘, 하낫 둘”

친구들은 모두 엄마의 손을 꼭 움켜쥐고 상기된 얼굴로 발을 맞추었다. 아름이 할머니와 나만 보이지 않는 벽을 사이에 두고 엇박자로 발을 굴렀다. 묶인 밧줄 때문인지 발목이 자꾸 꺾였다. 넘어질까 봐 아름이 할머니의 옷깃을 슬쩍 쥐었다. 나는 오른발을, 아름이 할머니는 왼발을 움직였다. 왼발에서 슬리퍼가 훌러덩 벗겨졌다. 할머니가 허리를 구부려 고무슬리퍼를 주워 신는다. 그 틈에 고개를 살짝 들어 주위를 쳐다봤다. 킥킥거리는 친구들과 눈이 마주쳤다.


창피함에 달아오른 얼굴을 머리칼로 가리고, 다시 한 발자국 내디뎠다. 또다시 아름이 할머니가 옆으로 고꾸라졌다. 옆구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리며 일으켰다. 친구들의 키득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코끝이 찡하게 아려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학부모도 없으면서, 왜 운동회에 온 거야?' 친구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엄마 대신 할머니와 나온 건 나뿐이었다. 심지어 내 할머니도 아니다. 이제는 입술을 깨물어도 소용이 없었다. 시야가 뿌예지고, 눈물 한 방울이 더 이상 못 견디겠다는 듯 툭 떨어졌다.


“재영아! 재영아!”


숨죽여 기다리던 그 이름이, 그토록 기다리던 목소리가 운동장을 뒤 흔들듯 터져 나왔다.

고개를 번쩍 들자 익숙한 짧은 뽀글 머리가 보였고, 내 핑크색 운동화를 신고 절뚝이며 뛰어 오고 있었다.


“할머니!”


겨우 들어 올린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할머니에게는 운동화가 없었다는 것을.


할머니의 굳은살 가득한 발에는 늘 장화와 슬리퍼만 신겨져 있었지, 다른 게 걸쳐져 있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남색장화, 보라색 고무슬리퍼는 눈앞에 있는 것처럼 금세 떠올려졌지만 운동화는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할머니는 신발장 앞에서 오랫동안 머뭇거렸을 것이다. 앞코가 발톱을 짓이기며 눌러온데도, 주름진 발을 억지로 욱여넣었을 것이다.


어린 딸의 운동회에서, 엄마 대신 엄마로 나서야 했으니까.


“뭐이라, 벌써 끝나 불었지라… 내가 늦어분 거구먼…”

할머니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내 얼굴만 살폈다. 정작 발뒤꿈치는 땅에 질질 끌려, 덧신양말이 흙으로 까맣게 번져있었다. 그 와중에도 도시락은 절대 흙에 닿지 않으려는 듯, 품 안에 소중히 들려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때는 어린 마음에 처음 느낀 외로움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아름이를 힐끔거리던 질투의 눈빛은 내 안의 결핍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날의 나는, 할머니에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만약 그날의 운동장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꿈에서라도 좋으니 그날의 할머니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나는 이 말만큼은 꼭 전하고 싶다.


걱정하지 말라고. 나에게 있어 할머니는 단 한 번도 늦은 적이 없었다고…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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